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국민 여동생’으로 불리던 배우 문근영이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문근영은 제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에서 영화 <심연>, <현재진행형>, <꿈에 와줘>로 관객과 만났다. 각 10~15분 정도 짧은 러닝타임이지만 강렬한 이야기를 담았다. 대사가 없는 대신 배우의 역동적인 표정과 치밀한 몸짓 그리고 문근영이 평소 좋아한 아티스트 ‘요크(Yolk)’ 음악이 만나 더욱 밀도 높은 장면을 연출했다. 문근영이 이끄는 바치 창작집단이 만든 프로젝트 영화는 유튜브에 공개돼 누구나 즐길 수 있다. 지난 10일 부천에서 그를 직접 만나 들은 얘기를 정리했다.
배우는 누가 불러주지 않으면 혼자 힘으로 연기를 하기 쉽지 않다. 정형화된 캐릭터만 연기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배우가 진짜 원하는 이야기를 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지난 10일 감독으로 데뷔한 문근영
문근영은 감독으로 데뷔한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의외로 간단했다. 그는 덧붙이기를, “그래서 결심했다. 내가 직접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로. 즐겁게 연기하고 싶다”며 “바치 창작 집단은 저와 정평, 안승균, 홍사빈 배우로 이루어졌다. 목표는 그냥 우리가 하고 싶은 연기 마음껏 하고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심연>에서 문근영은 주연 및 감독을 맡아 수중 연기를 펼쳤다. 그는 치열하게 고민하고 바치 창작 집단의 첫 번째 작품인 <심연>의 각본을 쓰고 콘티를 그리며 “이건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다. 내가 가장 잘 보여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직접 연출까지 하기로 결심했다. <심연>은 배우이자 인간 문근영의 내밀한 고민을 담은 영화이기도 하다.
“누구나 인생에서 한계에 부딪히곤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심연>에서 나는 끝도 없는 어둠 속에 헤메인다. 그러다가 한줄기 빛이 마치 신 또는 희망처럼 나를 인도하지만 그마저도 실패한다. 빛을 쫓아도 길을 잃어버리고 만다. 마치 한 스테이지(stage)를 깨면 또 더 어려운 스테이지가 나오는 인생과 같다. 그런 심연 속에서 결국 내가 깨달은 건 그럼에도 나는 살아있다는 것이다. 결국 내가 주체적으로 중심을 잡아야 한다. 인생은 끝없는 고민의 반복이지만 그것조차 사랑하려고 한다. <심연> 마지막 장면에서 물거품은 실패를 의미하지 않고 내가 주체가 되어 나의 삶을 다시 인식하고 돌아보겠다는 의미다. 내게 연기는 인생이다. 그로 인해 심연에 빠지기도 했지만. 한때 연기가 인생의 1순위였다. 그래서 연기를 하기 위해서 나를 돌보지 않았다.”
그런 문근영에게 중대한 변화가 찾아왔다. 여러 가지 이유로 연기를 쉬면서 인생을 돌아볼 기회가 생긴 것이다. “예전에는 몸이 아파도 참고 연기를 하는 날이 많았다. 일이 우선이었고, 몸과 마음은 뒷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 몸과 마음을 챙길 줄 안다. 이제는 아프면 아프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어쩌면 나이가 들면서 경험이 쌓여 자연스럽게 생긴 변화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나를 돌보는 게 얼마나 중요한 지 알기 때문이다.”
‘연기란 뭐지?’, ‘나는 뭐지?’ 질문이 끊이지 않던 시기
“배우 10년차일 때 1년 동안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 <매리는 외박 중>, 그리고 연극 <클로저>에 연이어 출연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번아웃, 회의감을 느꼈다. 작품을 많이 하기도 했지만 어쩌면 연기 10년 차에 겪는 그런 종류의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1년 동안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쳤다. ‘연기란 뭐지’, ‘나는 뭐지’라는 질문이 끝없이 이어졌다.”
문근영은 ‘행복한 연기란 무엇일까?’란 질문에 ‘자유로운 연기’라고 답했다. 또 연기를 할 때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아역 시절 <가을 동화>, <장화 홍련>때를 언급했다. “그때는 그냥 촬영 전에 놀다가 자유롭게 연기했다. 감독님도 어린 내게 ‘더 해봐’라며 자유로운 연기를 할 수 있도록 격려했다. 그런데 점점 경력이 늘수록 생각이 많아졌다. 나도 모르게 규격화된 연기를 하고 있었다. 누가 시킨 건 아니지만 스스로를 옥죄고 구속했다.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한 노력인데 오히려 더 힘들었다.”
“지금은 연기보다 문근영이라는 나라는 사람을 더 사랑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연기도 더 잘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삶이 풍부해야 연기도 발전할 수 있다. 스스로가 만들어버린 구속을 이제는 ‘셀프 잠금해제’했다.” 문근영은 “이제는 연기를 조금 덜 좋아하려고 한다”며 웃었다. 하지만 이 말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연기를 너무나 사랑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치 창작 집단의 두 번째 작품 <현재진행형>은 정평 배우의 이야기를 그렸다. 무대 위에서 배우라는 직업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나기 힘든 어떠한 ‘운명’ 같은 인생을 표현했다. 문근영은 정평과 계속 토론하며 각본을 쓰고 연출까지 맡았다. 스포트라이트로 배우를 비추다 가도 도망가 버리는 화려한 조명의 움직임을 통해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은 인생, ‘내가 잘 하고 있나?’라는 고민, 경제적 압박, ‘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연기를 해’ 등 주위 압박을 흥미롭게 표현했다. 문근영 감독의 연출은 대사 없이도 표정과 음악과 조명만으로 마음을 들었다 놓는다. 자신의 일에서 벗어나 도망가려 하지만 또다시 미련에 붙잡히고 지치고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계속 인생을 살아가는 배우 정평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이런 상황은 단지 ‘배우’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누구나 살면서 비슷한 경험과 갈등을 겪으며 현재를 살아간다. 문근영과 정평은 이번 작의 제목을 다각도로 고민했다. 문근영은 “제목을 고민하며 ‘숙명’, ‘굴레’, 마치 살이 낀 듯 벗어날 수 없다는 뜻에서 ‘살’ 등 다양한 후보가 나왔다. 결국 인생은 계속된다는 의미에서 지금의 제목이 채택됐다”라고 전했다. “많은 사람이 우리의 작품 보며 자유롭게 해석해 주길 바란다. 배우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사실 모든 이들이 하는 고민이기도 하다. 인생의 고민은 계속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또 당신만 그런 고민하는 게 아니라고 꼭 말해 주고 싶었다.”
“감독일 외롭고 무서웠기에 더 책임감을 느꼈다”
문근영은 “처음 감독을 맡으며 촬영 현장에서 배우들을 보며 “나도 저기서 연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솔직히 밝혔다. “감독의 일은 오로지 나의 판단으로 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외롭고 무서웠다. 동시에 자유롭다는 장점도 있었다. 감독으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내가 온전히 서기로 다짐했다.”
자유롭게 연기하고 싶어요
문근영
문근영은 인터뷰 내내 ‘자유’라는 단어를 언급했고 이는 그가 연출한 세 편의 작품에도 드러난다. 세 번째 작품 <꿈에 와줘>는 안승균 배우의 이야기를 그린다. 상실과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을 조명하며 꿈속에서라도 그 사람을 만나길 소망한다. ‘꿈’은 자유로운 상상이 가능하고 뭐든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이다. 이번 작에서 안승균은 이다겸과 함께 사랑하는 연인 간의 안타까우면서도 애틋한 마음을 몸짓과 춤으로 표현했다.
문근영은 이날 세 편의 영화를 큰 상영관에서 처음 상영하고 전혀 예상하지 못 한 작품의 공통점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한 관객이 GV 중 “모든 작품에 맨발이 나온다”라고 말한 것이 계기였다. 문근영은 “깜짝 놀랐다”라며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듣고 보니 무의식을 들킨 기분이다. 맨발은 자유로움의 상징으로 표현된 것 같다. 자유롭게 연기가 하고 싶어서 만든 작품들이었기에 그런 상징이 자연스럽게 들어간 것 같다”라고 말했다.
문근영은 “이제까지 연기를 잘하고 싶어서 그저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었다”라고 말하며 “계속 좋은 연기를 하고 싶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나를 아끼게 된 지금은 어떤 역이라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
하나의 심연을 넘어 단단한 내공을 지닌 ‘자유로운’ 배우로 거듭난 문근영은 앞으로도 바치 창작집단의 멤버를 늘리며 새로운 프로젝트를 해 나갈 계획이다. 그는 평소에도 경험이나 느낌을 글로 써서 그 순간을 간직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는 “최근 1층에 양장점이 있는 집에 놀러 간 소녀가 나오는 꿈이 인상적이라 기록해 뒀다”라며 “또 공포 영화 시나리오를 최근 쓰기도 했다. 사실 병맛 이야기도 잘 쓰는데 언젠가 보여줄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앞으로 또 감독으로 연출을 할 수도 있겠지만 우선은 연기가 하고 싶다. 계속해서 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노력하겠다.”
씨네플레이 안정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