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중요한 면접날, 파업으로 교통이 마비된다면? <풀타임> 에리크 그라벨 감독을 만나다

프랑스 영화 <풀타임>은 파리 근교에 살면서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파리의 고급 호텔로 출근해야 하는 싱글맘 쥘리(로르 칼라미)의 일상을 따라간다.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좋은 직장에 면접이 잡히지만, 파리 전역에 대규모 파업이 일어나 교통편이 마비되면서 쥘리의 계획은 점점 꼬여만 간다. 작년 베니스 영화제 오리종티 부문에 초청돼 에리크 그라벨이 감독상을 로르 칼라미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풀타임>은 전주국제영화제와 무주산골영화제에서 상영돼 좋은 반응을 얻었다. 개봉은 오는 8월 18일이다. 씨네플레이가 지난 5월 전주국제영화제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에리크 그라벨 감독을 직접 만났다.


에리크 그라벨 감독

<풀타임>의 시작점은 무엇인가?

처음 구상한 건 5년 전, 그러니까 노란조끼 시위 훨씬 이전이다. 캐나다 퀘벡 출신이지만 지금은 프랑스 국적을 갖고 있다. 여기서 가정을 꾸리고 가족이 점점 늘다 보니 파리의 작은 아파트에 사는 게 좀 불편해 널찍한 주택에서 살고자 파리 근교로 이사했다. 그런 사람이 별로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나처럼 넓은 환경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더라. 아침 일찍 파리로 출근하고 저녁 늦게 돌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중요한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매체에서 거의 다루지 않아서 내가 직접 영화로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노란조끼 시위가 프랑스 전역에 있었고, 이후 퇴직연금 제도 개편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풀타임>

구상 단계에서도 파업 때문에 교통편이 끊긴다는 설정이 있었나? 한국에서는 파업을 하더라도 이렇게 교통편이 모조리 끊겨서 발이 묶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영화 초반부터 쥘리의 고생스런 여정을 따라가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

영화 작업 할 때 중심 아이디어를 5~7개로 정해놓은 다음에 구조를 짜놓고 그 안에 살을 채워 넣어가는 식으로 하는데, 파업 역시 그 중 하나였다. 1995년 프랑스에서 처음 대규모 시위를 목도했다. 당시에 학생이라 그저 지켜보는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시위를 불편해 하는 게 아니라 모두가 연대해서 이 시위가 왜 필요한지 충분히 이해하는 연대의식이 인상 깊게 남아 있다. 몇 년 전 퇴직연금 제도 개편 반대 시위도 사람들의 이해와 공감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선 분명 파업 때문에 쥘리의 고생이 더 심해지긴 하지만, 파업이 사람을 힘들게 한다는 의도를 담은 건 절대 아니다. 쥘리가 이렇게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우리에게 이해시켜줄 수 있는 게 파업이었다. 그리고 사회 모두가 혼란을 겪고 있고, 사람들에게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쥘리는 현실적인 문제로 시위에 참여하지 못할 뿐이다.

출근하기까지 과정이 너무 빡빡하다보니, 직장인 파리 호텔에서 일할 때는 차라리 편안해 보이기까지 한다.

감독으로서 내 의도는 관객들이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 마치 들어간 것처럼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쥘리가 호텔에서 일할 땐 모든 게 각잡혀서 진행되기 때문에 그 전에 느꼈던 긴장감이 줄어들 거다. 그런 측면에서 편안해 보인다고 느낀 것 같다. 쥘리가 집에서 했던 가사노동이 호텔에서 장소만 바뀌었을 뿐 사실 똑같은 일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집과 호텔을 대비해서 배치했다. 침구 정리하고, 화장실 청소하고… 이런 일들이 집에서든 일터에서든 쥘리에게 계속 반복된다. 이게 영화 중반까지는 쥘리가 감당할 수도 예측할 수도 있는 일이라, 쥘리가 꼭 체스 게임을 하는 선수 같았다. 그런데 사소한 문제들이 서서히 쌓여서 한꺼번에 터지면서 본인이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이제 더 이상 불가능한 상황이 됐을 때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풀타임>

전작인 장편 데뷔작 <크라시 테스트 아글라에>(2017)에 이어 <풀타임> 역시 여성 캐릭터가 중심에 선 영화다.

아직 <풀타임>이 두 번째 영화라 이런 경향을 가졌고, 앞으로 계속 그럴 거라고 말하긴 어렵다. 관객의 입장에서 여성의 서사, 여성 배우의 연기가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들게 되니까 자연히 여성 서사에 집중하게 됐다. 아무래도 남성보다 여성이 미스터리한 면이 많기 때문에, 여성이 주인공인 시나리오를 쓸 때 마음이 편안한 것 같다.

아까 답변을 들어보니 기혼인 것 같다. 영화를 본 가족들의 반응은 어떤가?

프랑스엔 팍스(PACS) 라는 제도가 있다. 결혼은 하지 않지만 결혼과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다. 당연히 파트너도 영화를 봤는데 나쁜 점이 있더라도 나한테 얘기는 안 했을 것 같다. (웃음) 올해 21살 14살인 두 딸이 있는데,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어서 그런지 영화를 훨씬 더 감동적으로 봤다고 하더라. 프랑스에선 종종 아내가 쥘리랑 성격이 비슷하느냐고 물어봐서 그렇진 않다고 대답했다. (웃음)

여성만큼이나 탈것에 대한 비중이 크다. <크라시 테스트 아글라에>는 자동차 충돌 테스트 기술자인 주인공이 자동차, 자전거, 바이크를 타면서 어딘가로 향하는 로드무비이고, <풀타임> 역시 교통수단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어드벤처 같은 로드무비인 <크라시 테스트 아글레아>를 찍고 나니, 이제는 내 주위의 이야기를 해봐야지 싶어서 주변을 봤더니 파리행 기차와 자동차가 등장했다. 우연치 않게 다음 영화에서도 주인공이 이동 수단을 계속 타고 다니는데, 그걸 완성하면 왜 탈것에 집착을 하나 알 수 있지 않을까. 거리에서 촬영하면 커다란 촬영 트럭에 세팅 해야 하는데 그게 너무 인위적이라 느껴져서 차라리 실제 기차 안에 찍는 걸 더 선호한다. 다음 영화에서도 내가 직접 들어가서 찍는 장면이 많아졌으면 한다.

<크라시 테스트 아글라에>

<크라시 테스트 아글라에>와 <풀타임>의 두 주연 배우 인디아 헤어와 로르 칼라미 모두 프랑스 감독 알랭 기로디의 <스테잉 버티컬>(2016)에 출연했다.

두 배우가 내 영화에도 나온 건 우연이다. 알랭 기로디의 다른 영화들은 다 봤는데 하필 <스테잉 버티컬>만 아직 못 봤다. 인디아 헤어는 기로디 영화에 출연하기 이전에 먼저 찍기로 결정됐고, 촬영은 <크라시 테스트 아글라에>와 <스테잉 버티컬>을 동시에 한 걸로 알고 있다. <크라시 테스트 아글라에>를 만들 때도 로르 칼라미를 출연시키자는 의견이 있었다. 다만 로르에게 꼭 맞는 배역이 없어서 그때는 함께하지 못했다. <풀타임> 시나리오를 쓸 때 특정배우를 떠올린 건 아니라 꾸준히 봐온 로르 칼라미가 괜찮겠다 싶어 제작팀에 얘기를 했고, 로르 칼라미가 제안을 받아들였다.

로르 칼라미의 어떤 면모가 쥘리에게 어울린다고 판단했나?

쥘리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일하는 엄마의 모습인 한편, 업무에 치이고 직장에서는 남에게 까다로운 모습을 보여준더. 비슷한 나이대의 로르 칼라미가 그걸 아우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배우를 섭외할 때 대사 이외에 다른 걸 갖고 인물이 처한 상황과 감정을 보여주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로르 칼라미는 거기에 100% 부합했다 .

<풀타임>

로르 칼라미만의 장점은 무엇일까?

촬영장에서 항상 존재감이 있달까. 카메라가 돌아간다 싶으면 다른 배우를 찍고 있어도 계속 옆에서 지켜보며 몰입했다. 비유하자면 케익 하나를 자기가 꼭꼭 씹어가면서 완전히 소화를 시키듯 거기에 집중하고 그게 카메라에 다 보인다. 로르에게 이 대사를 할 때 어떤 신이 머리에 그려져? 물으면 그 모습을 설명하고, 찍을 때도 그게 고스란히 구현된다.

연기 디렉션은 어땠나.

영화의 성격에 따라 다른데 <풀타임>은 간단하게 작업했다. 어떤 사람인지 배우한테 설명해주면서 전반적인 라인만 어떻게 해달라고만 얘기하고, 디테일을 살리는 건 온전히 배우의 몫으로 뒀다. 연기 디렉팅에서 가장 강조하는 게 신 사이의 리듬이다. 이 신에서 에너지가 100만큼 표현됐는데 그 다음 신에 그 레벨이 달라지면 영화 전체의 리듬을 살릴 수 없다고 봤다. 로르 칼라미가 너무 영리한 배우다. 촬영장에 어떻게 연기를 해야 할지 이미 아는 상태로 왔다. 첫 촬영날 쥘리가 일하는 호텔 입구에서의 신들을 찍었다. 첫 신은 쥘리가 평소처럼 출근하는 것이고, 같은 날 같은 공간에서 전혀 다른 상황을 찍어야 만했다. 로르 입장에서는 굉장히 까다로웠을 텐데 두 신의 감정선을 너무 잘 살려줬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한 에리크 그라벨, 로르 칼라미

작년 9월 베니스 영화제를 통해 처음 공개됐으니 팬데믹이 한창일 때 촬영했을 텐데 만만찮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다.

코로나19 때문에 촬영이 정말 복잡하고 어려웠다. 락다운 때문에 6개월간 촬영이 중단됐고. 다시 찍으려고 했더니 우리가 처음 계획했던 파리의 거리 모습이 전혀 아니었다. 교외에서 찍고 다시 파리에 왔는데 락다운이 끝나긴 했어도 여전히 거리에 차가 다니지 않아 혼잡한 풍경을 찍을 수 없어서 다시 촬영을 미루고, 어디에 몇 시에 가야 차가 많이 다닐지 조사한 다음에 촬영을 재개했다.

자신의 판단으로 비롯된 곤란한 상황에 쥘리가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다. 의도든 아니든 실수할 수는 있지만, 어떠한 죄책감도 비춰지지 않는 걸 보고, 쥘리의 입장에 이입하는 걸 멈추고 거리를 두게 됐다.

난 쥘리의 그런 반응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 나쁜 의도를 갖고 그렇게 행동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쥘리는 “이겨낼 거야, 지나갈 거야” 되뇌이면서 현실을 버티고, 주변 사람들한테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프랑스 비평가들은 자기보다 더 약한 사람한테 희생을 요구하는 사회 시스템이 그렇게 만든 거지, 쥘리라는 개인은 잘못이 없다는 의견이 많았다. 난 내 영화의 주인공이 완벽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이야기와 인물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볼 수 있지 않나. 인간은 취약하고, 그래서 어떤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지 보여주는 게 내가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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