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론>은 그 어떤 영화보다 가장 먼저 구상을 시작한 영화다
데이미언 셔젤
<위플래쉬>, <라라랜드>의 감독 데이미언 셔젤이 황홀하고도 위태롭던 1920년대 할리우드 이야기를 담은 <바빌론>으로 5년 만에 돌아왔다.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동시에 씁쓸한 이면이 숨어있는 할리우드를 다각도로 다룬 <바빌론>은 80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작품상, 28회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 작품상과 감독상, 미국 배우조합상 SAG 최고상 후보로 오르며 국내 개봉 전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바빌론>을 두고 “그 어떤 영화보다도 가장 먼저 구상한 영화다. 그만큼 오랫동안 제 머릿속에서 숙성시킨 작품”이라고 밝혀 기대감을 고조시켰다. 영화 개봉을 하루 앞둔 1월 31일 오전, 씨네플레이는 데이미언 셔젤 감독과 화상 인터뷰를 진행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흥미로운 대화가 오간 인터뷰였다.
<바빌론>은 무성영화가 오늘날의 유성영화 형태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그린다. 인터뷰에 응한 셔젤 감독은 “20년대 초창기 할리우드는 모든 것이 새롭고 영화 역시 신생 매체로 여겨졌던 시대”라며 “당시엔 자유분방한 환경 속에서 그 어떤 규제도 규율도 없이 하나의 큰 카니발 같은 분위기가 이어졌다. 새로운 도덕 규율의 등장 등 큰 변화를 관객들이 함께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1920년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잡은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촬영 역시 100년 전 방식을 선택했다. <바빌론> 촬영은 모두 필름 카메라로 진행됐는데. 사실 데이미언 셔젤 감독과 필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도 하다. 영화 <라라랜드>에서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석양을 배경으로 엠마 스톤과 라이언 고슬링이 춤을 추는 명장면 역시 영화용 필름인 ‘Kodak의 Vision 3 500T’로 탄생시켰기 때문. 또한 <바빌론>에는 CG를 비롯한 디지털 효과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고. (딱 하나, 영화에 등장하는 코끼리는 합성이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바빌론>을 올드스쿨 방식으로 촬영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인터뷰에서 “관객들이 실제 촬영 장면을 관람하는 느낌이 들게끔 촬영 현장에서 봤던 그대로를 화면에 구현하려고 했다”며 “전사로 분장한 엑스트라들이 돌아다니는 모습, 폭발이 터지는 모습, 말이 뛰어다니는 모습 등 카오스를 생생하게 전하기 위해서다”라고 밝혔다. 이어 이러한 촬영 방식이 가지는 장점에 대해 “감정을 상상하는 게 아니라 피부에 와닿게 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앞서 언급했듯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첫 장편 데뷔작인 <위플래쉬>나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은 <라라랜드>를 작업하기 훨씬 전부터 <바빌론> 구상을 시작했다. 그가 <바빌론>을 처음 구상한 건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2008년. “많은 배우가 참여해 만들어내는 앙상블과 장대한 대서사시를 그린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그가 <바빌론>이 탄생하기까지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를 상세히 밝혔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바빌론>이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는 전환기를 담은 작품이라는 점을 짚으며 “큰 세트장과 캘리포니아라는 광대한 도시, 넓은 지평선을 품은 자연환경, LA라는 작은 시골 도시가 마침내 상업 도시로 변하는 전체적인 과정을 그려내야 했기에 정말 많은 리소스와 도구가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2008년 당시 나에겐 이런 것들이 충분하지 않았다”며 “그렇기에 머리 한편에 아이디어를 저장해두고 조사를 하는 동안 다른 영화를 만들고, 또다시 이 영화로 돌아와 구상하다가 다른 영화를 만들기를 반복했다”고 말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영화라는 매체를 보다 깊이 공부하고, 입지를 다진 그는 첫 구상 이후 15년이란 시간이 지난 뒤 비로소 <바빌론>을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이다.
‘꿈’은 제가 계속 이끌리게 되는, 돌아오게 되는 주제
데이미언 셔젤
<위플래쉬>에서 최고의 드럼 연주를 위해 아득한 길을 달려가던 앤드류와 <라라랜드>에서 할리우드에 입성하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보여주던 미아, 그리고 꿈 하나만을 위해 할리우드에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는 <바빌론>까지. 데이미언 셔젤 감독에게 꿈은 어쩌면 갈망의 형태가 아닐까 싶은데. “꿈이 어떤 의미인가”란 질문에 셔젤 감독은 “아무래도 꿈이라는 주제는 제가 계속 돌아오게 되는, 이끌리게 되는 주제인 것 같다”라는 답을 내놨다.
이어 그는 “나는 꿈이 많은 사람이고, 꿈을 꾸는 사람”이라며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만드는 게 꿈이어서 그걸 실현하기 위해 삶을 많은 부분을 바쳤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가 꾸는 꿈이 현실이 되지 못할 때 혹은 어떤 미래를 상상하고 꿈꾸며 살아갈 때 그게 정신 상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오랜 시간 고민하면서 살아왔다”고 밝혔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바빌론>이 관객들에게 다층적으로 가닿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재밌고 신나는 마치 롤러코스터 같은 놀이기구를 타는 경험과 비슷했으면 좋겠다”라면서도 “이면에는 이 영화가 사회 변화를 담고 있는 만큼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바빌론>이 비단 할리우드나 영화 산업뿐 아니라 모든 산업에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라고 밝힌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불안한 과도기를 겪고 있는 오늘날, 비슷한 상황이 있었는지 과거를 돌아보며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큰 기술적 변화나 혁신이 있을 때 도시, 문화, 생태계가 전체적으로 흔들리며 그에 따른 희생과 피해가 발생한다”며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희망이 새로운 예술의 형태를 탄생하게 한다”고 밝혔다.
모든 게 휩쓸려 내려가는 게 아니다. 그 모든 것들을 견디면서 살아남는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면서 그런 걸 마음에 간직하고 오늘날을 살아가고 적응하고 성장하는 데에도 도움을 얻었으면 좋겠다
데이미언 셔젤
브래드 피트, 마고 로비와의 작업은 감독 입장에서 꿈 같은 일
데이미언 셔젤
당대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 잭 콘래드 역은 브래드 피트가, 배우를 갈망하는 ‘본 투 비 스타’ 넬리 라로이 역은 마고 로비가 맡았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두 배우와 함께 작업한 소회를 밝혔는데. 그는 “두 배우와 함께 작업할 수 있다는 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꿈 같은 일이었다. 두 배우 모두 본인이 맡은 인물과 캐릭터가 잘 맞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스타덤에 오른 화려한 배우이지만, 그 이면에는 나약하고 멜랑콜리하고 섬세한 모습을 가진 잭 콘래드를 브래드 피트가 완벽하게 소화했다고 밝힌 감독은 “그런 부분이 참 놀랍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고 극찬을 보냈다.
넬리 라로이를 연기한 마고 로비 같은 경우 “배우로서의 프로페셔널함과 직업윤리도 너무 뛰어나고, 체력도 굉장히 좋다”며 “놀랄 만한 행동을 서슴지 않게 하는 도전적인 배우라고 생각한다. 마고 로비가 촬영하는 장면을 보며 스태프들 모두 놀라는 모습을 금치 못하던 게 기억난다”고 회상해 눈길을 사로잡았다.
우리가 작업하는 영화는 음악을 중심에 둔다는 게 차별점
데이미언 셔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작품을 떠올리면 ‘음악’이란 단어가 따라오지 않을 수 없다. 하버드 대학 생활 중 룸메이트로 만나 인연을 쌓은 뒤, 거의 모든 영화를 함께 작업해 온 저스틴 허위츠 음악 감독과 <바빌론>에서 다시 한번 손을 잡았다. 그는 “(저스틴과는) 일종의 공생관계 같다”며 “서로의 취향도 너무 잘 알고 서로의 작업 방식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형제 같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웃어 보였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본인과 저스틴 허위츠 감독이 영화 음악을 작업할 때 다른 영화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다른 영화는 (보통) 음악을 가장 늦게 만들지만, 우리는 제일 먼저 만드는 게 음악이고 음악을 중심에 둔다는 게 차별점이 될 것 같다”며 “<바빌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장면 촬영을 먼저 하고 거기에 맞게 작곡한 음악도 있지만, 가장 먼저 저스틴이 음악을 만들면 그걸 두고 저와 라이너스 산드그렌 촬영감독 그리고 연출가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어떤 장면을 연출하는 게 좋을까 논의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고 밝혀 놀라움을 안겼다.
관객뿐 아니라 평단까지 사로잡은 명작 <위플래쉬>, <라라랜드>에 이어 <바빌론>으로 돌아온 데이미언 셔젤 감독. 인터뷰를 마치고 난 뒤 내 머릿속에는 “아무래도 꿈이라는 주제는 제가 계속 돌아오게 되는, 이끌리게 되는 주제인 것 같다”라는 그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꿈은 누구나 꾸지만, 그 꿈을 실현하는 사람은 극소수인 법. 그에게 꿈은 단지 몽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현실적인 찬사와 성공으로까지 이어지는 꿈이다. 꿈을 향해 우직하게 나아가면서도 세계와 사람과 호흡하는 일까지 거머쥔 스타 감독과 동시대를 산다는 건 얼마나 운 좋은 일인지. 1백 년 전 영화인들이 작업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촬영하기 위해 CG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바빌론>으로 할리우드 영화를 향한 그의 진심이 관객에게 얼마나 전달될 지 기대된다. 2023년 2월 1일 개봉.
허프포스트코리아/씨네플레이 황남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