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납치되어 인질이 되는 단순한 이야기다’는 황정민의 말처럼 영화 <인질>은 사실적인 상황과 캐릭터의 힘을 앞세우며 군더더기 하나 없는 간결한 사건 전개로 관객들의 눈길을 끈다. 특히 배우 황정민이 황정민을 연기하는 까닭에 인물에 대한 배경도 개연성을 위한 전사도 필요 없이 관객들은 곧바로 주인공의 상황에 감정을 이입한다.
올해도, 황정민은 돌아왔다. 2020년 2월 본격적인 코로나 국면으로 접어든 이후 가장 많은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인 영화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였다. 바로 황정민의 영화다. 배우 황정민의 흥행성과 연기에 대해 한마디 거드는 것만큼 쓸모없는 일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관객의 믿음이 확고한 이 배우가 올해 여름 극장가의 구원투수로 다시 나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에서 희망을 보았으면 좋겠다는 그의 대답은 글로는 풀어낼 수 없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부디 그 얼굴은 극장에서 직접 확인하시길 바라며 지난 8월 5일 <인질> 개봉 전 만난 황정민의 이야기를 전한다.
작년 코로나 상황 속에서도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2020)를 통해 한국 영화 흥행을 견인했다. 올해도 <인질>을 들고나와 어려운 상황 속 극장가의 활기를 불어넣을 예정인데 개봉을 앞둔 기분이 어떤가.
행복하고 감사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시국에 개봉하는 것에 대한 걱정도 있다. 영화가 정말 재미있다. 보시는 분들도 다들 좋아하실 텐데 막상 지금 분위기에 극장으로 어서 오시라고 말하기도 부담스럽지 않나. 하지만 모든 일은 다 뜻이 있는 것 아니겠나. 지금 이 시기에 개봉할 인연인 거다. 마음 단단하게 먹고 열심히 홍보하고 있다.
<인질>은 어떤 영화인가.
단순한 이야기다. 배우 황정민이 시사회 마치고 회식하고 집에 가는 길에 납치를 당한다. 마치 지금처럼 내가 인터뷰하다가 집에 가는 길에 납치를 당해 인질이 된다고 해야 하나, 배우 황정민이. 되게 재미있는 발상 아닌가.
<댄싱퀸>(2012)도 황정민 본명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이름만 차용했다면 지금은 실제 자신의 모습 전부를 가져온 것인데 부담은 없었나.
황정민이 황정민으로 나오는 거니까 보시는 분들은 참 연기하기 쉽겠다, 편안하게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막상 연기하기 너무 어려웠다. 이렇게 한 발짝 물러나서 내가 나를 봐야 하는 거니까. 차라리 다른 인물이라면 그 인물 안에 수많은 감정이나 상황들을 내가 직접 만들어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볼 텐데 나는 나 아닌가.
반면 관객은 황정민 캐릭터에 대한 별도의 설명 없이 바로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맞다. 그런 부분도 있다. 그래서 관객분들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나를 응원하게 되고 함께 롤러코스터에 동석한 것 같은 에너지를 맛보실 수 있을 것이다.
몸이 의자에 결박당한 포스터가 눈에 띈다. 움직임이 제한된 속에서 긴장감과 공포 등 다양한 감정을 표현해야 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것 때문에 어려운 점이 분명 있었다. 예를 들어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하고 빌면서 말을 하면 상대방에게 더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것이니까 상황을 좀 더 좋게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묶여 있으니 얼굴이나 눈에서 나오는 에너지밖에 없는 거다. 얼굴에는 진짜 정확하고 정직한 감정이 드러나지 않나. 그러다 보니 이게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다 보인다.
촬영하며 육체적으로도 힘든 점이 많았겠다.
묶여 있을 때 진짜 세게 묶어 달라고 했다. 어설프게 묶였는데 살려달라고 호소하는 얼굴을 찍으면 정직하게 나오지 않는다. 실제처럼 꽉 묶여서 팔이 저리고 피가 안 통해야 리얼한 표정이 나오는 거다. 이런 게 조금 힘들었다. 그런데 나를 묶은 후배 배우들도 힘들었을 거다. 후배 배우들이 나를 묶으면서 괜찮으시냐고 물으면 ‘그냥 더 세게 묶어라, 괜찮다’고 했지만 그게 얼마나 힘들었겠나. 선배를 막 묶는데.
예고편에 숲속을 달려 탈주하는 장면이 있는데 결박된 신을 벗어나 몸을 쓰는 장면이라 신났을 것 같다.
미친 듯이 달리는 거 봤나? 내가 그렇게 달리기가 빠른지 몰랐다. 카메라가 날 못 쫓아왔다. 너무 빨라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도망가는 거니까 못 쫓아오지 않았겠나. (일동 웃음)
<히말라야>(2015) 이후 다시는 산에 안 간다 했는데 이번에 아주 잘 내려가셨다.
내려가는 거니까. (웃음) 그래도 산 싫다. 모기도 너무 많다. (일동 웃음)
<인질>을 촬영하면서 기억에 남은 에피소드나 장면이 있다면.
인질범을 연기한 김재범, 류경수, 정재원, 이규원, 이호정. 이 친구들과 연습하던 게 제일 많이 기억에 남는다. 촬영 들어가기 한 달 전부터 모여서 연극하듯 연습을 했었다. 서로 감정과 호흡을 미리 맞춰 봤던 게 촬영하면서도 좋은 에너지로 온 것 같다. 그리고, 맨발로 격투하는 신이 생각난다. 발을 다칠까봐 분장팀에서 바닥에 뭔가를 대 줬는데 물이 흥건한 바닥이라 다 떨어져 나갔다. 찍다 보면 발도 카메라에 담길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래서 아예 맨발로 연기했다. 그게 더 리얼하니까. 찢어지면 찢어지는 대로 하자 했다.
납치범으로 등장하는 배우들은 관객들에겐 낯설 수 있지만 연극과 뮤지컬, 드라마 등에서 많은 활약을 펼치고 있는 배우들이다. <지하철 1호선> 뮤지컬로 데뷔해 노래와 연기 모두 재능을 가진 김재범 배우부터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로 주목받은 류경수 배우, 모델 출신 이호정 배우, 연극 무대에서 인정받는 정재원, 이규원까지. 이들과의 연기 호흡은 어땠나.
처음엔 이 친구들이 나를 어려워했다. 선배고 또 얼굴도 이렇게 생겨서 무서웠겠지. (일동 웃음) 나는 인질이고 이들은 인질범이니 나를 막 대해야 하는 거잖나. 내 뺨을 때리던가 뒤통수를 치던가 이런 장면도 쉽게 해낼 수 있으려면 이 친구들하고 나와의 거리를 좁혀야 하는 게 제일 중요했다. 자주 술 한 잔씩 하며 이야기를 많이 했다. 지금 촬영을 했으면 회식도 못 했을 것 아닌가. (일동 웃음) (<인질>은 2019년 코로나 사태 이전에 촬영됐다 – 편집자)
함께 인질이 된 이유미 배우는 최근 <박화영>(2018) <어른들은 몰라요>(2020) 등으로 주목받는 배우다. 특히 위기의 상황에서 함께 납치된 황정민에게 크게 의지가 되었을 것 같은데 촬영장에서는 어땠나.
어쩔 수 없이 함께 묶여 있고 나도 겁나지만 함께이니까 덜 겁내자고 서로 격려할 수 있는 거지. 그게 인간애니까. 이런 관계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다.
영화에서 정말 황정민다운 장면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장면이 무엇이 있을까.
처음과 마지막 장면 아닐까. 처음 인질이 되기 직전의 상황들에서 하는 대사나 행동 전부 나랑 똑같다. 술 먹다가 슬쩍 자리를 비우면서 나 더 이상 못 먹겠으니 사람들에게 얘기 좀 잘해달라고 하는. (일동 웃음) 그리고 마지막에 엄청난 풍파를 겪고 난 다음 보이는 얼굴이 내게 되게 중요했다. 관객분들께 희망을 보여주고 싶었다. 납치를 당하고 안 당하고를 떠나 사람들에겐 누구나 어려운 일이나 시기가 있지 않나. 그걸 극복했을 때 보이는 얼굴, 그게 희망적인 얼굴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로드무비>(2002)로 신인상, <달콤한 인생>(2005)으로 조연상, <너는 내 운명>(2005)으로 주연상을 휩쓸었고, <국제시장>(2014) <베테랑>(2015)으로 연타석 천만을 달성했다. 황정민의 배우 인생에 가장 중요한 지점에서 만났던 작품은 무엇이고 그 이유가 궁금하다.
특별히 꼽는 작품은 없다. 영화마다 다 사연들이 있으니까. 예를 들어 <국제시장> 같은 영화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꼭 하고 싶어서 선택했다. 덕수라는 인물은 나의 아버지, 너의 아버지를 넘어서 우리 모두의 아버지가 될 수 있으니까. 그래도 꼭 집어라 한다면, 오래전에 매미라는 태풍이 와서 동해안이 쑥대밭이 된 적 있다.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와 서로 도와주고 하시더라.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시는 분들도 야채 트럭 몰고 와서 자원봉사 하시는 걸 TV로 보고 있는데 너무 창피해지더라. 저분들이 정말 우리나라를 이끌어가는 영웅이고 슈퍼맨이란 생각을 했다. 그분들께 뭐라도 선물을 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마침 한 PD분이 그런 비슷한 이야기가 있는데 한번 대본을 보시겠냐고 했다. 그때 받은 대본이 바로 <슈퍼맨이었던 사나이>(2008)였다. 여러 가지 이유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30대에 <너는 내 운명>(2005) <행복>(2007), 40대에 <남자가 사랑할 때>(2014)를 만났다. 멜로 연기가 어렵다고 했지만 멜로의 장인이라고 불리기도 했었는데, 연기에 대한 연륜이 쌓인 지금 다시 멜로에 도전하고 싶은 생각은 없나.
있다. 멜로 영화 너무 좋아한다. 사랑 이야기하는 거 너무 좋아한다. (일동 웃음) 인간은 누구나 사랑하고 싶어 하고 사랑받길 원하지 않나. 사랑하는 거 싫어하는 사람 아무도 없다. 그런 감정은 관객분들도 다 아신다. 그래서 또 연기하기가 어렵기도 하다. 그만큼 디테일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 디테일을 잘 잡아냈을 때 오는 절절함이 있다. 30대가 됐든. 40대가 됐든. 50대, 60대, 70대 모두 사랑할 수 있지 않나. 그 나이에 맞는 감정들이 분명히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근데 내가 제작자가 아니니까 (웃음) 늘 기다리고 있다. 이 인터뷰를 읽는 제작자 감독분들 멜로 대본 많이 보내주시기 바란다. 맨날 남자들만 나와서 ‘드루와 드루와’ 이런 거 말고 그거 있지 않나. (일동 웃음)
악기를 잘 다룬다. 취미로 연주하는 클라리넷도 <군함도>(2017)에서 선보였다. 최근엔 첼로를 배우고 있다고 말했는데 악기를 취미로 가진 이유가 있을까.
그냥 좋아서 하는 거다. 그래서 취미 아닌가. (웃음)
차기작은 무엇인가.
먼저 <교섭>이 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 이후 20년 만에 임순례 감독님과 함께했다. 임순례 감독님은 내가 영화를 할 수 있게끔 길을 열어주신 분이다. 내가 나중에 잘 돼서 감독님과 같이 또 한번 해야지 한 게 20년 걸린 거다. 그래서 정말 잘하고 싶었고 또 열심히 했다. 외교관을 연기하는데 영어 대사가 많다. 영어를 싫어하는데 정말 열심히 대사 연습을 했다. 요르단에서 현빈 배우와 같이 찍었고 탈레반에 잡혀있는 우리 선교사를 구해내는 이야기다. 그리고, 넷플릭스 6부작 시리즈 <수리남>이 있다. 드라마지만 영화처럼 찍고 있다.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걸출한 배우들. 하정우, 박해수, 유연석, 조우진 등과 함께 행복하게 잘 찍고 있다.
글 · 씨네플레이 심규한 기자
사진 · NEW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