김아중은 촬영 현장에 들어서자마자 활기차게 인사를 건넸다. 이어 눈을 반짝인 채 ‘씨네플레이’에 업로드된 여러 글과 영상의 후기를 전해줬다. “<그리드>에 관해 정리를 너무 잘 해주셨더라고요!” “<킹메이커> 선배들 인터뷰 봤어요, 영화 너무 재미있던데요?” 이런 말이 단순한 인사 치레가 아니었음을 깨달은 건, 그와 캐릭터에 대해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서부터다.
첫 주연작을 통해 단번에 충무로 정상에 오른 그는 본인이 가장 잘 할 수 있음을 입증한 퀸카 캐릭터 노선을 걷는 대신, <싸인> <펀치> <원티드> 등 보기 드물었던 장르물에 꾸준히 도전하며 국내 드라마의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왔다. 시청자가 김아중의 도전을 자연스레 신뢰할 수 있게 된 건 그의 탄탄한 준비성 덕분. 법의학자를 연기하기 위해 부검의들의 업무 환경을 관찰하고, 흉부외과 펠로우를 연기하기 위해 심장 이식 수술 과정을 견학했던 그는 완벽한 사전 준비로 다져진 캐릭터들을 통해 시청자들을 사로잡아왔다.
한반도도 아니고, 아시아도 아닌, 무려 지구를 지키는 스케일의 드라마 <그리드>는 그의 새로운 도전이 빛날 작품이다. 지구를 덮친 태양풍처럼 펄펄 끓는 복수심을 품은 새하(서강준)와 예측할 수 없어 더 무서운 살인범 마녹(김성균) 사이, 그들의 에너지를 차분히 누르며 이수연 작가가 설계한 사건의 핵에 접근하는 새벽(김아중)은 각자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그리드>의 거대한 세계관 내 무게 중심을 잡아낸다. “여성 배우들의 도전이 담긴 작품에서 경외심을 느낀다”는 배우로서 자신이 원하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드라마로 찾아온 김아중과 마주앉아 나눈 이야기를 전한다.
<그리드>의 세계관이 꽤 복잡하다.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해준다면.
태양풍으로부터 지구를 지키는 격자무늬의 보호막.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보호막을 ‘그리드’라 칭한다. 이를 만든 창시자가 바로 유령(이시영)이다. 그가 24년만인 2021년, 편의점 살인사건의 공범으로 나타난다. <그리드>는 이 유령을 쫓는 이야기다.
이수연 작가의 신작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이수연 작가 작품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꼽는다면.
<비밀의 숲>. 많은 분들이 이 작품을 꼽는 것 같다. 방영 당시 (다른 작품과) 굉장히 다른 결을 지닌 작품이라고 생각했고, 드라마를 본 뒤 대본이 궁금해 따로 대본집을 사서 읽기도 했다.
대본집까지 구매했다면 ‘찐팬’인데. <그리드>의 출연 제의가 유독 반가웠을 것 같다.
굉장히 꼼꼼하게 읽었다. 극의 흐름에 따라, 수많은 물음표를 연속적으로 던지는 작가님의 전개 방식에 감탄했다. ‘정말 미스터리의 장인이시구나’ 하면서. (웃음) 현실을 녹여내기 위한 디테일함이 대본에 잘 표현돼있단 점도 놀라웠다.
<명불허전> 이후 오랜만에 드라마 현장으로 돌아왔다. <그리드>의 첫 촬영날 감회가 조금 더 남다르지 않았을까, 추측해봤다.
현장이 오랜만이라 더 부담이 되는 건 없었다. 과거보다 훨씬 더 편해진 현장에서 즐겁게 촬영했다. 주 52시간 시스템의 드라마 현장은 처음이었다. 제때 잠자고, 식사하고, 샤워할 수 있어서 너무 좋더라.(웃음) 첫 촬영은 형사 팀과 함께 살인범 마녹(김성균)을 쫓는 추적 액션 시퀀스였다. (마녹이 거주 중인) 치과 건물을 에워싸면서 그를 검거하려 쫓는 장면. 첫 촬영부터 야간 액션 신이라 체력적인 부담은 있었지만, 새벽이란 캐릭터에 적응하기엔 좋은 첫 촬영이었다.
새벽은 어떤 캐릭터인가. 배우가 직접 소개해준다면.
정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지녔다.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을 품은, 인간미가 돋보이는 인물이기도 하다. 과거보단 미래에 초점을 둔,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지녔다. 극 중 예상할 수 없는 사건이 계속 발생하는데, 새벽은 불안정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단단함을 유지한다. 이런 태도들이 새벽이 지닌 매력이다.
새벽은 생체 증거 전문이다. 생체 증거, 수사와 관련한 전문적인 장면이 다수 등장하던데. 형사를 연기하기 위해 준비하거나,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무엇이었나.
작품 출연을 결정한 후 열흘 만에 촬영 현장에 투입됐다. 현장 감식, 탐문 수사, 생체 증거를 위해 3D 프린터를 작동하는 법…. 이런 기술들을 급하게 습득했야 했다. 연출부 스탭들 덕분에 전문가 분들을 사전에 만나 인터뷰하거나 관련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을 조금 마련했다. 몇몇의 전문가 분들이 현장에 나와 계시기도 했다. 기술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강력계 형사만이 지닌 직업적인 본능을 살려내는 것도 중요했다. 경찰은 시민에게 늘 친절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강력계 부서만의 특수성이 있더라. 상대를 조금 불편하게 만들어 감정의 변화를 이끌어내거나, 그 변화를 읽어내는 것 역시 그들의 업무 중 하나다. 이런 특징을 잘 짚어내고 싶었다.
<싸인> <펀치> <명불허전> 등 특수한 직업에 임하는 캐릭터를 연기할 때마다, 해당 직업을 지닌 분들과 실제로 함께하며 그들을 관찰했다는 인터뷰를 봤다. 이번 작품 역시 같은 과정을 거친 건가.
기간이 길진 않았지만, 동대문 경찰서의 강력계 형사님들이 많이 도와주셨다. 야간 근무의 참여를 허락해주셨다. 업무의 순서나 기술적인 부분, 강력계 부서 팀 내 여자 형사의 포지션 등을 알려주셨다.
아주 바쁜 열흘을 보냈을 것 같다.
밤낮없는 매일을 보냈다. 낮에는 컨셉 회의와 미팅을 진행하고, 저녁부터 아침까진 경찰서 야간 근무에 참여했다. 사격 훈련도 했고, 액션도 짧게나마 계속 익혔다. 사실 유튜브에 제공되는 클립 등을 통해서도 많이 엿볼 수 있는데, 특수한 직업을 구현해야할 때엔 실제 직업에 계신 분들을 만나 뵙는 편인 것 같다. 실제로 관찰하는 게 더 와닿더라.
이전작들과 <그리드>의 또 다른 공통점, ‘장르물’이다. ‘김아중 배우와 장르물이 만나면 대박 난다’는 말이 있고, <그리드> 역시 이와 같은 지점에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데. 그간 출연해왔던 장르 중 ‘찰떡처럼 잘 맞았다’, 여겨진 장르가 있다면?
‘찰떡이었다’란 표현을 쓰기엔…. 어떤 장르의 작품이든 촬영할 땐 힘들다가도, 완성본을 보면 뿌듯하다. 자기 반성을 할 때도 있었다. 미스터리 장르, <그리드>의 일원으로선 계속 어떤 사건의 정황을 파악하려는 추리적 사고를 유지해야했다. 에너지가 꽤 소모되는 과정이었지만, 그만큼 재미있더라. 점점 몰입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로맨스 장르도 굉장히 좋아한다. 멜로, 늘 하고 싶다. (웃음)
리건 감독은 김아중 배우의 액션을 <그리드>의 관전 포인트로 꼽기도 했다. 촬영 중 인상 깊은 액션 시퀀스가 있었다면?
극 중반 중요한 액션 시퀀스가 등장한다. 부산에서 촬영한 장면이다. 부산에 굉장히 오래된,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철길이 있더라. 동굴처럼 무척 깊은데, 한여름에 들어가도 패딩을 입어야 할 만큼 추웠다. 지방 로케이션이다 보니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고, 타이트한 스케줄로 촬영을 진행했다. 무척 축축하고, 어둡고, 얼마나 오랜 역사를 지녔을 지 모를 퀘퀘한 먼지들이 쌓인 공간에서 열심히 뒹굴었던 기억이 난다. 5화, 6화 정도에서 확인하실 수 있을 거다.
새벽은 새하, 어진(김무열), 마녹, 유령과 골고루 연이 닿아있는 캐릭터다. 함께한 동료 배우들과의 호흡도 궁금하다.
<그리드>가 품은 거대한 이야기, 그를 구현해내기 위해 현장에 느슨해지지 않으려는 긴장감이 늘 감돌고 있었다.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이 분위기를 서강준 배우가 잘 받쳐줬다. 김무열 배우, 이시영 배우와는 동갑내기다.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함께 느끼고 통하게 되는 지점들이 있어 편했다. 김성균 배우는 본인만의 센스와 친근함을 지닌 배우다. 친한 오빠 같은 편안함이 있어 의지가 많이 됐다.
<그리드>의 메이킹 영상을 봤는데, 현장 속 김성균 배우는 카메라 밖에서 웃고 있어도 정말 무섭더라. (일동 웃음)
저희끼리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 김성균 배우를 카메라로 담으면 묘하게 시네마틱하다, 너무 영화로운 배우라고. 샷 안에서 김성균 배우만이 전할 수 있는 특유의 기운이 있고, 그 아우라가 정말 멋있다.
디즈니 플러스에서 서비스되는 작품이니만큼,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오픈된다는 점에서도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특히 한국 작품들이 세계 관객에게 가장 주목 받고 있는 시기이기도 한데.
우리의 콘텐츠 수준이 갑자기 발전된 게 아니라, 꾸준히 단련돼왔던 우리만의 히스토리라고 생각한다. 힘든 상황에서도 해당 분량을 다 만들어내는 소화력도 있었고. 다채로운 발상을 떠올리는 뛰어난 크리에이터들이 많은 나라! 앞으로도 세계적인 관심이 끊이지 않고 유지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리드>를 제외하고 재미있게 본 디즈니 플러스 작품이 있나.
너무 많다. 그 중 <왓 이프?>라는 애니메이션이 있다.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 내 기존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비틀어 만든 콘텐츠인데, 그 시도 자체가 너무 멋있더라. 디즈니였기에 가능했던 부분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 부럽기도 하고. 멋있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의 다큐멘터리도 즐겨본다. 디즈니 공주님들도 다 좋아한다. (웃음)
이번엔 디즈니 플러스 밖으로도 범위를 확장해보자. 인생 영화를 소개해준다면?
이런 질문에 답하기가 생각보다 어렵다. 한 편만 꼽기가 너무 어려워서. ‘내가 배우 인생에서 이런 작품을 만날 수 있을까?’라 꿈꿔보게 되는 작품들은 있다. 줄리안 무어의 <스틸 앨리스>, 메릴 스트립의 <다우트> <철의 여인>, 제시카 차스테인의 <미스 슬로운>, 에이미 아담스의 <컨택트>. 여성 영화는 아니지만 <마스터>도 좋아한다. 마리옹 꼬띠아르의 <러스트 앤 본> <아네트>, 케이트 블란쳇의 <블루 재스민>, 레아 세이두의 <가장 따뜻한 색 블루>도 좋고. 여성 배우들이 도전적으로 임했던 작품들을 보면, 같은 배우로서 경외심이 든다. (두 손을 모으며) 이런 작품을 배우 인생에서 꼭 만나고 싶다.
<그리드> 역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드라마다. 그 외 따로 짚어줄 관전 포인트가 있나.
미스터리 추적 스릴러로서 장르적인 재미. 이에 더해 각 인물들이 저마다의 위치에서 다층적인 세계관을 지녔다. 각 인물들이 지닌 신념 등을 눈여겨봐주시면 더 재미있으실 거다.
극 중 2004년이 중요한 시기로 등장한다. 김아중 배우의 데뷔가 겹쳐있다는 사실이 재미있더라. 2004년과 현재, 눈에 띄게 변한 점과 변하지 않은 점을 꼽아준다면.
현장 경험이 풍부해지고 생각이 깊어지기도 했겠지만, 가장 크게 느끼는 변화는 체력 저하다.(웃음) 달라지지 않은 점은 배우로서 작품을 대하는 마음. 여전히 새로운 작품을 만나면 긴장된다. 사적인 욕심을 채우기보단 작품을 중심으로 생각하려는 배우로서의 마음가짐, 그런 것들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훗날 김아중을 떠올렸을 때,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나.
이 역시 어렸을 때부터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신인 시절부터 같았다. ‘김아중의 작품은 재밌다’ ‘김아중의 작품은 믿고 볼만하다’, 그런 믿음을 줄 수 있는 배우로 기억에 남고 싶다. 배우로선 너무 큰 영광이다.
글 씨네플레이 유은진 기자
사진 협찬/제공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