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적은 없지만,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현재 프랑스에서 가장 뛰어난 감독 중 하나라는 사실은 모두 부정하지 못한다. 「카이예 뒤 시네마」 소속 평론가로 영화계에 입문한 그는 37년째 뛰어난 영화를 만드는 중이다. 특히, 2000년대 후반부터 연출한 작품들은 평단의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내고 있다. (물론 최근에 연출한 <와스프 네트워크>(2020)의 반응은 처참하지만, HBO에서 리메이크한 드라마 시리즈 <이마 베프>(2022)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뛰어난 영화광, 박학다식한 대사, 영화의 이론적 성취. 올리비에 아사야스를 둘러싼 수식어는 많지만, 하나가 빠졌다.
바로 그가 유명한 여성 배우들의 매력을 최대치로 끌어낼 수 있는 감독이라는 점이다. 마치 폴 토마스 앤더슨의 손을 거치면 할리우드의 남성 배우들을 대하는 방법과 비슷하다. PTA는 B급 코미디의 대가인 아담 샌들러로 하여금 <펀치 드렁크 러브>(2002)에서 명연기를 이끌어내고, <매그놀리아>(1999)에서 톰 크루즈를 액션 스타가 아닌 사기꾼으로 만든다.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줄리엣 비노쉬, 페넬로페 크루즈, 크리스틴 스튜어트, 장만옥 등 이름만 들어도 입이 떡 벌어지는 세계 최고의 배우들과 함께 작업해왔다. 그리고 그들이 아사야스의 영화에 출연할 때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아사야스와 그녀들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케미를 지금부터 자세히 살펴보자.
줄리엣 비노쉬: 배우 = 줄리엣 비노쉬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세계 최고의 배우 줄리엣 비노쉬를 사용하는 방법은 명확하다. 그는 줄리엣 비노쉬를 배우 그 자체로 여겼다. 매 순간 타인의 인생을 경험해야 하는 배우들의 모습과 다르게, 아사야스 영화 속 그녀는 언제나 현실 속 줄리엣 비노쉬와 큰 차이가 없었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2014)에서 그녀는 젊은 시절 파격적인 캐릭터를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20년 차 배우 마리아를 연기했다. 4년 뒤 <논-픽션>(2018)에서도 그녀는 남편 몰래 외도하고 있는 유명 배우 ‘셀레나’ 역을 맡았다. 그래서 그녀가 연기한 두 캐릭터는 해리슨 포드나 미카엘 하네케 같은 영화계 인물들의 이름을 언급하기도 한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올리비에 아사야스와 최근 함께한 두 편 모두 4~50대의 여성 배우 역할이다. 1964년생으로 올해 만 58세인 그녀의 나이와 비슷하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속 마리아의 이야기처럼, 그녀는 1986년 레오 까락스 감독의 <나쁜 피>(1986)를 통해 무명이었던 자신의 이름을 영화계에 알리기 시작했다. 히어로 영화를 경멸하다가 끝내 SF 영화 촬영에 응하는 마리아처럼, 그녀는 2018년 클레르 드니 감독의 SF <하이 라이프>(2018)에 출연하기도 했다. <논-픽션>에서는 자신이 연기한 셀레나의 입을 통해 자신의 이름인 ‘줄리엣 비노쉬’를 거론하는 자조적인 모습도 보여주었다.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생각하는 배우의 이미지는 그녀로부터 시작됐을지 모른다.
크리스틴 스튜어트: 서늘하고 스산하게
줄리엣 비노쉬가 올리비에 아사야스 영화에서 배우로 등장했다면,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어딘가 죽음이나 유령과 연관된 캐릭터를 연기한다. 줄리엣 비노쉬와 함께한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서 그녀는 마리아를 돕는 젊은 비서 ‘발렌틴’ 역을 맡았다. 비노쉬의 마리아가 흡사 현실 속 그녀의 이야기를 보이는 자전적인 캐릭터라면,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발렌틴은 영화와 영화 속 영화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매혹적인 존재다. 두 세계의 경계를 자유롭게 통과하는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는 언제든 그녀가 홀연히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은 불안감을 조성한다.
2년 뒤 그녀는 <퍼스널 쇼퍼>(2016)를 통해서 다시 한번 올리비에 아사야스와 만난다. 이번 작품에서는 영혼과 대화하는 영매의 능력을 갖춘 영험한 존재이자, 동시에 유명 배우 키라(노라 본 발드스타덴 분)의 퍼스널 쇼퍼로 일하는 ‘모린’ 역을 맡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느끼게 만들려는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야심은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완벽한 연기를 통해 비로소 성취되었다. 죽음, 두려움, 그리움 그리고 부재라는 추상적 속성을 표현하기란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다. 하지만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모린은 미묘하고 세밀한 감정의 물리적 상태를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그녀가 작년 <스펜서>(2022)로 평단의 호평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도, 사실 <퍼스널 쇼퍼>의 모린이라는 가장 어려운 캐릭터를 소화했기 때문이다.
페넬로페 크루즈: 알모도바르의 자장 밖에서
페넬로페 크루즈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페르소나로 유명하다. <귀향>(2006)을 통해 칸 여우주연상을, 16년 뒤 <패러렐 마더스>(2022)를 통해 베니스 여우주연상을 거머쥘 정도로 둘 사이의 합은 완벽을 자랑한다. 그런 그녀가 올리비에 아사야스와 <와스프 네트워크>를 통해 함께 작업한다는 소식은 많은 영화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결과적으로 <와스프 네트워크>는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최근작 중 가장 졸작에 가까운 작품이었지만, 페넬로페 크루즈의 연기력만큼은 건재했던 작품이다.
쿠바 본토를 공격하는 ‘반 카스트로’ 테러리스트 조직에 스파이로 침투한 쿠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와스프 네트워크>에서 그녀는 ‘올가’ 역을 맡았다. 올가는 홀로 미국으로 떠나 반역자로 낙인찍힌 남편과 달리, 굳건하게 쿠바에서 삶을 이어나가는 존재다. 올가에 대한 설명만 듣자면 그녀가 여태껏 연기했던 알모도바르의 헌신적인 어머니상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와스프 네트워크>의 반환점을 도는 지점부터 그녀의 매력은 배가되기 시작한다. 남성들로 가득한 영화 속에서 강인하고 굳건한 존재의 매력을 보이는 페넬로페 크루즈의 연기만이 유일한 위안거리다.
장만옥: 장만옥이라는 아이콘
이 기사를 작성한 목적은 사실 장만옥 때문이다.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초기작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는 단연 장만옥이다. 이미 왕가위의 페르소나로 국제적인 인지도를 가졌던 그녀가 당시 프랑스의 떠오르는 샛별이었던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작품으로 유럽 영화계의 발을 들인다는 사실은 큰 충격이었다. <이마 베프>(1996)는 심지어 무성영화 시절 제작된 프랑스 감독 루이 푀이야드의 <흡혈귀들>(뱀파이어, 1915)에 대한 오마주를 담아 프랑스 영화계를 진단하는 내용이다. 홍콩의 배우 장만옥과 누벨바그의 대표 주자인 장 피에르 레오가 프랑스 영화에 대해 말하는 이 작품은 많은 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장만옥의 배역은 무려 장만옥이다. (줄리엣 비노쉬도 줄곧 배우 역할을 맡았지만, 본명이 그대로 배역이었던 점은 없었단 점을 기억해보자) 아사야스는 그녀의 이방인이라는 속성을 <이마 베프> 안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불편한 의상과 혼란한 현장은 타국의 배우인 장만옥 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장만옥만이 프랑스 영화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하고 목소리를 내는 존재기도 하다. 혼란에 가득 찬 눈빛과 뱀파이어 특유의 고혹적인 눈빛을 모두 지닌 그녀의 매력은 <이마 베프>를 통해 제대로 폭발했다.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커리어에 가장 기념비적인 <이마 베프>는 짧은 시간 장만옥과 아사야스가 결혼 생활을 하게 된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2001년 이혼한 이후에도 장만옥은 <클린>(2004)에서 다시 한번 그와 호흡을 맞췄고, 칸 영화제는 그녀에게 여우주연상 수상의 영예를 안겼다.
장만옥의 소름 돋는 연기와 아사야스의 미친 연출이 빛을 발했던 <이마 베프>는 27년 만에 국내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2월 1일 극장에서 개봉하는 이 작품을 놓친다면, 땅을 치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