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으로서 할리우드는 할리우드에서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에게도 신기루 같은 존재다. 코엔 형제 (헤일 시저, 2016; 바톤 핑크, 1991), 쿠엔틴 타란티노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2019), 데이빗 핀쳐 (맹크, 2020), 폴 토마스 앤더슨 (리코리쉬 피자, 2022) 을 포함해 ‘할리우드’ 영화는 거장들에게 관문과 같은 프로젝트일런지도 모르겠다. 감독들의 할리우드를 향한 필연적 예술혼은 할리우드의 입성을 꿈꾸는 미아를 통해 ‘틴젤 타운’ (할리우드의 또 다른 별명) 의 전경을 몽환적으로 그려낸 <라라랜드> (2016) 의 감독, 데이미언 셔젤의 작가론적 접근에 있어 더 유효한 방법론이 된다. 셔젤은 신작, <바빌론> (2023)에서 꿈의 도시, 할리우드의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다만, 가능한 한 야만하고, 퇴폐적이며 그럼에도 매혹적인 이야기로 말이다.
<바빌론>은 셔젤의 전작, <라라랜드>와 흡사하게 ‘소년과 소녀의 만남’으로 시작되다. 배우를 꿈꾸는 ‘넬리’ (마고 로비)와 할리우드에서 일할 기회만 엿보고 있는 헬퍼, ‘매니’ (디에고 칼바) 는 스튜디오 사장이 개최한 성대한 파티에서 조우한다. 마약과 섹스, 술과 음악이 넘쳐나는 이 광란의 파티에서 이들의 보잘것 없던 인생이 뒤바뀐다. 넬리는 파티에 있던 제작자로부터 역할을 제안받고, 매니는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 ‘잭 콘래드’ (브래드 피트) 의 눈에 띄어 그의 어시스턴트로 일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하룻밤 사이에 이들은 할리우드로 입성한다.
영화 <바빌론>은 1926년을 배경으로 전개 된다. 할리우드의 역사를 다룬 영화인 만큼 이야기와 캐릭터의 상당 부분이 실제 사건과 인물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영화가 조명하는 1926년은 할리우드 역사에 있어 상징적인 시기다. 영화 산업의 중심인 ‘할리우드’로 전국 각지의 탤런트 (재능을 가진 사람) 들이 몰려오기 시작했고, 메이저 스튜디오 (파라마운트, 20세기 폭스, MGM 등) 를 중심으로 스튜디오 시스템이 만들어지는 시기였으며 이 시스템 (예. 7년 계약)을 통해 스튜디오는 스타들을 합법적(?)으로 착취할 수 있었다. 더욱이 1926년은 최초의 유성영화, <재즈 싱어> (알 졸슨, 1927)의 개봉을 1년 앞둔 시점으로 그 누구도 영화가 ‘목소리’를 갖는다는 것이 어떤 변화를 의미하는 것인지 가늠하지 못했다.
<바빌론>에서는 영화 사운드의 출현이라는 사건이 이야기의 매우 큰 전환점이자 소재가 된다. 따라서 같은 소재를 영화화 한 고전, <사랑은 비를 타고> (진 켈리, 스탠리 도넌, 1954) 의 수 많은 조각들이 영화 전반에 레퍼런스로 등장하는 것은 당위적이라 할수있다. 예컨대 넬리가 세트에서 사운드 영화를 촬영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넬리는 마이크가 설치된 정확한 지점에 착지하지 못하거나 적당한 목소리 톤을 찾지 못해 끊임없이 NG를 내는데, 이 장면은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리나의 목소리를 제대로 녹음하지 못해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리메이크 한 것이다. 실제로 유성영화로 전환이 되고 얼마되지 않아 많은 무성영화 배우들이 자진해서 영화산업을 떠나거나 해고를 당했다.
이외에도 <바빌론>은 영화의 곳곳에서 셔젤이 적지 않은 공부를 했음을 드러낸다.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No Dogs or Actors Allowed” (개와 배우는 사절) 사인이다. 이는 실제로 현재의 할리우드가 위치한 1920년대의 웨스트 LA의 상점들에서 볼 수 있었던 사인이다. 할리우드가 형성되기 전 농업타운이었던 웨스트 LA의 주민들은 “비윤리적이고 음탕한 영화인들”이 그들만의 둥지를 세우는 것에 맹렬히 반대했고 이들에게 ‘배우’는 그야말로 개 만도 못한 직업군이었던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음탕하다’는 이유로 배우들을 보이콧했던 웨스트 LA의 주민들의 시선이 전적으로 부당한것은 아니다. 이는 <바빌론>의 충격적인 오프닝 파티 시퀜스를 볼 때 더더욱 그러하다. 마치 틴토 브라스의 <칼리귤라> (1991)를 떠올리게 하는 이 시퀜스에서 초대받은 ‘영화인’들은 코카인을 얼굴에 뒤집어 쓰고 반라의 상태로 춤을 춘다. 손 한 뼘의 공간도 없이 게스트로 가득 찬 스테이지에는 약에 취해 난교를 벌이는 커플들이 즐비하다. 2층에 있는 한 게스트 룸에서는 거대한 체구의 남자와 미성년자로 보이는 소녀가 밤을 보내는 중인데 소녀는 결국 약물 과다복용으로 기절한다.
게스트룸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무성 코미디의 신화, 로스코 ‘패티’ 아버클이라는 배우의 스캔들을
극화한것이다. 아버클은 1921년, 버지니아 라페라는 여배우를 강간,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한 것으로 재판을 받았다. 아버클 사건은 단순히 한 배우의 악행을 드러내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고 할리우드 전반의 도덕성을 심판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아마도 좀 과하다 싶을 정도의 수위를 보여주는 <바빌론>의 오프닝 파티 시퀜스는 1920년대에 팽배했던 할리우드의 쾌락주의적 관행,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대중의 시선을 집약하는 프롤로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룻밤의 파티에서 인생이 바뀐 넬리와 매니는 각각 할리우드 산업의 중심인물로 성장한다. 넬리는 배우로, 매니는 MGM의 총괄 프로듀서로 말이다. 다만, 이들의 말로(末路)는 <라라랜드>의 동화적인 그것과는 다르다. 넬리는 도박중독으로 마피아에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매니는 넬리를 돕기 위해 동분서주 하면서 성취한 것들을 모두 잃기에 이른다.
화려한 할리우드를 조명하고 있지만 <바빌론>은 극도로 우울하고 히스테리컬한 영화다. 그러나 <바빌론>을 가득 채우는 트럼펫 재즈 스코어처럼 영화는 불안천만한 팔자를 가진 영화인들의 비사 (祕史)를 무엇보다 유쾌하고 화려하게, 신비로우면서도 유혹적으로 그린다. <사랑은 비를 타고>가 유성영화의 전환기에서 살아남지 못한 이들을 향한 연가(戀歌) 같은 것이었다면 <바빌론>은 할리우드를 채우고 기능하게 했던, 혹은 하고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한 사록(史錄) 같은 것이다. 물론 늘 그렇듯, 감탄을 자아내는 저스틴 허위츠의 음악과 함께 말이다.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도, 수백개에 달하는 영화적 레퍼런스도, 누디티가 넘쳐나는 파티 장면들도, 결코 과하지 않은 이유다.
김효정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