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자산어보> 설경구, “데뷔한 지 28년 된 나도 처음인 게 있다”

설경구.

연기 인생 28년이라는 이 배우에게도 처음이란 게 있었다. 사극 출연과 흑백 영화가 그것이다. 이준익 감독의 <자산어보>는 그에게 이 낯선 도전을 한 번에 시도하게 만들었다. 언론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처음 봤다는 그는 기자에게도 대뜸 어땠냐고 물었다.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다 겪었을 베테랑 배우가 자신의 처음을 궁금해하는 보기 드문 순간이었다.

구겨진 설경구와 펴진 설경구를 나누는 기념비적인 작품은 2017년 개봉한 <불한당>이다. 출연 당시 포마드로 넘겨 빗은 머리와 스리피스 정장이 버겁다고 했지만, 그는 스타일리시한 중년 아이돌로 재탄생하며 팬들의 찬사를 얻었다. 이번에는 어땠냐고 묻는 그와 영화를 기다리는 관객들에게 전할 대답은 분명하다. 흑백의 명암이 주는 간결함에 설경구의 얼굴은 더 또렷했다. 선명하게 아름답고, 맑으며 기품 있다. 그를 만나 보고 들은 이야기 속에서 당신도 그 대답을 찾길 바란다.


<퍼팩트맨>(2019) 이후 오랜만에 개봉작을 들고 관객들을 찾았다.

<퍼팩트맨> 개봉 때 <자산어보>를 찍고 있었다. (웃음) 며칠 전에 극장에 들른 적이 있는데 5, 6회차인데도 관객들이 별로 없었다. 아직 조심스러운 면도 있지만 영화를 보러 극장에 와 주셨으면 좋겠다. <자산어보>는 바다 생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지금 우리가 힘들어하는 일들과도 닿아있는 이야기고 또 희망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생각한다. 영화가 주는 위로를 받아 가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언론 배급시사회에서 영화를 처음 접하는 편이다. 오늘도 그랬다고 들었다. 영화를 본 소감이 듣고 싶다.

내가 지금까지 했던 영화들과는 결이 많이 다르다. 자연을 잘 담았고, 거기에 사람이 잘 섞여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변요한 배우처럼 나도 눈물이 조금 났다.

사극은 처음이다. 수염 붙이고, 상투 틀고, 갓 쓴 모습이 처음에는 적응이 안 되었을 것 같다.

사극 의상과 분장, 특히 수염이 불편하다. 뭘 먹을 때 입도 잘 안 벌어지고. (일동 웃음) 그런데 한번 입으니까 그다음부터는 금세 익숙해졌다.

<자산어보> 설경구.

사극에서의 설경구 배우의 모습이 궁금했다. 오늘 보니 도포 입고 갓 쓴 모습이 너무 잘 어울린다.

쑥스럽다. 양수리 세트에서 테스트 촬영을 했는데 그때 주변에 계속 물었다. 어떠냐고. 내가 모니터 확인을 잘 안 하는데 이번에는 촬영한 것 다 봤다. 이준익 감독님이 “괜찮아. 잘 어울려.” 자꾸 그러시니까 나도 그런가 보다 하고 믿었다. 감독님 말씀이니 믿어야 하는 거고. (웃음)

앞으로도 사극에서 많이 볼 수 있을까.

사극이라 출연하고 안 하고 이런 것은 아니다. 이야기가 좋으면 이제는 좀 덜 겁내고 컬러로. (일동 웃음) 흑백은 이번에 했으니까.

흑백 영화도 처음이다.

사극도 처음인데 흑백 영화라고 했다. 감독님께 나한테 왜 이러시냐고 물었다. (웃음) 흑백 영화는 관객이 다른 데 눈을 둘 곳이 없어 배우에게 집중하게 된다. 감독님도 이거 거짓말하면 다 들킨다고 하시고. 그래서 더 연기에 집중하려 했다.

실존 인물이지만 설경구만의 정약전은 뭐가 다른가.

특별한 것은 없다. 정약전에 대해 기본적인 지식만 갖고 시작했다. 내가 그분에 대해 책으로 읽어봐야 어떻게 다 알겠나. 정약전도 그렇고 역도산도 그렇고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것은 조금 부담스럽다. 다른 작품에서는 실존 인물이면 이름을 바꾸기도 했는데 <자산어보>에서는 꼭 정약전, 그리고 정약용이어야만 했던 거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정약전을 연기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시나리오에 쓰인 대로만 최선을 다해 연기했다. 나머지는 감독님이 알아서 담아주겠지 하는 믿음이 있었다.

몇 년 전 영화제에서 이준익 감독을 만났을 때 무턱대고 시나리오 달라고 했더니 대뜸 <자산어보> 시나리오를 주더라 했다.

제목도 말씀 안 해주시고 그냥 사극 준비한다고만 하셨다. 내가 사극 한 번도 안 해봤으니 시나리오 달라고 했는데 그러고 온 게 바로 <자산어보>였다. 도대체 어보로 무슨 이야기를 하지, 영화가 왜 지루할 것 같지. 이런 선입견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는데 그냥 쓱 읽혀 내려가 졌다. 강요하지 않는데도 이야기에 마음이 스며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잠시 고민해 봐야지 하는 와중에 감독님이 전화해 다그치셔서 대뜸 알겠다고, 하겠다고 했다. (웃음)

이준익 감독과는 <소원>(2013) 이후 다시 만났다. 다시 만난 이준익 감독은 어땠나.

감독님은 똑같았다.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현장은 좀 무겁지 않나. <소원> 할 때 감독님께 농담으로 배우가 이렇게 힘들게 감정 안 놓치고 열심히 하려 하는데 왜 현장에서 도움을 안주시냐 했더니, “야! 너 하나로 족해. 여기 다 너같이 감정 누르고 있어 봐. 그거 고문이야. 그럼 난 제대로 찍지도 못하고. 이런 건 내가 원하는 현장이 아니야.” 하시더라. (웃음) <자산어보>의 류승룡 배우도 많은 회차를 온 게 아니지만 촬영장에서 이런 말을 하더라. 역시 이준익 감독님 현장은 행복하다고. 이게 바로 이준익 감독님의 매력이다. 소년 같고, 여전히 청년 같다. 과자 먹는 모습도 똑같고. “오케이. 좋아.” 그래서 좋아했는데 알고 보니 테스트 촬영이고. (웃음)

<자산어보> 촬영현장에서 이준익 감독과 변요한, 설경구 배우.

촬영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

전혀 없었다. 마음이 편했다. 두 달 동안 도초도, 비금도, 자은도 등에서 촬영했다. 배우들 숙소가 다 비금도에 모여 있었다. 다들 서울로 왔다 갔다 했다면 산만했을 것 같은데 두 달 동안 이렇게 모여있어서 우리끼리 더 끈끈했었던 것 같다.

이준익 감독이 설경구 배우 일생일대의 연기를 보게 될 것이라 했다. 어떤 점에서 그런 모습을 보았을까.

일생일대의 연기 그런 거창한 것은 아닌 것 같고. 현대극을 주로 하다가 사극 연기를 하니까 보이는 낯섦. 그런 모습에 대한 기대를 말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정약전은 서학의 사상을 받아들여 자명하고 명징한 사물에 대해 공부하기로 하고, 창대(변요한)는 부조리에 맞서기 위해 성리학 기반의 기존 질서에 편입하려 한다. 서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며 사제의 관계가 무너지는 듯하지만, 정약전은 창대에 대해 미움이 아닌 안타까움이 더 많이 비쳤다.

정약전은 창대가 세상에 나가면 상처받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보호하고 막고 싶었다. 창대는 출세와 부가 목적이 아니라 다만 옳은 정치를 하고 싶었던 순수한 사람이다. 정약전은 창대의 그런 마음을 알기에 다른 길도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을 거다.

<자산어보> 변요한, 설경구 배우.

변요한 배우와의 호흡은 어땠나.

재미있게 연기했다. 티격태격하는 것도 서로 연기라고 생각지 않고 찍었던 것 같다. 연습도 필요 없을 만큼 호흡이 좋았다

가거댁 이정은 배우와의 이야기 비중도 상당하다. 가거댁은 조력자 역할 뿐 아니라 극의 강약을 조절하는 윤활유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학교 때부터 각별했던 사이라던데. 이정은 배우와의 호흡도 궁금하다.

대학교 2년 선후배라 같이 다녔다. 학교 다닐 때 공연도 같이했고, 김민기 선생님의 ‘학전’에서 연극 <지하철 1호선>과 내 데뷔작인 <심바새매>도 같이 했다. 영화는 이번이 처음이다. 반갑고 또 (이)정은이 잘되어 만나 더 좋았다. 정은은 학교 때부터 워낙 잘했던 배우인데 오히려 좀 늦게 주목받은 것 같다. 대신 더 오래 하면 되지 않겠나.

<자산어보> 설경구, 이정은 배우.

그 외에도 류승룡, 조우진, 최원영, 정진영, 김의성, 방은진 배우 등 개성 있는 배우들의 열연이 돋보였다. 이분들을 모은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자산어보>가 사극 예산치고는 적은 예산이라 감독님은 배우들에 대한 욕심을 아예 접으셨었다. 그런데 내가 좀 반기를 들었다. 낯선 이야기일수록 익숙한 배우가 나와야 한다고. 관객들이 배우에 대한 정보를 알려고 하기 전에 바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이다. 감독님은 고작 하루 치 촬영 때문에 목포까지 와서 또 배 타고 섬에 들어오라는 부탁을 미안해서 못하시겠다 하시더라. 그래도 내가 감독님께 문자로 누구 어떠냐 하면 감독님이 죽을 맛으로 연락하시고 그랬다. 나는 추천만 하고 감독님이 섭외를 한 거다. 마지막에 정약용이 쉽지 않아 고민했는데 그때 마침 <극한직업>이 대박이 난 거다. 대뜸 감독님께 전화를 드렸다. 지금 누가 제일 기분 좋을 것 같냐고. 그게 누구냐 물으셔서 <극한직업>에서 찾아보라 했다. 류승룡 배우에게 요청했더니 바로 (류)승룡이 전화가 왔다더라. 시나리오도 안 봤는데 그냥 하겠다고. (웃음) 진선규 배우도 참여하기로 했었는데 <승리호> 타이거 박 레게 머리 때문에 못 했다. (웃음)

연출자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다.

그건 학교 들어갈 때 했던 말이다. 감독이라는 직업에 대한 막연한 환상 같은 거였다. 멋있어 보이기도 했고. 그런데 막상 그 일에 대해 알고 나니까 못하겠더라. 학교 다닐 때 연극 연출을 한번 해보고 나니 이걸 계속하면 나도 힘들고 또 다른 사람들까지도 힘들게 할 것 같았다. 지금 연기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지경이다.

<불한당>은 연기 인생의 변곡점 같은 작품이었다.

맞다. 예전에는 연기를 힘으로 했다. 그냥 막 밀어붙여서 해냈는데 <불한당>을 만나면서 확실히 변곡점을 맞은 것 같다. 힘으로 하지 않고 다른 면으로도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겠다는 믿음을 준 작품이었다. 내 딴엔 몰입한답시고 힘주고 있으면 주변도 불편하게 되고 나도 스트레스받고 그래서 늘 촬영 며칠 전부터 끙끙 앓곤 했다. 지금은 오히려 일부러 그 감정과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한다.

도전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을까.

어떤 특정한 역할을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좋은 작품, 재미있는 작품을 만나면 계산 없이 그냥 하고 싶어진다.

개봉을 기다리는 영화도 많고, 촬영 중인 영화도 있다.

나현 감독의 첩보 액션 <야차>(가제), 정지영 감독의 <소년들> 촬영을 마쳤다. 변성현 감독의 <킹메이커>도 있고. 또, 이해영 감독의 첩보 스릴러 <유령>을 촬영 중이다. 일이 있는 것에 늘 감사하고 있다. 다만 개봉이 많이 막혀있어 아쉬움이 크다.


글 · 씨네플레이 심규한 기자

사진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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