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신작 <나이트메어 앨리>(2021)가 베일을 벗었다. 브래들리 쿠퍼를 중심으로, 케이트 블란쳇, 토니 콜렛 등 올스타 캐스팅을 자랑하는 이 영화는, 독심술로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서커스 단원 스탠(브래들리 쿠퍼)이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좇는 이야기다. 스탠은 그의 여정에서 세 여자와, 세 남자를 만난다. 첫 번째 여자는 그에게 독심술을 소개한 지나(토니 콜렛)다. 전기가 통해도 죽지 않는 일명 전기 소녀, 두 번째 여자 몰리(루니 마라)와는 사랑에 빠진다. 스탠과 몰리는 카니발을 떠나 도시에 새 터전을 마련하고 사람을 속이는 독심술로 먹고살지만, 위험한 정신과 의사 릴리스(케이트 블란쳇)를 만나면 이들의 새 세계도 무너진다. 남자 셋은 스탠을 카니발로 끌어들이는 유랑단장 클렘(윌렘 대포), 지나의 알콜중독자 남편 피트(데이빗 스트라탄), 미스터리한 의뢰인 그린들(리차드 젠킨스)이다. 북미 공개를 앞두고 영화를 만든 이들과 화상 기자회견을 가졌다. 윌렘 대포와 나눈 <나이트메어 앨리> 뒷이야기와, 루니 마라, 리차드 젠킨스, 데이빗 스트라탄과의 짧은 인터뷰를 전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등 제작진과의 인터뷰는 링크에서 확인하길. 영화는 2022년 국내 개봉 예정이다.
빌런 연기, 나쁜 사람이 되면 안 된다는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
클렘 役, 윌렘 대포
<나이트메어 앨리>와 클렘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꼈나.
일단 대본이 좋았다. 사이드 쇼(서커스 등에서 손님을 끌기 위해 따로 보여주는 소규모의 공연 – 편집자)를 보러 다니던 어린 시절 기억이 선명하다. 서커스 단원, 특히 사이드 쇼 공연을 하는 이들이 풍기던 어둡고도 낭만적인 분위기를 기억한다. 무서우면서 매력적이었다. 온갖 이야기를 벌여 놓는 그 유랑자들은 세상을 다 아는 사람들 같았다. 적어도 위스콘신의 꼬마였던 내겐 그랬다. 이 경험에서 시작해 카니발 호객꾼이 될 준비를 했고, 진짜 같이 꾸며진 세트에 도착해 인물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정교하게 구현된 카니발 세트에서 연기했다.
디테일이 아름다웠다. 밤에 조명으로 빛나는 카니발 세트에 들어가면 정신이 번뜩 든다. 현장 사람들이 카니발 단원이 되어 움직이기 시작하면, 세트는 순식간에 진짜 카니발으로 변했다. 쉽게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었고 내게 기대되는 역할이 분명했다. 어렸을 때 피클드 펑크(pickled punks, 카니발 사이드 쇼에 전시되는 태아가 담긴 병 – 편집자)를 처음 본 충격은 아직까지 뇌에 깊이 새겨져 있다. 이런 기억을 상기시키는 생생한 세트 덕에, 연기를 위해 구태여 상상해야 할 것이 많이 없었다.
클렘은 복합적인 캐릭터다. 그는 때에 따라 따뜻하기도 잔인하기도 하다.
우리는 캐릭터를 판단할 수 없다. 기회를 줄 수 있을 뿐이지. 클렘은 현실적인 사람이다. 스스로를 돌볼 줄 안다. 그가 경제 불황기를 겪으며 자랐을 수도 있고, 수감된 적이 있을 수도 있다. 클렘은 세상을 실리의 관점에서 본다. 그의 세계는 승자와 패자, 포식자와 먹이로 나뉜다. 어두운 운명론적 관점으로 세상을 보지만, 그는 주변 사람을 챙길 줄 안다. 평범한 사람을 카니발 기인으로 만드는 잔인한 과정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에서, 그가 이를 즐기지 않는다는 게 보일 거다. 그냥 하는 거다. 그의 행동을 정당화하려 하는 건 아니다. 그에게 있어 책임은 욕구 같은 인간 본성이다. 그가 어두운 캐릭터인 것은 맞지만, 사람들을 망치기를 즐기는 경솔한 사람은 분명 아니다. 누군가에겐 자애로운 사람이다. 많이 부족한 그도 인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릭터의 도덕성을 판단할 자격은 배우인 내게 여전히 없다. 마음을 열고 캐릭터의 모순성을 받아들이는 게 이 내 일일 뿐이다.
클렘을 연기하는 데 특별히 도움을 준 경험이 있나.
바로 떠오르는 건 없지만, 클렘이 하는 호객 행위, 관중을 끌어들이는 일장 연설은 영화 연기보다 무대 연기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영화는 보통 자연주의에 기반을 두니까. 연극에서 관객을 설득하던 경험 덕을 좀 보지 않았을까.
클렘이 지금까지 연기했던 캐릭터와 구별되는 점이 있다면.
좋은 질문인데, 내가 좋은 답을 가졌는지 모르겠다. 내가 지금까지 연기한 모든 캐릭터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건 나다. 그들은 나이면서 내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누구인지는 많은 조건에 영향을 받으니까. 작품을 선택할 때, 전에 연기했던 캐릭터는 내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새 인물을 연기할 때 이전 캐릭터는 잊으려 한다. 선택적 기억상실이랄까. 그래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더 좋은 답변을 줄 수 있을 거다. (웃음) 나는 오랫동안 이렇게 살아왔다. 뭘 할 때마다 처음 하는 마음으로 임하자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연기해왔다. 작품이 끝나면 다음으로 넘어간다. 내가 해온 걸 무시하는 게 결코 아니다. 끝난 건 끝난 거다. 예전 작품을 보냐고 묻는 사람이 종종 있는데, 안 본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Avanti, Avanti, Avanti.)
당신의 역할 선택 기준이 궁금하다.
전체적인 그림을 본다. 역할 그 자체보다는 상황이 내겐 중요하다. 사실 연기하기 전까진 역할에 대해 온전히 알 수 있는 길이 없다. 그리고 보통, 그 전에 어떤 인물인지 머릿속에 그려진다면 연기하며 모험하거나 놀랄 여지가 없다. 상황을 보는 거다. 배움을 얻을 상황, 변신의 기회를 줄 상황, 판타지나 궁금증을 해소해 줄 상황. 이게 내가 작품에 기대하는 점이다. 그러고 나서 “나라면 이 영화를 보고 싶을까,” “이 사람들과 일하고 싶나” 생각하지. 역할에 대한 해석보다는 직관과 관련된 것들이다. 이야기가 흥미로운지, 공감이 가는지, 대게 도전 과제를 안기는지, 내가 작품에 뭘 기여할 수 있는지, 내게 맞는 역할인지 따져 본다.
혹시 빌런과 선한 캐릭터 중 더 선호하는 쪽이 있나.
솔직히 말하자. 선한 역을 연기하는 건 골치 아프다. 적어도 빌런에게는 매력적인 금기라도 있다. 우리는 나쁜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인생 내내 지겹도록 배워서, 때때로 나쁜 사람이 되어버리고 만다. 빌런은 나쁜 사람이 되면 안 된다는 오랜 두려움으로부터 해방감을 느끼게 해 줄 거다. 그렇다고 빌런을 연기하는 게 더 재밌다고, 간편하게 말해버리고 싶진 않다. 그 캐릭터가 이야기 안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가 더 중요하니까. 납작한 빌런도 있고, 이야기에 이용되고 버려지는 빌런도 있다. 그런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진 않을 거다. 입체적이고 모순적이기도 한 인간을 연기하고 싶지. 착한 인물, 나쁜 인물을 정의하는 건 주관적인 거다. 사람들은 종종 내가 빌런 연기를 많이 했다고 하는데. 장담하건대,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나는 선한 캐릭터를 더 많이 맡았다.
어떤 점이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을 돋보이게 한다고 생각하나.
<나이트메어 앨리>에는 적용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그가 장르를 섞는 방식을 사랑한다. 그는 어울리지 않을 법한 것들을 환상적으로 버무린다. <악마의 등뼈>(2001)는 정치적 함축이 담긴 시대극이면서 호러 영화다. 그 장르의 접합이 흥미롭다. 시네마를 사랑하고, 영화사에 정통하고, 상징을 만드는 데 열정적이며, 새로운 방식의 스토리텔링을 하기를 끊임없이 원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기예르모에게는 특별한 재능이 있다. 그의 인장인 상징적인 크리처들로 소외된 이들을 이해하도록 요구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특기다.
캐릭터에 어떻게 접근했나.
루니 마라 기예르모는 영화를 만들 때 캐릭터의 일대기를 쓴다. 그걸 읽는 데서 시작했다. 의미 없는 사소한 것까지 담고 있지만, 덕분에 몰리가 진짜처럼 느껴졌다.
리차드 젠킨스 이번 작품에서 기예르모가 그린들의 일대기는 쓰지 않아서, 대본을 읽으며 준비했다. 그린들은 그가 사랑했던 죽은 여인의 영혼과 교감하려 평생을 노력한다. 그 여인과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정원을 가꾼다. 그런데 알고 보면 모든 게 가짜였고, 그린들의 삶은 그 순간을 향해 달려왔던 거다. 그 사실을 마주한 그린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정신을 추스를지 궁금해졌다.
데이빗 스트라탄 기예르모가 쓴 방대한 일대기에는 모든 정보가 들어있었다. 피트가 어떻게 독심술을 쓸 수 있게 되었는지부터, 어떻게 지나를 만났고, 어쩌다 인생의 내리막을 걷게 되었는지 다 담겨있다. 심령술사 기술과 관련해서는 제작진이 모아둔 아카이브를 참고했다. 현장에 상주한 마술사에게서 손장난이나 카드 묘기를 배우기도 했다. 기예르모는 필요한 모든 걸 말만 하면 다 가져다줬다.
몰리, 그린들, 피트와 스탠이 어떤 관계라고 생각하나.
루니 마라 몰리는 지나칠 만큼 나쁜 상황에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가엾이 여길 줄 안다. 그 사랑의 마음이 그를 몰락하게 할 정도지. 몰리는 스탠의 모든 걸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리차드 젠킨스 “그린들이 스탠을 좋아할까?” 계속 고민했는데 딱히 그렇지 않더라. 그에겐 스탠이 필요했던 거다. 그가 필요할 때만 그를 좋아했다. 필요 없을 땐 좋아하지 않았다. 그린들은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다. 스탠에게 감정이입을 할 때도 있고, 그를 때려버리고 싶어 할 때도 있다. 그린들은 ‘인간’일 뿐이다. 그를 설명하기 딱 좋은 말이지. 둘은 어떤 한 입장을 선택해 취했다기보다는 흐름에 맡겨 상황에 따라 변했다.
데이빗 스트라탄 피트는 스탠에게, 심령술로 만드는 거짓에 스스로 속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 인물이다. 피트가 경험에서 얻은 교훈이지. 피트가 내게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그가 스탠의 아버지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어려서 가족을 잃고 스탠은 줄곧 누군가의 손길을 필요로 했다. 스탠은 지나와 피트를, 몰리를 원했다. 피트가 스탠의 자아 발견 여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게 흥미로웠다.
글 씨네플레이 이지연 기자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