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을 뚫고 나오는 듯한 강렬한 눈빛 때문에 작품 속 배우의 눈을 제대로 못 쳐다본 경험, 다들 한 번쯤은 있을 거다. 개인적으로 그런 느낌을 받은 배우는 <D.P.>의 조현철이다. <D.P.>에서 군 폭력 피해자 조석봉 역을 연기한 조현철은 여러 갈래로 얽힌 복잡한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해 내며 대중에게 그 이름을 또렷이 각인시켰다. 그는 적은 비중임에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신스틸러’ 배우라기보단, 다른 배우들의 공간은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남은 공백을 켜켜이 채워 넣는 ‘마지막 남은 퍼즐 한 조각’ 같은 배우다. <D.P.> 이전에도 <차이나타운>, <호텔델루나> 등을 통해 꾸준히 연기 실력을 입증한 조현철은 배우로서의 무게감은 이미 충분히 보여준 터. ‘인간 조현철은 어떨까?’ 궁금해질 즈음, 그는 단단한 소신이 훤히 드러나는 수상소감으로 ‘인간 조현철도 좋다’는 확신을 주었다.
제겐 올타임 레전드이자 동경하는 배우”
배우 구교환이 말하는 조현철
조현철의 시작은 연출자였다. 서강대학교 인문학부에 입학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에 합격한 그는 본격적으로 창작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2010년, 연출 데뷔작이자 연기 데뷔작인 단편영화 <척추측만>을 통해 비범한 존재감을 드러낸 조현철. 당시 한예종 규정상 2학년 때 만든 작품은 영화제 출품이 불가했는데, 조현철의 <척추측만>은 높은 수준으로 인해 예외적 상황에 놓였다고. 이후 <척추측만>은 제4회 대단한 단편영화제 KT&G 금관상, 제26회 서울독립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언급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린다.
조현철과 고등학교 동문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동기인 배우 박정민은 그를 두고 “나는 영상원에 가겠다고 소문 다 내는 스타일이었는데 현철이는 시험 보기 며칠 전에 갑자기 영상원에 가겠다고 하더라. 현철이는 아직도 넘을 수 없는 산 같다. 열심히 따라가도 그 친구만큼은 안 된다. 부럽다. 3년 동안 지켜본 바 조현철은 천재다”라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최근 가장 주목받는 배우인 구교환은 <D.P.> 출연 당시 조현철에 대해 “제겐 언제나 올 타임 레전드 배우이자 동경하는 배우”라며 “부러울 정도의 재능을 가진 배우다. 사실 조현철 배우가 조석봉 역할을 맡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굉장히 든든했다. 이 이야기의 먹먹함을 조현철만큼 잘 전달할 수 있는 배우가 또 있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고 존경의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죽음은 존재 양식의 변화”
2022 제58회 백상예술대상에서 남자 조연상 받은 조현철의 수상소감
지난 6일 진행된 제58회 백상예술대상에서 TV 부문 남자 조연상을 받은 조현철의 수상 소감이 연일 화제다. 으레 시상식 수상 소감이라고 하면 주로 감사한 사람, 동료 배우, 스태프의 이름을 호명하며 시간을 할애하는 경우가 많다. 배우 조현철에겐 온전히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발언할 수 있는 그 시간이 조금 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 듯하다. 그는 투병 중인 아버지를 위로하는 말로 시작, 이어 사회에서 차별과 부조리로 희생된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언급했다. 조현철의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오래 들여다보고 싶은’ 수상 소감은 이번 백상예술대상에서 견줄 바 없는 명장면으로 남았다.
아버지가 투병 중이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에게 용기를 드리고자 잠시 시간을 할애하겠다. 아빠, 눈을 조금만 돌리면 마당 창밖으로 빨간 꽃이 보이잖아. 그거 할머니야. 할머니가 거기 있으니까 아빠가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죽음이라는 게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냥 단순히 존재 양식의 변화라고.
작년 한 해 동안 첫 장편 영화인<너와 나>라는 작품을 찍으면서 나는 분명히 세월호 아이들이 여기에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 그리고 그 영화를 준비하는 6년이란 시간 동안 나에게 아주 중요했던 이름들, 박길래 선생님, 김용균 군, 변희수 하사, 이경택 군, 세월호의 아이들. 나는 이들이 분명히 죽은 뒤에도 여기 있다고 믿어. 그러니까 아빠 무서워하지 말고 마지막 시간 아름답게 잘 보냈으면 좋겠어. 사랑합니다.
이날 조현철은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인 고 박남옥 감독(1923~2017)의 사진이 프린트된 셔츠를 입고 시상식에 등장했다. 여성 영화인들의 활동을 주도한 박남옥 감독은 한국 영화사에서 중요한 출발점을 불러온 인물이기도 하다. 1923년 경북 하양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영화를 무척 사랑했다고. 그는 일제 강점기 조선 영화의 최고 스타였던 김신재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한다.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이기 전에 초창기 한국 영화사의 산증인이기도 했던 것. 박남옥 감독의 데뷔작이자 유일한 작품인 <미망인>(1955)은 이보라가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친언니에게 돈을 빌려 촬영에 착수한 영화다. 생전 박남옥 감독의 말에 따르면 영화 착수까지도 힘들었지만, 영화 촬영 현장을 유지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고. 촬영하는 날보다 제작비를 빌리러 다니는 날이 더 많았고 돌도 지나지 않은 아기를 맡길 곳이 없어 직접 포대기에 둘러업고 촬영 현장을 누볐다. 또한 직접 편집을 하고 전창근 감독 등의 도움으로 겨우 녹음실을 구해 후반 작업을 마치는 등 그야말로 고생 끝에 영화를 개봉시켰다.
박남옥 감독은 “예술이란 개념은 그날 나에게는 사치였다. 여름부터 겨울까지 반년 넘도록 아이를 업고 기저귀 가방을 든 형상으로 미친 사람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촬영 기재 마련, 돈 마련, 스태프진 식사 마련으로 정신이 빠져 있던 나는 영화 동지들의 그동안의 도움과 격려에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미망인> 제작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예술을 논했었다. 그러나 그날, 완성된 <미망인>을 다 같이 보던 그날, 그런 것들은 더 이상 나에게 의미 없었다. 나는 그저 속으로 울고만 있었다”는 말을 남긴 바 있다. 이러한 삶을 살다 간 박남옥 감독의 사진이 프린트된 셔츠를 입은 조현철이 공식 석상에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또 그 자리에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는지 고스란히 전달되는 바다.
아버지는 한국 환경 운동의 선구자인 조중래 교수, 큰아버지는 조영래 인권변호사”
형은 래퍼 매드클라운
조현철이 수상소감에서 언급한 박길래 선생님은 2000년에 사망한 환경운동가다. 그는 1980년대 상봉동 진폐증 사건의 피해자로 공장 밀집 지역에 거주하다가 집 주변 연탄공장에서 날아온 분진으로 진폐증에 걸렸다. 탄광 밖에서 진폐증 환자가 발생한 사례가 많지 않았던 만큼 그는 환경운동가로서의 긴 싸움을 이어갔다. 그 끝에 1989년 대법원에서 최초로 공해병 환자로 인정받았다. 이때 그를 대리한 이는 ‘부천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맡는 등 평생 공익변론에 힘쓴 고 조영래 변호사다. 이번 수상 소감으로 인해 조현철이 조영래 변호사의 조카라는 사실이 다시금 알려졌다. 큰아버지인 조영래 변호사를 비롯, 조현철의 가족사는 남다르다. 조현철의 아버지 조중래 명지대 교통공학과 명예교수는 ‘공해연구회’를 만드는 등 한국 반공해 환경운동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다. 조현철의 어머니 안일순 작가는 미군 기지촌에서 활동, 이를 배경으로 한 소설 <뺏벌>을 발표하는 등 여성문화운동에 몸담은 인물이다. 또한 조현철의 친형은 래퍼로 활동 중인 매드클라운(조동림)이다.
씨네플레이 황남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