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존재하기보다 되어가는 것 : <브로커>, 어떤 편견이 감상을 방해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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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으니 영화를 관람 하신 뒤 읽어보실 것을 권합니다.)

소영(아이유 분)은 자신이 낳은 아이 ‘우성’을 브로커인 상현(송강호 분)과 동수(강동원 분)를 통해 판매하게 된다. 자신이 엄마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소영은 아이를 데리고 판매자를 찾아 전국을 떠돌다가 심경의 변화를 맞이하고, 이들과 여행하며 가족의 온정을 느낀 상현은 소영이 그 아이를 키울 수 있을것이라는 것을 감지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들어갈 자리가 없음에 비켜줘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윗글은 <브로커>(2022) 의 외적 사건을 나열한 스토리가 아니다. 즉, 이야기라기보다는 인물의 감정을 따라간 해설지에 가깝다. 그렇게 소개하는 것이 이 영화의 알맹이를 전달하는데 있어서 더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소영의 이야기로 시작해 대안가족의 구성과 해체의 과정을 보여주며 상현의 이야기로 마무리 짓는다. 아기 인신매매를 저지르는 브로커들이지만 실은 그들의 속내는 여리고 착하다. 모두가 아이의 행복을 위해 좋은 부모에게 아이를 전달하기 위해 힘쓴다.

영화는 아이의 관점에서 희망을 논하며 엔딩을 맞이한다. 그러나 선한 모습을 잃지 않는다고 해서 ‘브로커’라는 세계에 몸담은 상현같은 인물에게 광명을 주지는 않는다. 가족을 일구려고 온정도 느끼고 실제로 노력도 하고 친딸을 찾아가 읍소도 해보았지만 희망에서는 배제가 된다. 마지막 씬에서 한 때 즐거웠던 사진속의 인물들은 밝게 웃고 있지만 계속해서 불안하게 흔들린다. 그리고 그것을 쳐다보는 시점의 주인공은 상현이라는 것을 자연스레 연상할 수 있다. 스스로의 습성을 아는 것인지 업보를 아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 또 가족이 만들어지면 상현 자신이 일군 그룹은 끊임없이 흔들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라도 하는 듯 우성에게는 접근하지 못한다.

이 영화의 감독인 히로카즈의 작품에선 항상 희망과 행복이 제시되면 그것은 유야무야한 안개를 보는 인상을 준다. <걸어도 걸어도>(2008)의 엄마는 마음이 후련해 질 수 있는 순간을 몇 번이나 맞이해 왔지만, 아들을 죽게 만든 자의 고통을 더 갈구하는 쪽을 택한다. <아무도 모른다>(2004)의 소년은 비행기를 동경하지만 좋아하는 표정만 비출 뿐 비행기는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 이윽고 죽은 동생을 묻을 때가 돼서야 소년과 비행기는 한 프레임에 잡히게 된다. 히로카즈 감독의 이런 구성을 역으로 되집어보면, 송강호라는 배우가 품은 연기의 이면이 온전히 다가오게 된다.

빚쟁이를 상대하든, 보육원의 사람들과 정을 나누든, 흥정하는 부부들을 비난하든지 간에 송강호가 보여주는 상현의 그림자에서는 ‘가족을 향한 큰 욕구가 있지만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서브 텍스트를 읽을 수 있다. 실제 촬영장에서는 ‘지금은 화가 난 상현을 연기할게요, 그러나 서브 텍스트는 늘 품고 있어주세요’ 이런 식의 연기 디렉팅은 힘들다. 인간의 외면이 두 가지를 동시에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나리오를 분석한 배우가 스스로 그것을 구현하는 것은 가능하다. 물론 대본이라는 문서에 대한 독보적 해석력 뿐만아니라 삶에 대한 깊은 사유가 필요하다. 그 성취는 관객에게 와 닿았는가? 이에 깐느에서는 남우주연상으로 화답했다.

축하드립니다!

히로카즈 감독의 제시, 무엇하나 당연한 것은 없다.

자식을 가진 엄마 관객이 극 중 소영의 캐릭터를 보며 볼멘 소리를 내는 것을 들었다. ‘모성의 눈빛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생후 100일이 안 된 아기들이 난데 없이 울음을 터트릴 때가 있다. 무언가를 요구하는 소통의 의미도 있지만, 어두컴컴하고 촉촉한 엄마의 뱃속이 아니란 걸 알아차리고 이에 대한 불안을 표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이는 곧 주변의 사랑과 관심으로 인하여 안정을 찾아간다. 이윽고 새로운 삶을 인지한 생명은 부모의 부재에 눈물을 터트리며 울음의 목적을 바꾼다. 당연함의 요소가 바뀌는 것이다.

볼멘소리의 엄마 관객도 비슷한 경우가 아니었을까? 스스로는 엄마로서의 당연한 마음과 태도를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존재들을 보면 불편한 마음이 올라왔으리라. 아마 그녀 스스로도 자식을 사랑하기 위해 거쳐갔던 수 많은 노력의 시간들이 있었을텐데, 그것이 마음속에 새겨지니 다른 상황에 대해 경시하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엄마’라는 단어에는 곧 ‘좋은 엄마’여야 한다는 일종의 강제성이 담겨있다. 그 단어가 품은 중량감이 <브로커>의 캐릭터들의 설정에 거부감을 심어준 것은 아닌가 생각도 든다. 소영 캐릭터는 배제되거나 소외된 모성에서 시작한다. 그러므로 브로커들의 범죄에 응했을 런지도 모른다. 엄마라는 지위가 응당 보여야 한다고 강하게 믿는 관념은 이 이야기를 보는데 있어서 훼방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모성과 부성의 강제성은 우리의 본능과 맞닿은 것일까? 적어도 히로카즈 감독은 전작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부모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며 부성(모성)이란 노력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일종의 책임이 되고 선택이 된다. 그러므로 가족은 기록이 아니라 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 즉 궤적이나 내력에 가깝다는 것이 연출자의 태도였다. 그 당시에 ‘여성은 아이를 낳자마자 어머니가 되지만, 남자는 무엇을 통해 부성에 눈을 뜨게 되는건지 그리고 싶었다’는 연출자는, 모성 또한 외부의 영향을 받는 것이라는 수많은 여성들의 뭇매를 맞으면서 <브로커>의 구성을 수정했다고 한다.


희망은 늘 멀다. 그것은 다큐멘터리스트로서 히로카즈 감독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그 어떤 남성도 그렇게를 거치지 못하면 아버지가 되지 못하고 그 어떤 여성도 그렇게를 거치지 않으면 어머니가 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가족에겐 가족’이다’가 아니라 가족이 ‘된다’는 표현이 훨씬 가까워 보인다. 혈연과 결혼이라는 강제성을 기조로하기 때문에 가족 사이에 갈등이 사라질 수 없는 것이라면,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가족의 형태도 생각해봄직하다.

이런 시선이 기존 가족의 해체를 부추기지는 않을까? 대안가족도 사랑을 근거로 해야하는데 혈연이라고 다르겠는가. 매우 마땅하다고 여겼던 부성과 모성에도 노력이 필요한데, 혼인이나 입양으로 구성되거나 필요한 사람들끼리 만나는 가족 관계라고 그렇지 않겠는가 말이다. 결국 핵심은 형태가 아닌 사랑을 향한 노력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노력에 대한 무용을 언급할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어떤 노력을 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 건설적인 일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사람을 향한 그 수고는 반드시 보상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히로카즈 감독이 <브로커>에서 주장하는 것 처럼, 세상에는 여전히 선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고 우리 또한 그들을 응원하기 때문이다.


프리랜서 막노동꾼 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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