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어린 시절의 추억은 흐릿한 동시에 생생하게 다가온다. 너무나도 익숙하지만 동시에 한없이 생경하고, 낭만으로 가득 차 있다가도 금세 가슴 한편이 시큰해지고 만다. 그래서인지, ‘유년기의 기억’과 그 시절에 대한 노스텔지어는 줄곧 창작자들에게 가장 흥미로운 소재가 된다. 예술의 분야를 가릴 것 없이 자신의 지나간 세월에 대한 짙은 향수와 회고는 자전적인 작품에 주된 소재인 만큼, 영화에서도 자신의 유년기를 담은 작품은 꽤 익숙한 편이다.
이번 11월 23일, 국내에 개봉한 미국의 떠오르는 거장 제임스 그레이의 신작 <아마겟돈 타임> 역시 자신이 유년기를 보내온 1980년대의 뉴욕에 대한 자전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아마겟돈 타임>의 개봉 소식에 맞추어 되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의 열병을 담은 여러 영화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이 글을 읽고 난다면 당신도 졸업 앨범의 한 페이지를 넘겨보고 있지 않을까?
<미나리> Dir. 정이삭
<미나리>의 순자역을 맡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거머쥔 윤여정은 처음 <미나리>의 대본을 읽고 제작자에게 전화를 걸어 이 작품이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냐고 물어봤다. 그 정도로 <미나리>는 많은 부분 감독 정이삭의 유년기를 대변하고 있는 영화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80년대 아칸소 주의 한국인 이민자 가족이 농장을 가꾼다는 이야기는 실제로 그와 그의 부모에 대한 것이다. 아버지 역할로 나온 제이콥 (스티븐 연 분)의 직업인 병아리 감별사도 감독의 아버지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미나리>에 등장하는 공포스러운 토네이도 역시 그가 직접 겪었던 일이고, 순자가 개울가에서 키우던 미나리 역시 그의 할머니가 실제로 함께 살며 키웠던 일로부터 비롯된 에피소드다.
<미나리>의 자전적인 면모는 인물들이 겪게 되는 감정의 진정성에서 더 확연하게 드러난다. 1세대 이민자인 부모는 자신의 뿌리인 한국을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고춧가루를 맛보고 기뻐하거나, 한국 농작물로 사업을 벌이려는 그들의 행동에는 지극히 ‘한국적임’이 서려 있다. 다만, 그들은 최선을 다해 타지에 그 뿌리를 내려보고자 하는 것이다. 반대로 2세대 이민자인 데이비드와 지영은 두 집단 사이 그 어디에도 끼어있지 못한다. 전형적인 미국 할머니와 다른 순자를 보며 한없는 낯섫을 느끼고, 교회에서는 외모 때문에 그 어디에도 없는 외계어를 들어야만 했다. 분명 나고 자란 곳은 지금 이 땅임에도, 누구도 자신을 미국인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괴리. 그 세밀한 낯섦의 세계를 구현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직접 겪어본 사람일 뿐이다. <미나리>는 어쩌면 정이삭의 세대만이 작성할 수 있는 감정의 회고록이다.
<로마> Dir. 알폰소 쿠아론
<칠드론 오브 맨>, <그래비티>로 거장의 반열에 오른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는 제작 당시부터 그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아낸 작품으로 많은 화제를 모았었다. 영화의 제목 <로마>는 이탈리아의 수도가 아닌 멕시코시티 근교에 있는 동명의 지명이다. 알폰소 쿠아론은 3년간 멕시코의 로마에서 그의 유년기를 보냈었다. 알폰소 쿠아론의 자전적인 기억을 기반으로 만든 <로마>의 주인공은 역설적으로 그가 아닌 그를 키워낸 가사도우미 ‘클레오 (얄리차 아파리시오 분)다. 실제로 알폰소 쿠아론의 아기 때부터 그를 키워냈던 보모 ‘리보리아 로드리게즈’를 모델로 삼은 캐릭터가 주인공 클레오다. 그는 왜 자전적인 이야기를 자신이 아닌 타인을 통해 표현해냈을까?
<로마>의 인물들은 두 부류로 나눠진다. 가사노동의 반복적 일상을 살아가는 여성들과 그 자장 아래에서 안온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아이들이 한 편에 있다면, 맞은 편에는 외도와 바람 그리고 정치적 시류에 휩쓸려 가정이란 공간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 성인 남성들이 있다. 가정 밖에서는 멕시코의 혼란스러운 정국으로 매일 누군가가 죽어 나가고 사라져간다. 끊임없는 외부 세계의 공포로부터 아이들을 지켜낸 것은 클레오와 같은 여성들이었다. 알폰소 쿠아론이 그녀를 두고 ‘가장 사랑하는 가까운 이’라고 칭한 이유는, 아마 무사히 그 혼란스러운 시대를 겪어낼 수 있게 만든 유일한 버팀목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알폰소 쿠아론의<로마>는 위대한 존재에 대한 찬사가 곧 자신의 무탈한 유년에 대한 회고라는 점을 깨달은 새로운 방식의 자전적인 영화다.
<미드 90> Dir. 조나 힐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사고뭉치 도니와 <머니볼>의 너드미 넘치는 피터 브랜드 역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할리우드 대표 조연 조나 힐의 감독 데뷔작 <미드 90>. 사실 이 기사를 발행하는 11월보다는 무더운 7월의 어느 날에 보아야 적합할 정도로 때깔 좋은 여름 영화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90년대의 LA는 83년생 조나 힐이 실제로 나고 자랐던 곳이다. 뜨거운 햇살이 1년 내내 지면을 달구는 천사의 도시에서 조나 힐은 힙합 음악을 들으며 스케이트보드를 탔던 그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미드 90>를 제작했다고 밝혔다. 그의 연기만큼이나 밝은 톤을 유지하는 <미드 90>은 한마디로 한여름밤의 얼음 가득 넣은 콜라처럼 쿨한 영화다.
우탱 클랜의 정신적 지주 GZA의 1995년 앨범 Liquid Swords가 흘러나오는 장면 만으로도 조나 힐의 유년기가 부러워지기 시작할 것이다. 그가 영위했던 문화적 자산이 풍요했던 90년대의 LA는 겉으로 보기 화려해 보인다. 스티비 (서니 설직 분)가 해 질 무렵 도로 한가운데를 가로 지르는 장면은 노스텔지아를 자극하기도 한다. 하지만, 스티비와 그의 주변 삶은 마냥 화려하지 않다. 음주와 흡연, 약물과 섹스라는 터널을 지나와야만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스케이트 문화의 일원이 될 것이라는 형들의 압박이 어린 스티비의 삶을 자꾸 넘어지게 만든다. 쿨 해보이는 문화를 위해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해야만 하는 과정. 선망하는 집단에 동화되기 위한 발버둥은 스티비의 삶을 너무 세게 부딪히게 만든다. 풍요로운 시대에 대한 그리움과 동시에 위험천만했던 그때의 나에 대한 연민 어린 시선이 담긴 조나 힐의 <미드 90>은 지극히 자전적인 이야기임에도 보편의 성장통을 떠올리게 한다.
<아마겟돈 타임> Dir. 제임스 그레이
<미드 90>이 90년대의 LA에 대한 향수를 짙게 풍겼다면, <아마겟돈 타임>은 80년대 뉴욕에 대한 불안함을 가득 담은 영화다. 일찌감치 자신의 자전적인 작품을 꼭 만들어보고 싶다고 공언했던 미국의 떠오르는 거장 제임스 그레이는 드디어 자신의 8번째 장편 영화로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을 수 있게 되었다. <미드 90>이 우탱 클랜과 빅엘,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로 가득한 영화였다면, <아마겟돈 타임>은 슈가힐 갱과 커티스 블로, 비틀스, 그리고 영화의 제목 <아마겟돈 타임>을 부른 더 클래쉬로 가득 찬 영화다. 모하메디 알리가 여전히 링 위에서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고, 로널드 레이건의 당선에 우경화된 미국에 대한 우려를 표하며, 이미 끝난 아폴로 계획은 NASA가 나눠준 스티커 패치로만 남아있는 시대. 1980년대의 뉴욕은 화려한 구겐하임 미술관의 내부 구조처럼 복잡하게 모든 것이 뒤섞인 나선형의 시대였다.
<아마겟돈 타임>은 단순히 그 시절을 추억하는 부류의 영화가 아니다. 차라리 감독 본인이 겪어왔던 보다 세밀한 층위의 차별을 직면하는 영화다. 흑인 친구 조니 (제일린 웹 분)은 선생님과 경찰관 모두에게 그의 인종 때문에 차별을 받는다. 이민자 출신인 폴 (마이클 뱅크스 레페타 분)은 공립학교에선 좋은 대우를 받지만, 사립학교에선 인종 너머의 경제적 계급이 또 다른 차별의 층위를 만든다. 유색인종에 대한 선입관으로 가득 찬 백인의 무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또 다른 차별을 자행해야 했고, 살아남기 위해 세계 밖으로 다른 층위의 존재를 밀어내야 했다. 예술가가 되길 원하는 자신을 부모님은 이해하지 못하는 그 모습도 사실 이민자로서 무시당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남을 밀어내고, 나를 숨겨야 하는 소년은 끝내 나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을까? <아마겟돈 타임>이 그려내는 그 시절의 차별적 세계가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이 든다.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