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2세 서거가 이렇게 호들갑 떨 일인가요? 피비린내 나는 원죄 <맛 킬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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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한 영국 엘리자베스 2세 (뉴스1)

얼마 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언론에는 부유하지만 검소했고 과거 식민지 국가들을 원만하게 아울러 대중들에게 인기가 좋았다는 찬사부터, 즐겨 마시던 술이 사망을 계기로 전 세계에서 매진 행렬을 보이고 있다는 기사까지 그를 기념하고 받들며 추모하는 크고 작은 이야기들로 넘쳐났다.

조선의 마지막 황손이라는 것이 차라리 농담으로 소비되는, 상징으로 왕실조차 없어진 대한민국에 사는 나로서는 왕실 무용론을 잠재우고 21세기에도 군주제를 유지시켰다는 그녀를 둘러싼 평가에 ‘아, 그런가요?’라는 콧방귀만 나올 뿐이었다.

영국 왕실이 가지는 상징성과 소프트파워를 무시하는 외교 무지렁이라 비판받아도 좋다. 왕실 지지율이 30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하고, 연간 납세액으로 조성되는 ‘왕실 교부금’에 대한 영국 내 비판이 날로 더해지는 지금, 나까지 나서서 강건했던 왕실의 상징이 위태로운 상징으로 대체되는 것을 애석해하며 떠나간 여왕을 그리워해야 할 필요는 없으므로.

서거와 관련된 온갖 호들갑을 지켜보며 오히려 의아했던 것은, 식민지의 피눈물로 부를 쌓고 호의호식한 국가의 왕이 떠나는 모습에서 과거 반성이나 당시를 되새겨보자는 기사나 칼럼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엘리자베스 2세에게 희미한 호감이 있다면 그것은 웰시코기, 닥스훈트 등 평생 30여 마리의 개를 키운 애견인으로의 면모 때문일 것이다. (1973년 여왕과 그의 강아지들)

말레이시아 영화 <맛 킬라우(Mat Kilau: The Rise of a Warrior)>가 보여주는 원주민에 대한 잔학한 행위와 더불어 문화재 약탈, 경제적 수탈, 노예제, 억압 통치, 상징적인 만행들 예컨대 식민지 독립투사들의 시신을 훼손해 머리를 전리품으로 가져간 사건 등은 추도 열기 사이에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다.

혹자는 왕실이라는 것은 실질적 권한이 없고 단지 식민지 유산을 물려받았을 뿐이라고 방어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 전 세계가 들썩거리는 모습이 오히려 그 영향력을 더욱 방증할 뿐이고, 부정한다고 유산의 달콤함을 만끽한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맛 킬라우> 영화 포스터에 식민 본국의 국기를 활활 태우는 담대함. 시대는 이렇게 변하고 있다.

영화 <맛 킬라우>는 말레이시아 실존 인물 ‘맛 킬라우’의 사진과 생몰 연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삶에 영감을 받았을 뿐 인물과 사건 모두 영화적 허구임을 강조하면서 시작된다. 단지 영화적 허구라고 하기에는 보는 내내 말레이시아의 역사 속 인물들이 여럿 등장하므로 고증 논란 등을 피하기 위한 배경 설명이라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도입부는 올해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은 인도 영화 <RRR:라이즈 로어 리볼트>(이하 RRR)을 떠올리게도 만든다. 잔인무도한 식민 본국의 행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주인공이 샌들을 신고 숲속을 바람같이 날며 장애물을 피하고 무예를 겨루는 모습이 거의 RRR의 재편이다. 영화에 나오는 장면 장면을 물리학적으로 분석한 과학 팟캐스트가 등장할 만큼 이름난 RRR을 맛 킬라우가 넘어설 수 있을까?

식민지란 단지 경제적 수탈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역사를 통해 만들고 향유하던 주체성과 문화, 종교, 가치를 송두리째 파괴한다.

이야기는 식민지 시절 말레이반도의 파항 투쟁을 배경으로 한다. 영국은 말레이반도를 침탈해 원주민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고 토지와 생산된 농수산물을 빼앗는다. 광물 채취권을 독점하고 저항하는 이들을 잡아다 강제로 노역을 시켜 엄청난 이득을 취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폭력과 제국의 끝없는 야욕뿐이다. 맛 킬라우(아디 푸트라)와 그의 동료들은 영국의 식민지 정부에 대항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난다.

일제 식민지 시절을 떠올려보자.

적극적으로 앞잡이 역할을 하는 사람, 납득하거나 순응하거나 포기하는 사람, 저항하는 사람

맛 킬라우의 동료 ‘와히드’의 아내는 임신한 몸으로 봉기를 주도하려는 남편을 말린다. 태어날 아기를 생각해 보라고,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라고. 일제강점기에 독립을 위해 싸우던 운동가들의 고뇌가 절절히 느껴지는 것은 나뿐일까. 가족이 먼저인가 조국과 민족이 먼저인가.

독립을 위해 싸우던 투사들의 가족들은 얼마나 커다란 고통을 감내했고 그 자손들은 얼마나 더 고난의 삶을 살아야 하는가. 과거사를 청산하지 못한 나라에는 값비싼 계산서가 여전히 날아온다.

기실 앞뒤가 따로 떨어진 별개의 과제는 아니다. 가까이에서 가족을 지킨들 주권을 잃으면 식민지 이등 국민으로 고통을 겪을 것이고, 조국을 되찾은들 내 가족을 건사하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문제는 둘 다 취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앞장서서 목숨을 걸고 싸운 독립투사들이 얻어낸 과실을 그들이 보필하지 못한 가족과 자손이 아닌 반역자와 앞잡이들이 가장 먼저 또 가장 많이 따먹고 있는 현실은 암울하기 짝이 없다.

식민지 본국인 영국의 탐욕.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표현은 찬란하다기 보다 수치스럽다고 해야지 않을까.

이 기시감은 무엇? 삽살개 털 가죽까지 수탈했으면서 공장 짓고 철길을 깔아 개발해 주었다고 큰소리치는 이들이 떠오른다. 바보야!! 문제는 외형이 아니야!!

사람들은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다양한 방식으로 산다. 근래에 들어와서는 극단적 상대주의로 완전히 모순되거나 상반되는 의견에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식의 ‘납작’한 결론을 내리는 상황을 왕왕 목격한다.

비판이 차단된 상태로 각자 생각으로 서로 옳다 하고 또 각자 옳은 것으로 ‘퉁치는’ 결론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허공에 떠돌기 일쑤고, ‘다양성’이라는 허울을 두른 논쟁은 수렴되거나 정리되는 것 없이 날카로움을 상실하고 그저 피로를 부른다. 물러서지 않으면, 꼰대가 되는 것은 덤이다.

식민지 근대화론 같은 주장이 그런 피로에 숟가락을 크게 얹는다. 식민지 덕분에 사회기반시설이 확충되고 공장과 광산이 건설되고 농지 개량과 농업 개량으로 농업 생산성이 올라가고 상하수도 시설이 보급되고 결국 식민지가 개발되어 발전되었으니 득도 많지 않았냐는 논의들.

작가 김영하가 말했듯이 인권은 동의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수치만 놓고 봤을 때 그 어떤 발전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사람들의 목숨, 문화, 자존감을 대가로 삼은 발전이라면 우리는 확고하게 잘못됐다 말해야 한다. 식민 지배, 노예제, 전쟁, 학살 같은 끔찍한 과거를 온몸으로 겪은 사람들이 모여 각종 결의안을 채택하고 반성하며 평화를 위한 공동의 노력에 합의한 것이니, 과오는 깔끔하게 인정하고 합의한 것은 닥치고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도 있는 것이다.

이런 합의는 진공상태에서 잉태된 성자가 아니라, 핏빛 역사와 지난한 논의 끝에 세상에 나온 생명이기에 논쟁할 권리보다 그것을 잘 돌보고 길러야 할 의무가 앞선다.

실존 인물인 맛 킬라우(Mat Kilau). 항쟁 이후 60여 년 간 신분을 숨기고 살다가 1969년 대중 앞에 등장하고 곧 8개월 뒤 사망한다. 식민지 시대 투사는 그렇게 마지막까지 극적인 삶을 살았다.

영화적 상상력과 그에 따른 과장 또는 축소가 있다 해도 피억압자의 저항을 그린 영화는 언제 봐도 뿌듯하다. 세월이 흘러 식민지 국가는 해방을 맞이하고 이제 과거를 영화로 그려냄으로써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다시금 거악巨惡에 대한 투쟁의 소중함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 <맛 킬라우>가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에 경도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잡아 늘린 용수철을 놓았을 때 반대로 튀어 나갔다가 되돌아옴을 반복해 제자리를 찾고 안정되는 것처럼 식민주의를 벗어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민족주의가 발흥하고 이후에는 두 양극의 적당한 곳에서 더 합리적이고 적합한 정치, 사상적 이념과 시스템이 정착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다른 버전의 <맛 킬라우>를 언젠가 만나 볼 수 있을 것이고. 영화 <맛 킬라우>는 현재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문화기획자 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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