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쪽과 저쪽. 동과 서. 흑과 백. 낮과 밤. 동지와 적. 이분법의 논리가 가장 잘 통하는 장르 두 가지를 꼽자면, 전쟁물과 첩보물이다. 전쟁은 포탄과 폭발로 적을 분간하기 쉽지만, 스파이의 소리 없는 밑바닥의 암투는 쉬이 분간하기 어렵다. 낮에는 같은 공간 아래서 모두가 한마음 한뜻을 품은 듯싶지만, 밤에는 어두운 뒷골목에서 다른 이와 만나 등 뒤에 칼을 꽂을 궁리를 할 지 모른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된다는 말은 스파이의 세계에 가장 잘 어울리는 문구다. 하지만, 신뢰가 독이 되는 것처럼, 불신도 독이 된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순간이 지니는 딜레마다.
이미 <독전 (2018)>을 통해 불신의 딜레마를 다루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이해영 감독의 신작이 돌아왔다. 그의 신작 <유령 (2023)>은 조선 총독부 내에 항일 조직인 ‘흑색단’의 스파이인 ‘유령’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다룬다. 2014년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을 통해 이미 일제 강점기 시절을 다룬 바 있는 이해영 감독이 비슷한 역사적 배경 위에 스파이를 소재로 삼았다는 점이 화제를 모았다. 2023년 첫 대작이 될 <유령>은 설경구, 이하늬, 박해수, 박소담 등 검증된 연기력을 지닌 충무로 스타가 대거 출연하며 많은 이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1월 18일 개봉 예정인 <유령>을 관람하기 전, 세계 각국의 스파이물을 미리 복습해보는 것은 어떨까? 영국, 독일, 일본, 중국 등 먼 나라, 이웃 나라의 첩보물은 어떤지 살펴보며 <유령>의 개봉을 기다려보자!
영국 –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dir. 토마슨 알프레드슨
이념 전쟁이 한창이었던 냉전 시기, 영국 정보국 ‘서커스’에 소련 KGB와 내통하는 두더지 (스파이)가 존재한다는 제보가 들어온다. 비밀리에 ‘서커스’의 현장 요원을 헝가리로 파견해 두더지의 정체를 파악하려 했지만, 역으로 소련의 공작에 당해 비밀 작전이 만천하에 공개되고 만다. 1년 후, 사건의 실패 때문에 은퇴한 고위 정보관 조지 스마일리 (게리 올드만 분)은 다시 ‘두더지’를 색출하는 작전을 시작한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2011)>은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냉전 시대 특유의 은어와 정세가 담겨 정보값이 많이 필요한 영화인 점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2000년대 이후 등장한 첩보 영화의 바이블이다. 우선, 영국 첩보 소설의 제왕 존 르카레의 대표작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을 원작으로 삼아 탄탄한 서사 구조를 갖췄다. 캐스팅 라인업도 입이 떡 벌어지는데, 게리 올드먼, 톰 하디, 콜린 퍼스, 마크 스트롱, 베네딕트 컴버배치, 존 허트 경까지 영국의 대배우를 모두 한자리에 모았다. 심지어, <렛미인 (2008)>의 아름답게 서늘한 이미지로 전 세계의 극찬을 받은 토마스 알프레드슨이 감독을 맡았으니 심미적인 프레임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연기 – 이미지 – 스토리 세 요소가 탁월하게 맞물려 엄청난 시너지를 낸다. 어리숙한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덤이다!
독일 – <모스트 원티드 맨> dir. 안톤 코르빈
이번 작품 역시 존 르카레의 장편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바로 모두가 사랑했던 배우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유작 <모스트 원티드 맨 (2014)>이다. 이 영화를 이끄는 힘은 단연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지만, 다른 배우들의 호연도 빛이 나는 작품이다. 윌렘 데포, 레이첼 맥아담스 같은 할리우드 스타와 독일의 국민 배우 니나 호스가 동시에 스크린 위에 등장한다. 특히, 윌렘 데포와 레이첼 맥아담스처럼 개성 있는 배우들이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연기가 지닌 힘과 한바탕 싸움을 벌이는 구도는 <모스트 원티드 맨>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스파이 영화답게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연기한 독일 정보부 비밀조직의 수장인 군터 바흐만은 시종일관 담배를 피워대고, 입에 술을 달고 산다. 매 순간 상대편을 교란시켜 목표물을 제거해야 하는 심리적 중압감을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스트 원티드 맨>은 직접적으로 ‘속이는 자’의 위치에 놓인 스파이의 영화는 아니다. 물론,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나 <유령>처럼 스파이의 정체를 밝히는 데 집중하는 영화도 아니다. 이 작품은 컨트롤 타워의 위치에서 체스판 위에 정보원이라는 말을 두는 데 몰두한다. 그래서 총성 하나 없이도 숨 막히는 전쟁이 일어나는 느낌을 준다. 스파이물의 매력은 계략 싸움이라는 점에서 첩보물 팬들의 흥미를, 명배우의 마지막 인사를 맞이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팬들의 감정을 모두 충족시킬 영화임에 틀림없다.
중국 – <색, 계> dir. 이안
<헤어질 결심 (2022)>의 탕웨이와 최근 부산에 내한한 홍콩의 대스타 양조위의 조합. <색, 계 (2007)>는 탕웨이가 세계적인 인지도를 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작품이었다. <브로크백 마운틴 (2005)>으로 이미 한 차례 베니스 영화제 황금 사자상을 거머쥔 대만의 거장 이안 감독이 2년 만에 다시 황금 사자상을 손에 들게 된 작품이기도 하다. 명성과 별개로 <색, 계>는 중국에서 상영을 금지할 정도로 자국 내 큰 논란을 일으켰다. 탕웨이 또한 <색, 계>의 여파로 4년간 중국에서 활동 제한 조치를 받았다. 바로 <색, 계>의 파격적인 내용과 정사 장면 때문이었다. <색, 계>의 줄거리는 친일 중국 관리 ‘이’ (양조위 분)을 암살하기 위해 ‘막 부인’으로 신분을 위장한 왕치아즈 (탕웨이 분)은 그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는 이야기다.
중국 내의 비판과 달리 <색, 계>는 그저 파격적인 소재에 기대는 영화가 전혀 아니다. 이의 눈을 마주하고 흔들리는 가슴을 이게 된 막 부인의 멜로 드라마와 항일을 위해 신분을 감춘 왕치아즈의 스파이 행위는 각기 ‘색’과 ‘계’로 표현할 수 있다. 첩보물과 멜로 드라마. <색, 계>는 두 장르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팽팽히 영화를 잡아당긴다. 함께 할 수 없는 두 장르의 공존이 어떤 첩보물에서도 느낄 수 없는 다른 종류의 긴장감을 자아낸다. 스파이가 주로 활동하던 시기는 전체주의의 그림자가 머물던 때다. 대의로서의 ‘계’와 인간으로서의 ‘색’이 양립할 수 없다고 느끼던 시기, 그 혼란의 감정을 <색, 계>는 세밀하게 그려낸다.
일본 – <스파이의 아내> dir. 구로사와 기요시
일본의 거장 구로사와 기요시의 최근작 <스파이의 아내 (2020)>는 여러모로 독특하다. 구로사와 기요시가 처음으로 제작한 시대극이며, 더군다나 여태껏 한 번도 다루지 않은 첩보물이다. 이제는 일본의 떠오르는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가 각본으로 참여했다. 방송 채널 NHK의 제작 지원을 받아 TV 영화로 제작된 작품을 다시 극장용으로 바꾼 영화기도 하다. 동아시아의 ‘스파이물’ 특성상 앞서 언급한 <색, 계>와 <유령>과 유사한 시대 배경인 1930-40년대 일본 제국주의 시대를 다룬다. 일본에서 만든 태평양 전쟁 시대에 관한 영화지만, 일본의 전쟁 범죄를 제대로 직시하고 있는 영화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고베의 무역상 유사쿠 (타카하시 잇세이 분)가 사업차 만주국으로 향한 뒤 그곳에서 자행된 일본의 전쟁 범죄를 보고 스파이로 전향한다는 내용은 <스파이의 아내>의 ‘스파이’에 해당한다. 반대로 남편의 첩보 행각으로 인해 아내 사토코 (아오이 유우 분)의 사랑하는 이에 대한 감정과 평화로웠던 일상의 동요는 ‘아내’에 해당한다. 따라서, <스파이의 아내>는 첩보물이면서 동시에 통속극이기도 하다. 또한, 자국의 전쟁 범죄에 대한 비판이 담긴 역사물로 볼 수도 있다. 첩보, 역사, 멜로 드라마가 정교하게 교차하는 <스파이의 아내>는 어느 방향에서 이 영화를 읽는지에 따라 매번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