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블랙 스완(2010)>은 백조에서 흑조로 변해야만 하는 니나(나탈리 포트만)의 불안한 모습을 스타일리시하게 표현한 심리 드라마이다. 전체 내러티브가 니나의 백조에서 흑조로의 캐릭터 트랜스 포메이션(캐릭터 변환)에 방점이 찍혀있다는 면에서 <블랙 스완>의 영화적 순간은 온전히 캐릭터에 의해 창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나탈리 포트만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가능케 한 니나 캐릭터는 프로타고니스트(추진자)와 앤타고니스트(제어자)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을 벗어나 있다. 니나는 한 캐릭터 안에 프로타고니스트와 앤타고니스트를 양수겸장하는 이른바 햄릿형 캐릭터이다. 즉, 스스로 스토리를 추진하기도 하고, 막아서기도 하는 자아분열형 캐릭터가 극을 지배한다. 결국, 이러한 니나 캐릭터의 변화와 표현이야말로 <블랙 스완>의 영화적 순간 창출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블랙 스완, 몸을 버리고 영혼을 택하다!
<레퀴엠(2000)>, <더 레슬러(2008)>, <마더!(2017)>등 다양한 주제의 작품에 탁월한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한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작품세계를 살펴보면 전체 필모를 관통하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강렬한 캐릭터가 영화 전체를 견인한다는 점이다. <레퀴엠>에서 마약 딜러 해리(자레드 레토)는 마약에 중독되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치명적인 캐릭터를 선보이고, <더 레슬러>의 전직 레슬러 로빈슨(미키 루크)은 늘 링을 꿈꾸지만 밑바닥까지 망가져 만 가는 현실에 몸부림치는 캐릭터이다. 그래서 로빈슨의 포효와 흐느낌은 관객들의 진한 연민을 자아내게 만든다. 사이코 심리 드라마 <마더!>의 마더(제니퍼 로렌스)도 마찬가지이다. 한정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네 명의 캐릭터들의 기행과 암투를 꿰뚫어보는 마더는 전지전능한 신에 버금가는 기상천외한 캐릭터이다. <블랙 스완>도 감독의 여타 작품과 마찬가지이다. 아니 여타 작품 보다 한발 더 나아가 캐릭터가 곧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캐릭터들의 관계는 니나로 수렴되고, 서사도 니나의 일거수일투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감독은 이러한 ‘니나 월드’ 를 구현하기 위해 <블랙 스완>에서 몇 가지 주된 연출 양식을 채택하고 있다. 암조, 핸드헬드, 그리고 클로즈업이 바로 그것이다. 감독은 이를 통해 어둡고 자아분열적인 니나 캐릭터를 생동감 있게 구현하고 있다. 영화 전반에 쓰인 조명 양식인 암조(low key)는 불안하고 금세 부서질 것 같은 니나의 내면을 포착하는데 제격이다. 시종 어두운 영화의 무드는 니나의 불안한 표정을 포착한 클로즈업과 상승작용을 통해 호러 심리극의 이미지를 극대화한다. 극이 클라이맥스로 접어들면 니나의 표정은 신체의 고통, 혹은 훼손을 통해 심화된다. 몸에 멍이 들기도 하고, 피가 나기도 하고, 발목이 부러진다. 이러한 하드코어 장면은 암조를 바탕으로 시종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 그리고 니나의 표정을 극대화하는 클로즈업에 힘입어 현실과 판타지를 수시로 오가며 몽환적이면서도 박진감 넘치게 연출되었다.
사진 1은 이러한 판타지 씬의 대표적인 장면이다. 니나의 신체변형이 드라마틱 하게 표현되었다. 첫 공연을 앞둔 니나가 흑조로 변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모습을 니나의 등에 불쑥 자라난 검은 털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니나는 극도의 고통에 시달리며 검은 털을 등에서 겨우 뽑아낸다. 헝클어진 머리칼과 충혈된 눈, 그리고 손에 집어 든 검은 털의 클로즈업과 끊임없이 흔들리는 핸드헬드, 그리고 극도의 어두운 조명은 니나의 강박과 고통을 극대화하는 미장센 요소이다.
사진 2~4는 이미 공연이 시작되고, 뒤늦게 극장에 도착한 니나가 분장실에서 라이벌 릴리(밀라 쿠니스)와 싸우는 장면이다. 이 분장실 씬에서도 암조, 핸드헬드, 그리고 클로즈업이 상승작용을 이루며 주된 연출 양식으로 이 씬을 표현하고 있다. 자신의 역할을 릴리에게 뺏겼다고 생각한 니나는 릴리의 목을 조르다, 깨진 유리 조각으로 찔러 죽인다. 니나와 릴리의 잔혹한 대결을 형상화한 사진 2의 풀 쇼트가 끝나면, 이어지는 클로즈업은 니나의 자아분열이 극대화한 쇼트이다. 니나와 릴리를 교차하며 잡아주던 클로즈업이 니나와 니나의 교차 클로즈업으로 바뀌는 순간, 니나는 자신의 어두운 심연을 들여다본다. 자신을 희생해야만 새로운 자아를 얻게 되는 딜레마의 표현인 것이다. 릴리의 목을 조르던 중 니나는 깜짝 놀라게 되고, 릴리가 자신으로 바뀌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릴리를 죽이려 했던 판타지는 사라지고, 니나 자신을 자해하는 현실만 남은 것이다. 현실과 판타지를 박진감 넘치게 줄타기하는 이 장면은 니나 캐릭터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화면에서 검은색과 흰색으로 대별되는 흑조와 백조, 바로 그것이 니나의 캐릭터이다. 스스로 프로타고니스트와 앤타고니스트인 니나의 미션은 라이벌 릴리나, 니나를 다그치며 늘 극한의 경지로 몰아넣는 예술감독 토마스(뱅상 카셀)와의 갈등보다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자신을 넘어서야만 백조에서 흑조로의 완전한 캐릭터 전환을 성취하는 것이다.
엔딩 씬 사진 5~6의 클로즈업은 캐릭터 영화 <블랙 스완>에서 가장 영화적인 순간이다. 모든 수난을 극복하고 공연을 완벽하게 끝낸 니나가 다른 캐릭터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며 재탄생한 장면이다. 니나가 무대 상단에서 우아하게 매트에 착지하는 순간,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지고 공연은 끝이 난다. 하지만 복부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는 니나를 발견한 토마스와 단원들이 모여들고, 순식간에 무대는 아수라장이 된다. 토마스가 도움을 요청하며 소리친 뒤 니나의 상태를 살피자, 니나는 “I felt it(난 느꼈어요)”라고 나직이 속삭인다. 니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토마스가 놀란 표정으로 “what?(뭐?)”라고 응수하면, 니나는 토마스의 시선을 외면하고 화면을 빤히 쳐다보면서 마지막 대사를 읊조린다. “I’m Perfect!(난 완벽했어요!)”
<블랙 스완> 서사의 완결인 이 장면은 마치 니나가 관객들에게 말을 거는 듯한 소격효과가 활용되었다. 니나가 토마스에게 그가 원하던 예술적 목표를 이루었다고 말한 다음, 영화의 서사를 빠져나와 현실의 관객들에게 자신의 성취를 대사로 함축하고 있다. 두 시간 내내 니나의 드라마틱한 ‘흑조 되기’ 미션을 정신없이 쫓아가며 감정이입하던 관객들도 이 장면에서 비로소 숨을 돌리며 디제시스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의 엔딩 씬, 엔딩 쇼트를 이미지화하는 것은 역시 니나의 표정이자, 클로즈업의 미학이다. 니나의 고통을 암시하는 암조에서 서서히 화면이 흰색으로 밝아지는 화이트인(white in)이 구사된 이 니나의 클로즈업 쇼트는 니나가 현실의 미션을 완수하고, 새로운 경지, 즉, 예술의 절대 경지에 접어든 느낌으로 연출되었다. 암조에서 명조(high key)로의 미장센의 톤 변화와 부감 앵글은 현실의 니나가 희생과 죽음을 통해 몽환적인 천상계로 진입했다는 함의를 띄고 있다. “I’m Perfect!(난 완벽했어요!)” 마지막 대사는 그래서 아이러니하다. 완벽한 인간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표를 성취한 니나는 신체의 희생을 통해 지상의 육체를 버리고 천상의 영혼을 택한 것이다. 결국, <블랙 스완>의 영화적 순간은 이 종교적인 뉘앙스의 클로즈업 쇼트인 것이다.
영화감독 최인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