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 비 오는 날 물안경 써봤습니까?” <성적표의 김민영>이 포착한 예민하고 아름다운 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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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영화를 보겠다 결심한 순간은 포스터를 본 뒤였다. 영화의 주 소재인 성적을 이렇게 센스 있게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다. <성적표의 김민영>이라는 영화 제목과 개봉 일자 등을 시험 칠 때면 마주했던 OMR 카드에서 적은 것처럼 표현했다. 물론, 이제 더 이상 학창 시절처럼 성적을 받을 일은 없다. 그래도 우리는 누구든, 무엇으로부터든 ‘보이지 않는’ 성적표를 받는다. 그 어떤 형태로든 ‘성적’과 같은 맥락의 결과들을 마주하게 된다. 어떤 시간을 살았느냐에 따라 그에 응당한 미래가 눈앞에 놓이듯.

<성적표의 김민영>은 다가오는 9월 8일 개봉하는, 전주국제영화제·서울국제영화제 대상 수상에 빛나는 영화다. 영화 워크샵에서 처음 만난 이재은, 임지선 감독이 공동 연출을 맡은 첫 연출작이기도 하다. 이재은 감독이 처음 영화를 상상했을 당시는 친구 관계에 고민이 많던, 타지 생활을 하던, 외롭고, 한가한 대학생이었다. 그 경험과 고민들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어떤 형태로든 누구에게나 소외당한 경험이 있을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보다 보면 자신과 주인공 정희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도 있다. 열아홉 살에서 스무 살로 넘어가며 변화를 겪는 세 아이의 모습에서 포착해낸 예민하고도 서툴러서 오히려 아름다운 그 시절은 그 자체로 ‘위로’로 다가온다.


고등학교 친구였던 셋은 졸업 후 각자의 길로 가면서, 화상통화로 ‘삼행시 클럽’을 지속한다.

관계에서 마음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서운함’이라는 감정은, 이럴 때 생긴다. 그 서운함의 크기는, 상대를 좋아하는 마음의 크기이기도 하다. 여기 고등학교 때 기숙사에서 같이 생활하며 절친한 사이였던 정희(김주아 분), 민영(윤서영 분), 수산나(손다현 분)세 명의 아이들이 있다. 졸업 후, 각자 다른 상황에 놓이면서 관계에 분명한 변화가 생긴다. 고작 한 살 차인데 열아홉 살과 스무 살 차이는 크게 느껴진다. 영화 <성적표의 김민영>은 이들이 스무 살이 되고 서로 다른 길을 가면서 관계의 변화와 거기서 느끼는 미묘한 변화를 다룬다. 어떤 극적인 사건은 없지만, 현실적이고 소소한 이야기들이다. 그래서인지 주인공 정희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며, 이 영화가 포착해낸 그 젊음의 찰나를 떠올리게 된다. 특히 이 세 아이가 하는 상상력 넘치는 행동들이 인상적이다. 그래서 당신에게‘<성적표의 김민영>의 아이들 따라잡기’, 해보기를 추천한다. 하다 보면 좀 더 자유로워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 비공식 ‘삼행시 클럽’ 만들기 ✍


수능을 100일 앞둔 비공식 ‘삼행시 클럽’의 멤버들.

티비 예능에서 삼행시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다만, 이 셋이 하는 클럽은 좀 다르다. 무엇보다 삼행시의 내용이 ‘문학적’이다. 이는 이재은 감독이 더 잘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영화는 수능 100일을 앞두고 비공식 삼행시 클럽을 해체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재은 감독은 실제로 이런 삼행시 클럽을 해보고 싶었지만, 주위 친구들이 그 제안을 다들 거절했다고 한다. 이렇게 영화의 캐릭터들이 탄생했고, 삼행시 클럽이 나왔다. 재밌는 포인트다.

이재은 감독은 이 삼행시 클럽에 대해 “‘삼행시 클럽’처럼 조금 이상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즐거운 것들을 같이 나눌, 코드가 잘 맞는 친구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극 중 세 친구에게 남들과는 공유할 수 없는, 정말 ‘우리들끼리의’ 추억을 만들어 주고자 삼행시 클럽을 등장시켰다. 또 정희라는 캐릭터에게 자기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어떤 형식적인 제약을 주고 싶지 않았는데, (삼행시 클럽을) 그런 정희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매개체로 사용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라고 밝혔다.

2. 비오는 날, 수경 쓰고 자전거 타기 ☔😎


비 오는 날 수경을 쓰고 자전거를 타면 수영장 같은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언젠가부터 비 맞는 일이 싫어졌을까. 초등학생 때는 물웅덩이에 물을 첨벙거리는 것만으로 즐거웠고, 거세게 내리는 비가 우산에 닿는 소리가 마치 팝콘 튀겨지는 소리와 비슷해서 재밌다고 생각했다. 그런 낭만을 잊고 있던 것은 아닐까. 정희는 말한다. 비 오는 날 수경을 끼고 자전거를 타면 수영장 같은 기분을 맘껏 느낄 수 있다고.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해보지는 못했다. 정희의 상상력은 종잡을 수 없지만, 뛰어나다. 민영이는 한편으로 정희의 이런 상상력을 부러워한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이런 자유로운 순간도 필요하지 않겠냐고.

3. 알바 붙고 친구에게 전화하기 📞


민영이는 다른 선택으로 외로운 밤을 보내지만 다음 날 일어나서 거북이 밥주고 알바 출근한다. 그렇게 나아간다.

“여기(테니스장) 저녁부터 좀 우울하지 않아? 고립된 것 같고 즐겁지 않아” 테니스장 주인의 아들인 정일(임종민 분)이 정희에게 하는 대사다. 어쩐지 이 대사가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테니스장이라는 장소. 그곳에서 멍때리며 조용히 응시하는 정희. 그 적막한 단조로움 속에서 그가 무얼 꿈꾸는지 궁금했다. 정희는 테니스장 알바에 붙은 날 밤, 아파트 복도에 앉아 민영과 통화한다. 수화기 너머 민영에게서는 시끄러운 술집의 음악 소리가 들린다. 적막한 정희가 서 있는 공간과 대조되면서 또래와 다른 길을 선택한 정희의 외로움이 고조된다. 그와 동시에 민영에 대한 서운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 장면 바로 뒤에는 다음 날, 정희가 아침을 챙겨 먹고 거북이 밥을 준 뒤 테니스장으로 첫 출근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앞의 작은 외로움과 서운함이 특별한 사건이나 낯선 감정이 아닌 자연스러운 것이며, 다시 일상으로 씩씩하게 나아갈 수 있는 회복력. 정희가 단단한 이유다.

4. 제주도 비행기 착륙하고 바로 돌아오는 비행기 타기🛫

상상력이 뛰어난 정희는 제주도로 떠나는 자기만의 소중한 상상에 대해 말한다.

비록 상상이지만, 제주도를 가고 싶은 마음에 없는 돈을 모았다. 유일하게 구할 수 있는 티켓은 제주도에 도착하고 3시간 만에 다시 돌아와야 하는 비행기 편뿐이다. 그래도 가기로 한 네 명. 그런데 비행기가 상공에서 착륙하지 못하고 한참을 떠 있는 바람에 내리자마자 다시 제주를 떠나게 된다. 극 중에선 모일 일 없는 네 명의 인물들이, 정희가 꿈꾸는 세계 안에서는 함께다. 아무렴 어떤가. 비록 공항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지만 돌아오는 비행기 속 모두의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하다.

5. “가끔 미워하고, 늘 좋아했던” 친구에게 성적 매기기📑


서울에 있는 민영이를 만나러 간 정희는 민영이가 자신에게 어떤 사람인지 깊이 생각하게 된다.

청주에서 서울로, 정희가 바리바리 싸 들고 간 같이 할 것들로 가득한 짐. 그 짐의 무게는 애정의 무게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민영은 교수에 학점 정정 메일을 보내느라 무심하다. 이에 정희는 서운함을 느낀다. 결국 정희는 참다못해 민영에 “내가 왜 이런 기분을 느껴야 되는지 모르겠다. 내가 투명인간이야?”라고 말한다. 또, “학점 네가 한 만큼 나온 건데 하루종일 노트북만 보고”라고 말할 때는 왠지 속 시원한 기분도 든다. 그러다 갑자기 민영은 교수를 직접 만나겠다며 집을 떠난다. 그렇게 혼자 민영의 집에 남게 된 정희. 둘이 함께 있을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된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외로움을 갖고 사는 민영. 그의 일기장과 영상들. 그 하룻밤의 일들을 통해서 민영이의 외로움을 이해하게 된다. 친구를 만나러 놀러 갔지만 친구가 없는 공간에 놓이고 나서야 그 친구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 계기를 통해 정희는 민영이 가진 외로움과 불안에 대해 알게 된다. 그렇게 정희는 민영 없는 집을 나서며 성적표 형식의 편지와 추억이 담긴 음식을 남기고 간다.

“앞으로 뭘 하든 그때의 우리 같았으면 좋겠어. 아무도 한심하다고, 덜 절실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해.

그런 의미에서 너에게 F를 줄게. 잘 있다 가. 안녕”

-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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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은 감독은 이 장면에 대해 “처음 영화를 기획할 때부터 친구 간의 관계, 특히 좋아하는 마음의 크기에 관한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친구를 더 좋아한다는 게 어느 순간 부끄럽다는 마음도 들더라. 그런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정희를 통해 상처를 준 친구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마음을 다 표현하는 상황을 그려보고 싶었다. 굉장히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번외: <성적표의 김민영>의 감각적인 포스터


영화 <성적표의 김민영>의 감각적인 포스터는 디자인 스튜디오 ‘빛나는(Bitnaneun)’이 맡았다.

이미 말한 바 있지만, 처음 이 영화를 보겠다 결심한 순간은 포스터를 본 뒤였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좀 식상한 말을 빌려와야겠다. 영화의 주 소재인 성적을 이렇게 센스 있게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싶다. 이 감각적인 포스터는 디자인 스튜디오 ‘빛나는(Bitnaneun)’에서 작업했다. ‘포스터는 그 자체로 한편의 이야기’라는 철학을 가지고 작업을 진행하는 이 스튜디오는 우리가 익숙한 많은 영화 포스터들을 제작해왔다. 처음 <성적표의 김민영>을 보게 된 것은 순전히 포스터 덕이다.


아차, 음악을 까먹었다. 영화의 톤과 어울리는 음악들도 빼놓을 수 없다. 그 중 한 음악이 기억에 남았다. 곡명은 ‘윤지영의 wwwe’. 가사가 묘하게 맞아떨어져서, 왠지 정희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다. “우-우-우린 너무 닮아서, 서로 다른 그 작은 점을 사랑해 넌 날 떠나지 않아 우린 외롭지 않았을 거야”

타인과 나는 다르지만 그 다름을 넘어서서, 누군가를 아끼는 그 마음, 그 기억들이 모여 온전한 한 인간으로 살게 만들 것이다. 다르다는 것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너가 가지고 있다는 것. 그걸 볼 줄 알고 타인을 기꺼이 사랑하는 정희는, 민영이에게 애정 가득 담긴 성적표를 남기고 집으로 돌아간 정희는, 앞으로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외롭다고 한들, 용기 있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 단단한 정희는 이겨내고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민영의 집에 잠시 들렀을 때 떡볶이 사장님이 학생이냐고 묻자 “때를 기다리고 있어요”라고 말하던 정희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렇게 확신한다. 정희는 자신이 기다려마지 않던 ‘때’를 만나고 말 것이다.


허프포스트코리아/ 씨네플레이 기자 김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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