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박찬욱이 극찬하고 <헤어질 결심> 음악감독이 참여!<수프와 이데올로기> 양영희 감독

<수프와 이데올로기> 양영희 감독. 사진 제공=워너비펀

제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대상 수상, 제17회 야마카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국제 경쟁 초청, 제47회 서울독립영화제 페스티벌 초이스 초청&집행위원회 특별상 수상, 제4회 평창국제평화영화제 평양시네마 초청…. 10월 20일 개봉을 앞둔 양영희 감독의 가족 다큐멘터리 3부작의 종장 <수프와 이데올로기>가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기록이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재일조선인이자 제주 4·3 사건 생존자인 강정희 씨의 막내딸인 양영희 감독이 제작한 다큐멘터리다. 재일조선인 가족사를 통해 한국의 현대사를 들춰낸 작품으로, 양영희 감독의 어머니와 일본인 남편이 따뜻한 백숙(수프)을 나눠먹으며 가족으로서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을 다룬다. 다큐에는 어머니 강정희씨가 마음에 품고 있던 기억(제주 4·3)을 털어놓으며 양영희 감독이 어머니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과정도 그려져, 보는 이들에게 묵직한 울림을 안겨준다.

“우리가 오래도록 곱씹어야 할 생각거리를 제공한다”(박찬욱 감독), “보고 나면 ‘그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 그어진 선은 가늘고 얇아진다”(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70년에 걸친 한반도의 역사의 그늘을 담은 침묵의 대하드라마”(김석범 작가) 와 같이 영화계 거장들의 격찬을 받은 <수프와 이데올로기>를 들고 내한한 양영희 감독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디어 평양>을 시작으로 <굿바이, 평양> 그리고 이번 <수프와 이데올로기>로 가족 다큐멘터리 3부작의 종결을 맺었습니다. 극영화까지 포함하면 가족 4부작인데, 지금 기분이 어떠세요?

이제 가족 다큐는 이번 영화로 종지부를 찍고 싶어요. 픽션으로 넘어가서 극영화를 하고 싶습니다. 얼마 전 원고를 넘긴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마음산책 간)라는 에세이집도 출간을 앞두고 있거든요. 정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는 기분이 듭니다. 사실 두 시간 남짓한 영화로 얼마나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10년 가까이 찍었어요. 그러면 9년 하고 364일 22시간은 거기에 안 들어있는 거잖아요. 아무래도 다큐멘터리는 극영화와 달라서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해서 만드는 게 아니니까요. 그런 다큐멘터리에서 제 가족을 26년이나 쫓아 온 것에 대해서 돌이켜보면, 제가 정말 잔인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면서,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카메라를 받아준 가족에게 참 고마워요. 감독인 제가 잘한 것이 아니라, 정말 제 가족들이 용기가 있었고, 저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2021년 제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을 보였죠.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고요. 국내 개봉이 이렇게 늦어진 이유가 있나요?

글쎄요. 언제라도 개봉하면 좋겠지만, 코로나19 영향도 좀 있지 않았나 싶어요. 배급을 맡은 엣나인필름에서도 고민 중이라며 확답이 오기까지 시간이 걸리기도 했고요.

-처음 버전과 개봉 버전에서 달라진 부분이 있나요?

엔딩크레딧에 배급사가 들어간 것 말고는 달라진 부분은 없습니다. 사실 여러 개의 버전을 만드는 걸 싫어해요. 끝내면 잊어버리고 싶거든요. 편집이 끝나면 영화를 잘 안 봐요. 계속 보기가 좀 힘들어서 제 작품을 잘 안 보는 편입니다. 시사회에 가서도요. 특히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어머니에 대한 영화인데, 지난 1월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영화를 더 못 보겠더라고요. 생각이 너무 많이 나니까요. 음향 체크를 위해서라도 한번 처음부터 봤어야 했는데 못 했어요.

양영희 감독과 남편 아라이 카오루 프로듀서. 사진 제공=워너비펀

-이번 영화에서 이전 다큐멘터리보다 더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애니메이션이 들어갔다는 점입니다. 극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는 말하자면 천연의 영상이라고 할까요? 인공적이지 않은 영상에 애니메이션을 넣은 건데요. 과연 다큐멘터리와 잘 융합이 될지 정말 무서울 정도로 고민이었어요. 최근에는 다큐멘터리에 애니메이션 넣는 사례가 많긴 한데요, 이번 영화에서 정말 효과적으로 작동할지 고민이었습니다.

어머니에게 10대까지의 사진이 단 한 장도 없었어요. 열다섯 살 때 오사카에 미군 폭격을 당하고 제주도로 피난 가서 3년을 살다 4·3사건을 겪고 다시 밀항선을 타고 오사카로 돌아오셨거든요. 그 당시 사진도 없고, 어머니의 회상으로만 하면 관객에게 전달이 약해질 게 뻔하잖아요. 관객들이 다 잠들어버릴 수도 있고요(웃음). 그래서 어머니의 인생을 영화화하자고 결심한 순간부터 그 부분은 애니메이션으로 하려고 결심했고, 처음부터 코시다 미카라는 일본 작가에게 그림을 맡길 생각이었어요. 다만,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이야기하면 너무 유치하게 예뻐질 것 같아서 원칙을 세웠습니다. 나레이션, 애니메이션 그리고 음악으로 구성할 것, 그리고 캐릭터는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었죠.

그래서 음악이 정말 좋아야만 했어요. 전작 다큐멘터리보다 음악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수프와 이데올로기> 음악을 조영욱 음악감독님께서 해주셨어요! 박찬욱 감독의 모든 영화에서 음악을 담당하신 바로 그분이요. 저는 사실 항상 거절당할 걸 예상하고 섭외해요. 제1후보였던 조영욱 음악감독께 처음으로 <수프와 이데올로기> 음악 작업을 부탁드렸는데 바로 하겠다고 말하셨어요. 조영욱 음악감독도 다큐멘터리 음악 작업은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정말 감사했죠.

-영화에서 가족 간의 식사 장면이 참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아버지와의 이야기도 식탁에서 이뤄지죠. 수프,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는 감독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밥이니까, 같이 밥 먹는다는 건 같이 살아간다는 의미죠. 그 밥도 식당에서 먹거나 컵라면을 먹는 거랑 누가 만들어준 거를 먹는 건 다르다고 생각해요. 물론 엄마만 밥을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웃음), 그렇게 손으로 만들어줘야 한다는 건, 건강을 생각하고 맛을 생각해야 하고, 어제는 고기 먹었으니 오늘은 생선을 먹어야지 계획하는 그런 하나하나가 다 정성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정성이 담긴 음식을 같이 먹는다는 것이 참 의미가 있죠. 한번 한번의 밥을 소중히 여기는 가족은 정말 행복한 가족이라 생각해요. 어머니가 방북할 때도 사실 아들이랑 손주랑 같이 밥 먹으러 가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지금 제 남편, 영화에서는 예비 사위가 오사카로 온다고 했을 때, 식당에 가도 괜찮을 텐데, 집에서 아주 격식을 차리지도 않고, 처음으로 오는 일본인에게 마늘이 듬뿍 들어간 닭백숙을 손으로 찢어줬잖아요. 아주 격식 없이 대접해주는 것도 정말 고마웠고, 또 그것이 최고의 대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양영희 감독의 모친 故 강정희 여사. 사진 제공=워너비펀

-어머니와 평소 한국 음식을 많이 먹었나요?

사실 어머니는 일본에서 나고 자랐어요. 제주에서 3년을 살았어도 맵지 않은 일본 음식을 더 좋아하셨죠. 다만, 어린 시절을 한국에서 보낸 아버지를 위해 한국 음식을 많이 만들어주셨어요. 여름에는 물회를 하셨는데요, 아버지가 좋아하셨거든요. 그 작은 생선, 이름이 뭐였더라? 아 자리돔이요. 여름이면 자리돔 물회를 많이 하셨어요. 부추를 듬뿍 넣어서요. 그러다가 제가 감독으로 데뷔하고, 한국 국적을 얻으면서 한국에 올 기회가 많아졌어요. 그러다 어머니를 모시고 한국 음식을 더 다양하게 접하게 됐어요.

-좋아하는 한국 음식은 뭔가요?

일단 고기를 정말 많이 먹게 됐네요. 너무 맛있어요! 영화에서 나왔듯이 닭백숙도 좋아하고요, 감자탕, 보쌈, 해물탕도 맛있어요. 그리고 그 말린 나물인데 이름이, 아 시래기, 우거지죠. 너무 맛있어요. 정말 예술이에요! 말린 거라서 쉬울 줄 알았는데 요리하려니 힘들더라고요. 정말 옛날 어머니들을 종일 부엌에서 못 나왔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즐겨 먹는 한국 음식은 평양냉면입니다. 지금은 제가 북한 입국이 금지된 상황인데요. 예전에 <디어 평양> 작업을 하면서 북한에 갔을 때, 평양냉면을 처음 먹었어요. 그때만 해도 옥류관에 외화로 지불하는 손님은 줄을 따로 서서 빨리 들어갈 수 있었거든요. 제가 가면 오빠들이나 조카들이 줄 안 서고 빨리 들어갈 수 있으니 너무 좋아했죠. 사실 그때는 평양냉면이 맛있다는 생각을 안 했어요. 저한테는 면도 질겼거든요. 지금은 평양냉면만 찾아서 먹을 정도예요. 평양냉면집에서 먹는 녹두전도 정말 기가 막히고요.

-남편분도 한국 음식 좋아할 것 같아요.

맞아요. 남편이 한국 음식을 너무 좋아하게 됐어요. 한번은 어떤 식당에 갔어요. 마늘만 꼬치로 구워 먹을 수 있는 곳이었는데, 돈을 안 받고 마늘을 주니 감동하더라고요(웃음). 일본은 작은 접시 하나도 다 돈을 받잖아요. 한번은 그냥 마늘을 받았는데, 너무 맛있어서, 돈을 더 드릴 테니 마늘을 더 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주인이 웃으면서 ‘돈 안 받아요’하는 거예요. 뭐지? 마늘을 더 안 준다는 건가? 남편이 순간 혼란스러워 했는데, 다시 엄청나게 많은 양의 마늘을 내주시는 걸 보고는 한국에 이주해 살고 싶다고 할 정도로 한국 음식에 푹 빠졌습니다. 김치도 잘 먹고요(웃음).

-예비 사위가 인사를 온다고 했을 때, 닭백숙을 준비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어떤 기분이었나요?

어머니께 왜 그러시느냐고 여쭤봤어요. 사실 하루 전에 친정에 갔거든요. 어머니께 소개드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연락을 한 후에요. 그랬더니 저녁에 마늘을 까면서 요리를 준비하고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질문했죠. ‘뭐 하세요?’ 그랬더니 ‘내일 손님 대접할 수프를 만든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일본인인데 환영하시는 거예요?’라고 했더니 ‘와주는 것도 고맙고, 젊은 사람 영양가 있는 거 먹여야지’ 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한국에서는 딸의 남편이 될 사람이 처음 집으로 인사 오는 날에는 이렇게 해서 먹이는 전통이 있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이제 다 허용하시는 거예요? 일본인은 안 된다면서요?’라고 했더니 ‘상관없지. 사람이 중요하지’라고 하셨어요. 거참, 왜 이제야 그렇게 말씀하시느냐고,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말씀하시지 그랬냐고 했어요. 아마도 쉰 넘는 딸이 약혼자를 데려온다고 하니 이번에 놓치면 더는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었겠다 싶어요(웃음).

양영희 감독의 남편 아라이 카오루 프로듀서와 모친 故 강정희 여사. 사진 제공=워너비펀

-영화에서는 현대사의 비극적인 사건들을 겪은 한 여인의 기구한 삶이 드러납니다. 이데올로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또 이데올로기가 감독님의 가족에 미친 영향은 뭐라고 보시나요?

혹시 제가 한국이나 북한에 태어나 자랐다면 어땠을까요? 지금 한국은 그렇지 않지만 독재 정권 시대에는 엄했잖아요. 허용되는 이데올로기의 범위도 협소했고요. 북한은 지금도 그렇고요. 저는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어요. <파친코>의 배경이 된 도시가 바로 어머니 동네예요. <파친코>의 손자가 제 외할머니 세대죠. 그렇게 생각하면서 <파친코>를 읽었어요. 그런데 제가 자란 오사카라는 동네가 정말 이데올로기의 총집합장 같은 동네였습니다. 사실 뚜껑을 열어보면 그럴 건데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잖아요. 독재정권이 포장을 하니 말을 못 하는 것일 뿐이고요. 그런데 오사카는 여러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였어요. 반공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거든요. 그러니 술집이나 전통시장에서 맨날 어른들이 싸워요. 이 테이블은 북한 지지자, 바로 옆 테이블은 남한 지지자가 있는 동네였죠. 동네 목욕탕에 가면 김일성을 찬양하는 노래를 애들이 부르던 동네였거든요. 한반도에는 38선이 하나뿐인데도 복잡한데, 제가 자란 동네는 정말 38선이 여러 개였어요(웃음). 38선이 마치 거미줄처럼 있는 동네였죠. 그러니 이데올로기라는 말만 들어도 질색이었습니다. 이데올로기가 다르다고 사람을 공격하고 죽이는 것에 대한 알레르기가 어릴 때부터 있었어요.

동네도 그랬지만, 우리 가족도 마찬가지였어요. 제사 때 친척들이 모이잖아요. 아버지는 북한을 비판하는 삼촌에게 ‘너는 김일성 수령님의 위대함을 몰라’라고 하시며 싸웠죠. 또 종교를 믿는 삼촌에게는 믿지 말라고 강요하셨고요. 제가 나이가 좀 들고 한번 아버지께 그랬어요. 삼촌이 북한을 비판하든, 종교를 믿든 무슨 상관이냐고요, 우리한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면서요. 그런데 알고 계시나요? 일본에서만 9만4천 명이 북한으로 갔어요. 김일성이 옳고, 북한이 맞다는 교육을 받았고, 조총련에 평생을 바친 부모 아래서 자랐잖아요. <디어 평양>을 찍으면서 북한을 가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심지어 농업, 수산업 박물관에도 김일성 동상이 있고 어딜 가도 다 김일성의 역사였어요. 이런 나라에서 교육을 받으면 정말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항상 제 부모, 주변의 어른들이 좋다고 하는 것과 제 안의 목소리가 일치하지 않았어요. 이게 이데올로기가 다르단 건가? 제 안에서도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가 싸우고 있고, 그 이데올로기 때문에 나라들도 싸우는 것이 참 묘하게 다가오더라고요.

-그래서 영화 제목이 <수프와 이데올로기>가 된 건가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한 가족의 일로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또 수프와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너무 달라서 붙이면 재밌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실상을 보면, 현실은 그런 국가 제도나 권력이나 이데올로기에 개인이 절대 이길 수 없잖아요. 끝까지 반항해서 감옥에 갈 수도 있지만 그래도 결국 못 이겨요. 영화 안에서는 그래서 수프가 이겨야만 합니다. 극영화인 <가족의 나라>를 찍을 때도 그런 점을 의식했어요. 어찌 됐든, 큰 의미에서 좀 눌려 있는 가족인데 아버지보다는 어머니가 이겨야 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영화 제목이 <이데올로기와 수프>는 될 수 없었던 거죠.

-영화를 찍고 나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나요?

바뀌었다기보다는 이데올로기는 이겨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영화를 찍고 나니, 이건 이기고 지는 문제도 아니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항상 국물 안에 섞인 것처럼, 생활 안에 이데올로기가 녹아 있는 거예요. 아, 이건 이데올로기고 저건 수프구나 하는 것처럼 구분되는 게 아니란 거죠. 어쩌면 수프가 들어간 냄비 안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실제로 우리는 수프를 먹는데, 잘 보면 큰 이데올로기가 섞여 들어간 냄비가 지구인 것 같아요. 그래서 분리하기가 어렵죠. 다 포함해서 영화에 녹여야 하는 것 같아요. 일본에서는 저를 보고 정치적인 감독이라고 많이들 이야기해요. 저는 영화에서 정치를 빼지 않고 보여주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생각도 들죠. 그런데 저는 정치가 없는 이야기도 좋아해요. 코미디도 좋아하고, 정치 부분을 약하게 한 드라마도 봐요. 하지만 실제 사람들의 생활은 정치를 논하지 않더라고,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뉴스에서 항상 접하게 되고, 우리가 사는 집의 가격, 먹는 음식 모두가 정치를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잖아요. 더군다나 재일한국인은 늘 정치와 연결돼 있어요. 저희집처럼 북한에 가족이 있는 집이라면 더더욱 떼려야 뗄 수 없는 거죠.

양영희 감독과 남편 아라이 카오루 프로듀서. 사진 제공=워너비펀

-영화를 보면서 처음에는 일본인 사위를 맞이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그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주4·3사건이 불쑥 들어온 느낌도 들었어요. 영화 기획 초기부터 4·3사건을 삽입할 생각이셨나요?

영화를 만들 때 입구와 출구를 생각해요. <수프와 이데올로기>의 입구와 출구는 모두 어머니입니다. 입구에 들어서서 몇 개의 그림을 보는데, 이 그림이란 건 이슈예요. 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관객들이 그 문을 열어볼 텐데요. 재일교포 딸과 엄마, 딸의 결혼, 치매, 경제적인 문제, 오사카 등등이 있어요. 저는 입구에서 그런 그림들을 보여주면서, 관객들이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그림을 보길 원해요. 영화를 보기 전보다 영화를 보고 난 2시간 후에 관객의 시야가 좀 더 트일 수 있도록요. 그런 느낌을 받고 극장을 나서면 좋겠다는 바람이 항상 있어요. 영화 초반부터 많은 이슈를 넣기 어려우니, 애피타이저로 몇 개 넣고, 주 요리 격인 4.3사건을 나중에 넣은 거죠. 이 작업은 관객이 스스로 상상해야 한다고 봐요. 처음부터 어머니와 4·3사건이 있다고 설명하고, 아들을 북한에 보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순서대로 영화 플롯을 구성하면 너무 수업 같잖아요? 좀 더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도록 한 장치입니다.

모친 故 강정희 여사 사진 제공=워너비펀

-제가 상상력이 많이 부족했나 봅니다(웃음). 영화를 찍기 전에 어머니가 4·3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신 적이 있나요?

영화 찍기 전에 4·3사건을 여쭤본 적이 있어요. 제주도에 가본 적이 없다고 답하셨죠. 아버지께도 여쭤보니 4·3사건을 알긴 하지만, 1942년에 제주에서 일본으로 건너가셨으니 체험자는 아니라고, 또 고향에 그런 일이 있었던 거만 알고 있다고 하셨죠. 사실 큐슈-히로시마-오사카-제주는 사람들이 배로 편하게 왕래했다고 해요. 일제강점기 때도요. 부유한 사람들은 딸 시집보낼 준비로 오사카에 장을 보러 간다고 할 정도였다고 하더라고요. 돈 벌러 오사카에 간다는 사람도 있었고요.

-그렇게 4·3사건을 부정하던 어머니가 결국 속내를 털어놓게 되죠.

일본에서 나고 자란 어머니지만, 보통 부모의 고향이라고 하면 가고 싶어 하지 않나요? 궁금해하거나 한번 가보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실 법도 한데 말이죠. 그런데 말이 점점 바뀌었죠. ‘제주도는 잔인한 곳이고 좋은 추억이 없다, 4·3사건에 대해서도 제주에 조금 있었는데 이야기 들을 생각도 하지 마라’, ‘건드리지 마라, 너는 알 필요가 없다’라고 말씀하셨었죠. 그런데 4·3사건에 대해 한국 대통령이 사과도 하고 훌륭한 평화공원도 만들고 있다고, 정말 한국이 변했다고 하니 조금씩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물론 처음에는 카메라 없는 상황에서 말씀하셨죠. 계속 들으면서 ‘엄마, 이건 내가 찍어야 할 것 같아. 너무 중요한 이야기니까’라고 말씀드리고 찍었어요. 그렇게 한 5년을 찍었어요. 그 무렵 남편이 합류했네요(웃음).

같이 4·3사건 관련 책도 읽고 공부하면서 함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머니가 ‘나에 대한 영화 만들어 볼래?’라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아버지로 영화 한편 만들었는데, 부부가 한편씩 다큐멘터리 있으면 멋지겠네!’하면서 본격적으로 찍게 됐죠. 사실 <수프와 이데올로기>에 넣지 못한 이야기도 많아요. 그렇게 남편이랑 같이 어머니 인터뷰를 하면서 10년쯤 찍었어요. 물론 전반 5년은 정말 영화로 쓰지 못할 정도로 짧아요. ‘기억이 안 나’, ‘생각하기도 싫어’ 정도의 수준이었든요. 너무도 오랫동안 기억에 감춰둔 이야기였으니까요. 그렇게 이야기하다 보니 꿈도 꿨다고 하시고, 그런 시간을 거친 후에 남편까지 합류하니 어머니도 많이 생각이 난다며 말씀을 많이 하기 시작했죠.

제주를 찾은 양영희 감독 가족. 사진 제공=워너비펀

-그렇게 정정하던 어머니는 4·3사건을 말하는 순간부터 급속도로 치매가 진행됩니다. 스크린에서도 그 모습이 보여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감독으로 또 딸로 힘든 순간이었을 것 같아요.

사실 10년을 4·3사건 이야기를 계속해오신 거잖아요. 단편적으로라도요. 영화에서 4·3연구소의 연구원들이 방문했을 때 영상이 영화에서는 7분가량 나와요. 실제로는 어머니가 세 시간을 쉬지 않고 이야기하셨죠. 일단 전문가들이다 보니 질문이 매우 구체적이에요. 어머니께서 가끔은 제주도 사투리를 쓰실 정도로 기분이 좋으셨어요. ‘어느 동네에서 태어났어요?’하고 물으면 ‘00동네’라고 답하시면, 카메라 뒤에 있는 연구원들이 SNS로 실시간으로 한국에 있는 연구원들에게 실제 지명을 확인했어요. ‘그 동네에 파출소 있었죠?’ 하면 ‘아, 파출소 옆에 큰 나무가 있었어’라며 답하셨죠. 카메라 뒤 연구원들이 매번 엄지척을 날리면 어머니는 마치 ‘거 봐라, 내가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라고 말하는 듯 신이 났죠.

인터뷰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어요. 저도 남편도 할 수 없는 구체적인 인터뷰였죠. 지금까지 제가 해주신 이야기보다 더 많은 그림을 마치 모이듯이 말해주셨어요. 무려 세 시간 동안이요. 혹시나 쓰러지시나 않을까 걱정됐죠. 그런데 어머니는 당신의 이야기 한마디 한마디를 너무 정확하게 알아주는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 더 흥이 나서 이야기하셨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그날 저녁에 정말 기분 좋게 함께 생맥주를 한잔했어요. 어머니께선 ‘한국분들 정말 대단해, 연구를 정말 열심히 했어’ 하시며 열정적으로 이야기하셨죠. 다음날이 됐는데 열도 안 나길래 안심했었어요.

그런데, 일주일쯤 지나 ‘아버지 어디 갔어?’라고 하시더라고요. 너무 놀랐죠. 사실 이제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마음도 들었어요. 당신 안에 있는 기억은 말씀하시고 맡겼으니, 이제 잊어버리게 해달라는, 그런 마음이었을 것처럼 느껴졌어요. 너무 힘드셨을 테니까요. 그래서 어머니를 모시고 제주도에 갔을 때는 사실 혹시나 제주도 바다를 보고, 마을을 보면 조금이나마 기억이 되살아나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도 있었어요. 그런 건 없었죠. 그래서 평화공원 묘지에서 어머니 귀에 대고 ‘이제 잊어버리셔도 됩니다’라고 말씀드렸어요. 어머니와 같은 생존자들이 그 힘든 기억에서 해방되셔도, 우리 후대들이 그 기억을 보존하고 세상에 알리겠다는 제 결심이기도 하고요.

-결국 다시 카메라를 들어 다큐멘터리의 세계에 돌아갔습니다. 다큐멘터리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인공적이지 않다는 점이죠. 천연의, 자연의 존재감이라고 할까요? 배우들이 다큐멘터리를 많이 보면 좋겠어요. 배우가 절대 짓지 못하는 표정이 나오잖아요. 물론 극영화에서도 어떻게 저런 연기를 할까 하는 장면도 있지만요. 다큐멘터리에서는 연출하지 않았는데 피사체가 극적인 반응을 하거나 리액션을 할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때는 극영화도 연출도 이기지 못하는, 말 그대로 압도당하는 거예요.

<수프와 이데올로기>에서는 그게 치매 걸린 어머니가 김일성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죠. 그 장면은 문장으로 표현할 수 없잖아요. 아주 영화적인 장면이라고 봐요. 배우가 아닌 실제 인생을 사는 사람의 존재감, 연기가 아닌 표정 이런 것들에 좋은 의미에서의 무거움이라고 할까, 그런 존재감이 다큐멘터리의 매력이죠. 마침 그 장면에서 전등이 깜빡깜빡해요. 전부터 전등을 바꿨어야 했는데 못 갈아 끼운 거였거든요(웃음). 어머니가 치매가 심해지고는 2층에 잘 안 올라가셨는데, 그날따라 올라간다고 하셨어요. 상철이, 오사카행 밀항선을 같이 탄 동생인데 북송됐죠. 이미 죽은 남동생을 찾는데 너무 놀랐었던 기억도 납니다.

<수프와 이데올로기> 메인포스터. 사진 제공=워너비펀

-차기작도 가족을 주제로 한 다섯 번째 작품인가요?

제작이 확정된 건 아니지만 시나리오를 쓰려고 합니다. 극영화가 될 거예요. 내용은 비밀입니다!(웃음)

-영화를 볼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영화관에서 꼭 봐주세요! <수프와 이데올로기>를 OTT에서 볼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꼭 영화관에서 봐주세요!


윤상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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