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밀러 감독이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 이후 7년 만에 신작을 내놨다. 100년도 아니고 1000년도 아니고 무려 3000년 동안의 기다림이라니. 제목에서부터 처연하고 지독한 고독이 느껴지지 않는가. ‘램프의 정령 지니’ 이야기를 재해석해 풀어낸 영화 <3000년의 기다림>가 제75회 칸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인 당시 ‘동화 같다’, ‘환상적이다’와 같은 평이 이어졌는데. 핵전쟁으로 멸망한 22세를 배경으로 물과 기름을 차지한 독재자 임모탄 조가 인류를 지배하는 극한의 스토리를 연출한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감독이 갑자기 무슨 동화적 이야기? 싶겠지만 반전으로 조지 밀러 감독은 <꼬마 돼지 베이브>, <해피 피트>와 같은 사랑스럽고 희망 넘치는 작품을 연출한 전적이 있다. <3000년의 기다림>은 지난 5월 열린 제75회 칸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초청되고 호주영화텔리비전예술아카데미상 13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개봉 전부터 많은 기대를 받고 있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감독 ‘조지 밀러’의 동화적 이야기
<3000년의 기다림>은 소설을 원작으로 둔 영화다. 부커상 수상자인 영국 작가 A.S. 바이어트의 단편 소설 ‘나이팅게일의 눈에 비친 딘(The Djinn in the Nightingale’s Eye)’을 90년대 말 처음 접한 조지 밀러 감독이 해당 작품을 영화화하기까지 2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그는 “인생의 모든 신비와 모순이 담긴 이야기”라며 “특정 장르로 규정할 수 없는 독창성을 느꼈고 천일야화처럼 이야기 속에 이야기가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라고 제작 계기를 밝힌 바 있다.
조지 밀러 감독은 긴 세월 동안 자유를 갈망하는 정령 지니의 경험을 보다 생동감 넘치게 보여주기 위해 액자식 구성을 택했다. 3번, 총 3000년의 시간 동안 지니가 병 속에 갇혀 지낸 이야기를 하나하나 개별 챕터로 나눠 신비롭고 고유한 분위기를 충분히 담아냈다. 또한 시바와 혼인하기 위해 솔로몬 왕이 부르는 노래 ‘A Djinn’s Oblivion’ 등 귀가 녹을 듯 환상적인 ost 역시 이 영화의 관전 포인트인데. 그래미상 노미네이트와 플래티넘을 기록한 프로듀서이자 작곡가인 톰 홀켄보그와 조지 밀러 감독이 1년이란 긴 시간 동안 함께 멜로디 작업을 한 끝에 탄생했다고.
*아래 내용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믿고 보는 틸다 스윈튼
국내에선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2013)와 넷플릭스 <옥자>로 잘 알려진 배우 틸다 스윈튼과 <토르> 시리즈의 문지기 헤일담 역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배우 이드리스 엘바의 만남은 많은 영화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3000년의 기다림>에서 틸다 스윈튼은 세상 모든 이야기에 통달한 서사학자 알리테아 역을 맡았다. ‘이야기가 세상을 구한다’는 생각을 가진 알리테아가 학술 강연을 하러 이스탄불에 방문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알리테아는 이스탄불의 한 골동품 가게에서 ‘나이팅게일의 눈’이라 불리는 작고 파란 유리병 하나를 구입한다. 여기까지 보면 ‘설마 그 유리병 안에 지니가?’ 싶을 텐데 설마가 사실이다. 알리테아는 유리병에 켜켜이 쌓인 먼지를 닦아내던 중 굉음과 함께 뚜껑을 열고 나온 거대한 몸집의 정령 지니를 마주하게 된다.
자유의 몸이 되기 위해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줘야만 하는 정령 지니는 알리테아에게 원하는 것을 말하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알리테아는 자신이 아는 한 소원에 관한 이야기는 해피엔딩이 없다며 거부, ‘지니 스토리’가 가진 클리셰를 부순다. 다들 살면서 한 번쯤은 간절히 지니를 만나길 바란 적 있겠지만, 알리테아는 다르다. “내 인생은 이대로 충분하기에 소원은 없다”는 알리테아의 발목을 붙잡고 지니가 “제발, 제발 소원 세 가지를 빌어줘”라고 애타게 매달리는 입장이 된 것. 지니는 완곡한 알리테아를 설득하기 위해 3000년 동안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결국) 자신이 얼마나 외로웠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다.
진중한 ‘램프의 요정’ 지니
<3000년의 기다림>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지니는 지난 2019년 개봉한 영화 <알라딘>에서의 윌 스미스 지니와는 사뭇 다르다. ‘어른들을 위한 알라딘’이라는 평처럼 지니는 성숙하고 진중한 캐릭터로 그려진다. 3000년 전 자신이 사랑한 시바 여왕 때문에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어야 하는 업보를 갖게 된 지니의 끝 모를 여정은 단숨에 우리를 오스만제국으로 초대한다. 지니가 3000년 동안 겪었던 네 가지 사건을 듣던 알리테아는 자신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갈망을 마주하게 되고. 알리테아는 기나긴 이야기 끝에 “우리의 고독이 하나가 되었으면 한다”며 지니에게 자신을 사랑해달라고 부탁한다. 늘 외로움이 따라다닌 삶 속에서 ‘내가 고독하다는 사실’조차 잊고 지내던 알리테아는 소원을 빈 순간부터 정령 지니를 온 마음 다해 사랑한다.
고독과 고독이 만나면 그 끝은 어떨까. 또, 시대를 거슬러 사랑을 택한 두 고독한 존재는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을까. 다행히 <3000년의 기다림>이 택한 엔딩은 냉철한 현실과는 달리 동화 같은 면을 가지고 있다. 이 영화를 두고 ‘동화 같은 스토리’라는 평이 나오는 건 이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조지 밀러 감독은 <3000년의 기다림>에 대해 “극장에서 관객이 마음껏 상상을 펼칠 수 있는 작품”이라며 “이 작품처럼 우화 소설에 기반한 이야기는 일종의 꿈이다. 관객을 꿈속으로 초대하고, 그들이 이야기에 매료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허프포스트코리아/씨네플레이 황남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