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 12월 28일, 29일 개봉해 2022년 마지막을 장식한 영화 <크레이지 컴페티션>, <라스트 필름>. 두 영화는 장르도, 국적도 다르지만 영화감독의 욕망이 투영됐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소설에서 소설가가 주인공인 것이 흔하듯, 영화에서도 영화감독이 주인공인 경우가 드물지 않다. 아마도 만드는 사람(영화감독)이 가장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2022년 마지막을 장식한 두 영화의 바통을 이어받아 2023년에도 여전히 빛나는 영화감독 주인공인 영화들이다.
8과 1/2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8과 1/2>은 영화사의 고전이자 이 분야의 원류 중 하나다. 다음 신작을 만들어야 하는 영화감독 귀도(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가 영화의 주인공. 영화는 만들어야 하는데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으니 도망치는 꿈인지 환상인지를 보곤 한다. 귀도의 영화에 사활이 달린 사람들은 그에게 목을 매고,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점점 더 환상의 이미지에 빠져들곤 한다.
주변에서 추앙받는 영화감독 귀도는 (쉽게 짐작할 수 있듯) 사실 페데리코 펠리니 본인을 투영했다. 펠리니는 스스로 아이디어가 고갈된 순간을 소재로 삼았고, 그것을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 기묘한 여정으로 승화시켰다. 이전에도 거장 소리를 듣던 감독이었으나 <8과 1/2>을 통해 ‘거장’임을 재차 증명했다. 꿈과 환상을 이용한 다채로운 이미지와 영화계의 다양한 인간 군상은 여러 영화에 모티브를 줬다. <8과 1/2>은 뮤지컬 「나인」으로 무대에서 재창조되기도, 피터 그리너웨이의 <8과 1/2 우먼>처럼 다른 영화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
망각의 삶
<망각의 삶>은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얼굴의 존재감, 스티브 부세미가 영화감독 닉으로 출연했다. 신작을 촬영 중인 영화감독 닉은 각종 어려움에 부딪힌다. 배우들은 말을 안 듣고, 스태프들은 각자의 사정으로 촬영에 집중하지 못하고. 닉은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모두를 설득하고자 촬영장을 동분서주한다.
스토리처럼, <망각의 삶>은 코미디다. 우리가 ‘영화감독’이란 단어에서 상상하는, 의자에 앉아 스태프를 지휘하고 톱스타 배우에게 날카로운 디렉팅을 하는 그런 고상함은 여기에 없다. 어떻게든 영화를 완성하고자 모든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 하는 닉의 고군분투는 우리네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망각의 삶>은 그 코미디에서 멈추지 않고 야망까지 더했다. 꿈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수차례의 반복으로 변주되는 상황들은 영화와 인생을 바라보는 톰 디칠로 감독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피터 딘클리지의 데뷔 초 모습을 만날 수 있는 영화.
헤일, 시저
<인사이드 르윈>과 <카우보이의 노래>라는 걸출한 영화 사이에 놓인 <헤일, 시저!>는 코엔 형제의 영화 중 뭔가 툭 튀어나온 모양새다. 아마도 1950년대 할리우드에 흐르는 낭만의 분위기 때문이리라. 대놓고 유쾌한 것보다는 착 가라앉은 와중에 돌연 웃음이 터지는 블랙코미디에 능한 코엔 형제는 <헤일, 시저!>로 50년대의 할리우드의 양면을 묘사했다. 톱스타 베어드 휘트록(조지 클루니)가 실종되자 영화사 대표 에디(조시 브롤린)는 그를 구하기 위해 수소문한다.
이 영화에선 랄프 파인스가 베테랑 영화감독 로렌스 로렌츠로 등장한다. 영화사 사장의 추천으로 출연하게 된 호비(엘든 이렌리치)에게 조근조근 디렉팅을 해줬지만, 그가 속된 말로 ‘발연기’를 펼치자 고상한 얼굴 위로 탄식이 피어난다. 그 순간의 표정이 정말 일품. 로렌스가 호비를 압박하는 장면은 베테랑 감독을 실제로 만나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 그 외에도 크리스토퍼 램버트가 뮤지컬 영화를 연출하는 감독 안 세슬럼으로 출연했다. 디안나 모란(스칼렛 요한슨)과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태연한 모습이 어쩐지 당시 할리우드의 부조리를 보여주는 듯하다.
색정남녀
예술을 하겠다고 여자친구에게 얹혀사는 영화감독. 어쩐지 끌리지 않는 인물 설명인데, 이 영화감독을 장국영이 연기했다면 어떤가. 바로 호기심이 생긴다. 영화감독 아성은 연출작 두 편이 실패하고 간신히 일자리를 얻는다. 그가 연출할 영화는 에로 영화. 안 그래도 예술하겠다고 작정한 영화감독이 에로영화를? 하고 싶은 영화도 아닌데 일은 일대로 안 풀리고. 아성은 영화를 포기하려던 찰나, 어떤 순간들을 맞이하며 이번 영화에 진심으로 임하기 시작한다.
장국영이 불멸의 배우이긴 하나, 지금은 왕가위 감독 영화나 서극 감독 영화가 대표작으로 호명되고 있으니 <색정남녀>가 널리 알려진 영화가 아니다. 아무래도 에로영화라는 소재가 특히 장벽이었으리라. 1996년 영화인데 한국에는 2000년에야 개봉한 것도 그렇고. 영화는 물론 과장된 구석이 있지만, 영화를 꿈꾸는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기막히게 포착한다. 예술이면서 산업이고 유흥거리인 영화, 그 현장에서 파생되는 사람들의 얼굴이 무척 인상적이다. 아마도 공동연출자 이동승의 마음이 서려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동승은 극중 유청운이 맡은 흥행에 실패한 영화감독에게 자신의 이름을 쥐여주기까지 했다. 인기스타이면서 (늘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한) 왕가위의 페르소나 장국영이 예술에 집착하는 아성을 연기한 것도 눈길이 간다. 평소 감독 데뷔를 고려하던 장국영은 <색정남녀>를 찍는 동안에도 연출 연습이라고 생각하며 임했다는 일화를 남겼다.
여균동 감독의 영화들
이상하리만큼 꾸준히 영화감독의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이 사람, 여균동. 비루한 영화감독이 인생 역전을 꿈꾸는 <죽이는 이야기>를 비롯해 2020년 영화 <저승보다 낯선>까지, 그는 영화감독 캐릭터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했다. <예수보다 낯선>, <저승보다 낯선>으로 이어지는 ‘낯선 2부작’은 아예 본인이 영화감독으로 출연, 주연까지 맡았다. 각본, 연출, 주연을 도맡은 영화들이라서 자연스럽게 그가 생각하고 체감한 영화감독, 영화 만들기에 대한 정서가 묻어있다. 독립영화라 이미지보다 대화에 많은 빚을 지고 있기에,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볼 때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 있다. 2006년 영화 <비단구두> 역시 주인공이 영화감독인데, 다른 작품들과 달리 영화 만들기가 아닌 현실을 ‘거짓말’을 꾸며야 하는 부분이 포인트. 이 영화에선 이성민, 최덕문 등 반가운 얼굴들을 만날 수 있다.
이외에도 영화감독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그중 실제 영화감독 일대기나 실화를 각색한 영화는 다 담기에 어려워 몇 편을 골라 소개한다. 팀 버튼 감독의 <에드 우드>는 ‘역사상 최악의 감독’이라고 소개되는 에드 우드 감독의 일대기를 다룬다. 팀 버튼하면 떠오르는 형형색색 화려함 대신 흑백 화면에 고전 영화계와 영화인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은 영화. 데이빗 핀처 감독의 <맹크> 또한 흑백 화면으로 고전 할리우드를 재현한다. 다만 여기는 <시민 케인>을 집필하는 허먼 J. 맹키위츠를 주인공 삼아 할리우드의 위선과 낭만을 동시에 표현한다. <뱀파이어의 그림자>는 걸작 <노스페라투>를 만든 F. W. 무르나우(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와 배우 맥스 슈렉이 주인공이다. 존 말코비치와 윌렘 대포의 열연을 바탕으로 독특한 상상을 가미한 영화.
한국 영화 중엔 <오마주>가 단연 돋보인다. 중년 여성감독이 한국영화계 1세대 여성감독의 작품을 복원하면서 겪는 이야기를 그렸다. 신정원 감독이 연출하고 이정은이 극중 영화감독 지완을 맡았다. 이 작품에서 언급되는 홍은원은 실존했던 영화감독. 아무래도 영화감독 영화 하면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뺄 수 없다. 영화마다 어느 정도 자전적인 풍경을 묘사한 홍상수 감독 영화는 대개 영화감독이 주인공이나 주변인물로 등장한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