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로 일컫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비슷한 설정 아래 제작된 수많은 영화의 무리가 있다면, 바로 ‘빚’을 주제로 하는 영화들이다. 이윤기 감독의 <멋진 하루> (2008)는 희수(전도연)가 전 남친인 병운 (하정우)에게 빌려 줬던 350만원을 받아내기 위해 하루동안 그를 동행하며 측근들로부터 돈을 받아내는 이야기다. 비슷한 플롯을 가진 할리우드 영화의 예는 훨씬 더 많다. 스티브 맥퀸 연출의 <위도우즈> (2018) 는 도둑인 남편, 해리 (리암 니슨) 가 죽기 전에 훔쳤던 시의원 후보의 돈을 2주 안에 대신 갚아야 하는 베로니카 (비올라 데이비스)의 여정을 그린다. 새프디 형제의 <언 컷 잼스> 2020)는 도박으로 빚더미에 앉은 뉴욕의 보석상, 레트너 (아담 샌들러)가 어쩌다 손에 쥐게 된 오팔 원석을 경매에 붙여 빚을 청산하려는 이야기를 다룬다.
빚을 진 사람의 이야기는 왜 흥미로울까? 아마도 (막대한) 빚을 진 사람은 절박하고, 그러기에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혹은 할 것이라는 위험한 의지로 충만한, 말하자면 타이머가 고장 난 시한폭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상황에 놓인 인물은 속이 타 들어가겠지만, 벼랑 끝에 선 캐릭터를 지켜보는 것이 관객으로서는 꽤 흥미진진한 일이다. 왜냐하면 주인공은 빚을 갚기 위해 할 상상도 못할 선택과 예기치 못한 사건들을 벌 일 것이기 때문이다.
곧 개봉을 앞 둔 <썬더버드> (이재원 연출) 역시 빚을 진 남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다. 엄밀히 말하면 ‘남자들’ – 본인의 빚을 갚기 위해 동생에게 빌려준 돈을 받아야 하는 남자, ‘태균’ (서현우)과 형에게 빌린 돈을 포함해 엄청난 채무에 시달리고 있는 ‘태민’ (이명로) – 을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다.
영화의 배경은 정선이다. 돈에 쫓기는 인물들을 그리기에 정선처럼 적절한 도시가 또 있을까. 도시의 거리는 ‘돈’을 갈구하는 사인으로 가득하다. 카드대출, 차 대출 등 돈을 이용해 돈을 버는 각종 영업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거의 모든 상점 마다 붙어있는 ‘콤프’ 라는 사인이다. 주로 식당과 숙박업소에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콤프’란 컴플리멘터리 (complimentary) 즉, 무료라는 영어의 앞 부분만 따 온 ‘정선식’ 표현이다. 콤프는 카지노에서 도박을 하고 쌓을 수 있는 포인트 같은 것인데 이 포인트로 자유이용권처럼 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도박꾼 태민은 빚쟁이에게 시달린다.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이라고는 중고 아우디, 썬더버드 한대 뿐이다. 그 마저도 빚쟁이들은 태민을 흠씬 두들겨 패고 전당포에 잡혀서 현금을 챙겨간 상태다. 태민은 택시운전을 하는 형, 태균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는 저당 잡힌 썬더버드를 찾아주면 차 안에 숨겨 놓은 5천만원으로 빚을 갚겠다고 말한다. 역시 빚쟁이들에게 쫓기고 있던 태균은 태민의 차를 함께 찾으러 가기로 한다.
<썬더버드>는 제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가장 주목 받았던 작품들 중 하나다. 주연을 맡은 서현우 배우가 코리안 판타스틱 배우상을 수상했고, 왓챠가 주목한 장편상을 차지하면서 2관왕을 기록한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는 정선 사북읍의 전당포에 맡겨진 차들이 길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실제 신문기사에 나온 내용을 모티브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마이크 피기스, 1996)가 그랬듯이, <썬더버드>의 중추는 ‘정선’이라는 공간이다. 카메라가 비추는 이 도시는 돈의 재해로 폐허가 된 사지 (死地)와 다를 바 없다. 밤 거리를 가득 채운 네온 사인은 문명의 토사물처럼 추하고 어지럽기 짝이 없으며 그 사이를 느릿느릿 횡보하는 사람들에는 생기를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은 모두 도박으로 잠식당했거나, 아니면 그럴 맞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태균과 태민 형제도 마찬가지다. 태균은 코인으로, 태민은 갖가지 도박으로 누군가에게 쫓기거나 쫓는 일상을 보낸다. 태민의 여자친구인 딜러 출신의 ‘미영’ (이 설) 역시 벼랑 끝의 인생이라는 점에서는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녀는 도박을 끝내고 나오는 손님들의 ‘콤프’를 깡해주는 일로 불안한 일상을 이어 나간다.
비참하고 비루하기 이를 데 없지만, 이 세 명에게 ‘썬더버드’ 속 5천만원은 당장의 위기는 넘기게 해 줄 동앗줄 같은 것이다. 물론 전당포에 잡힌 차를 찾기 위해서는 500만원이 필요하고 당장 그 돈을 구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하룻밤 동안 이들은 수많은 사건과 수많은 인물들을 조우하고, 파괴하며, 가까스로 돈을 구한다.
90분의 러닝타임을 가진 <썬더버드>는 그만큼 짧게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의 페이스가 빠르지만 그럼에도 오랜 시간동안 영화 속에 ‘갇혀있다’고 느껴지는데 이는 영화가 보여주는 사건들의 점도 때문이다. 예컨대 태민과 태균이 차를 찾기 위해 만나는 순간부터 시작해 영화는 사건과 텐션에 있어서 단 한순간도 틈을 내놓지 않는다. 하나의 사건 뒤에는 또 다른 사건이, 그 사건의 말미에는 새로운 인물이, 인물은 또 하나의 사건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 시킨다. 영화는 500만원이라는 돈이 새삼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다양한 사건과 인물을 구성해서 인물들, 특히 태균을 그의 목표에 안착 시키는 듯 하지만, 사실 그가 당도한 것은 이 모든 사건의 원점이다.
이 지난한 과정을 ‘갇힌 듯’ 지켜보는 일은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캐릭터가 분명한 세 인물이지만 사건의 텐션이 증폭하면서 이들 캐릭터의 스펙트럼도 다양하게 변모한다. 특히 서현우 배우가 연기하는 태균은 영화가 나열하는 사건들 만큼이나 예측과 감안이 불가능한 인물이다. 관객이 머릿 속에 그려 놓은 프로필을 보기 좋게 배신(?)하는 태균을 목도하는 것, 아울러 그 인물의 에너지를 서사에 맞추어 조율해 내는 서현우 배우를 마주하는 것은 정말로 짜릿한 영화적 경험이었다.
한도 끝도 없이 우울한 영화인듯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썬더버드>는 돈으로 영혼이 털려 본 모든 이들을 위한 영화다. 모든 것이 괜찮다고 위로를 하진 않지만, 돈과 빚에 목숨을 거는 것, 혹은 버리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역설적이게도, 명료하지만 시 적인 언어로 그린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돈과 죽음, 그리고 절망과 의지가 공생하는 도시, ‘정선’과 닮았다.
김효정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