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를 살리기 위해 한겨울에 1달을 걸었던 감독이 있다고? 영화감독이 쓴 독특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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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뿐만 아니라 텍스트에도 비범한 능력을 선보이는 영화감독들이 있다. 감독이 쓴 책들을 읽다 보면 설령 그게 영화 해설서가 아닐지언정 그들이 만들어온 영화들이 새삼 더 또렷하게 보이기도 한다. 감독이 쓴 독특한 콘셉트의 (한국어로 번역된) 책들을 소개한다.


베르너 헤어조크

『얼음 속을 걷다』

제목 ‘얼음 속을 걷다’는 수사가 아니다. 베르너 헤어조크는 걸었다. 1974년 11월 23일부터 12월 15일까지, 뮌헨에서 파리까지. 영화를 찍기 위해 걸었느냐고? 아니. 대학 시절 은사이자 독일 영화계의 정신적 지주와도 같았던 영화평론가 로테 아이스너를 살리기 위함이다. 그 먼 길을 걷는다고 어떻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을까. 하지만 헤어조크는 한겨울의 그 길을 걸어가면 아이스너가 깨어날 거라고 믿었다. 후배가 영화를 완성하면 구두를 삶아 먹겠다고 약속하고, 그가 완성하자 진짜로 구두를 먹은 사람이 가질 법한 믿음. <얼음 속을 걷다>엔 그 22일간의 여정 중에 헤어조크가 육필로 남긴 일기가 모여 있다.


장 뤽 고다르

『영화의 고고학』

장 뤽 고다르는 장편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1960)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독보적인 형식과 사상으로 똘똘 뭉친 영화 세계를 구축해왔다. <영화의 고고학>은 80년대 후반부터 10여 년 간 작업해 완성한 <영화의 역사(들)>(1998)을 발표한 직후 영화평론가 유세프 이샤그푸르와 나눈 대담을 기록했다. 고다르가 당시 활동 중이었던 평론가들 가운데 <영화의 역사(들)>의 비평적인 의미를 짚어낼 수 있다고 생각해 직접 이샤그푸르를 지목해 성사된 대담이다. <영화의 역사(들)> 작품 자체에 관한 문답은 물론, 영화가 세상에 나온 지 100년이 넘는 시간에 걸친 예술과 역사를 아우르는 고다르의 남다른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에릭 로메르

『여섯 개의 도덕 이야기』

2017년 서울아트시네마의 회고전 이후, 에릭 로메르는 한국에서 ‘취향’을 중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꽤나 보편적인 취향으로 자리잡았다. 어떤이가 다른이를 좋아하는 이야기를 쉽지만 타이트한 구조 아래 펼쳐내는 재미와 프랑스 곳곳의 자연 풍경과 사람들 집 안의 인테리어를 비추는 시각적 쾌감을 동시에 만족시키기 때문일 터. 인기의 척도는 그와 관련한 서적이 발간되는 빈도로 가늠할 수 있다. 작년과 올해만 각본집 셋과 평전 하나, 그리고 지난 6월 6개의 단편을 담은 소설집 <여섯 개의 도덕 이야기>가 발간됐다. 로메르가 1962년부터 1972년까지 발표한 여섯(단편 둘, 장편 넷) 영화의 바탕이 된 소설을 엮은 책이다. 영화부터 보고 소설을 읽거나, 소설 먼저 읽고 영화를 보거나, 로메르가 생각하는 두 매체의 차이를 비교해보는 맛이 있다.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시간의 각인』

1962년 데뷔해 1986년 눈을 감은 사이 단 7개 영화를 남기고 떠난 러시아의 최고 거장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지나온 행보엔 고국의 비협조와 탄압에도 타협하지 않았던 굳은 절개가 서려 있었다. <시간의 각인>은 타르코프스키가 자신이 만든 영화들의 제작 비화와 영화에 대한 대쪽같은 관점을 풀어낸 책이다. 예술가의 ‘자유’보다 ‘임무’와 ‘책임’에 더 무게를 두었던 위대한 영화감독의 숭고한 태도가 응축됐다. 1991년 독일어 번역본을 중역한 <봉인된 시간>이 나왔지만, 오는 7월 발간될 <시간의 각인>은 러시아 원서를 바탕으로 번역해 영화란 “시간을 조각하는 것”이라고 강조한 타르코프스키의 뜻에 따른 제목을 붙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키키 키린의 말』

2018년 가을 세상을 떠난 키키 키린은 일본의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특히 사랑한 배우였다. <걸어도 걸어도>(2008)부터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어느 가족>(2018)까지 여섯 편의 영화에 키키 키린을 캐스팅했다. 배역은 모두 한 가정의 할머니였지만 그들의 면모는 모두 미세하게 달라, 그 할머니의 존재가 곧 영화의 톤을 좌우하기도 했다. 영화감독의 인터뷰집을 꾸준히 내놓은 출판사 마음산책에서 나온 <키키 키린의 말>엔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키키 키린이 함께 작업한 시간 동안 가졌던 여섯 번의 대담이 모였다. 언제나 인간을 향한 시선을 돌려본 적이 없는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던지는 물음이 우리 기억 속 키키 키린의 인자하고 푸근한 미소가 만들어지기까지 그가 60년 동안 통과한 연기 인생의 순간순간이 따라온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자본>에 대한 노트』

영화사 강의의 ‘몽타주’ 파트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명작 <전함 포템킨>(1925)을 만든 소련의 명장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은 감독뿐만 아니라 영화이론가로서도 크나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10월 혁명’ 10주년을 기념해 만든 <10월>(1928)의 다음 작품으로 무려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 영화화 하려고 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형식적 해결책으로 삼으려고 했던 이 기획은 결국 무산됐다. <<자본>에 대한 노트>는 에이젠슈테인이 영화화를 위해 일기처럼 (날짜순으로 나열됐다) 기록한 메모들을 엮었다. 도무지 그 결과를 상상조차 하기 힘든 프로젝트를 위해 한 시대의 천재가 남긴 사유는, 비록 실현되지 못했지만, 그의 영화만큼이나 흥미롭다. 에이젠슈테인의 메모와 더불어, 이 미완의 기획에서 출발한 9시간 30분의 다큐멘터리 <이데올로기적 고대로부터 온 소식>(2008)을 연출한 알렉산더 클루게의 에세이도 수록됐다.


미야자키 하야오

『책으로 가는 문』

<책으로 가는 문>은 일본을 대표하는 출판사 ‘이와나미쇼텐’은 초중학생을 위한 단행본 시리즈 ‘소년문고’ 창간 60주년을 맞아 기획됐다. 지브리의 수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소년문고’를 통해 나온 책 가운데 직접 50개를 선정해 한권한권 추천사를 썼다. <어린 왕자>를 비롯해 <삼총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파브르 곤충기>, <곰돌이 푸우 이야기>, <톰 소여의 모험>, <로빈슨 크루소> 등 한국 대중에게도 친숙한 작품들이 여럿 눈에 띈다. 데뷔 이래 줄곧 생명의 고귀함을 일깨워준 미야자키의 뜻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책 말미엔 미야자키가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원서는 2011년 10월, 한국어판은 2013년 8월에 나왔다)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도 실렸다.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폭력적인 삶』

<데카메론>, <마태복음>, <살로, 소돔의 120일>을 연출한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는 1961년 감독으로 입봉하기 이전에 여러 소설과 시를 발표한 바 있다. 1959년 발간된 <폭력적인 삶>은 파졸리니의 두 번째 소설이다. 로마의 변두리 빈민촌에서 희망도 미래도 없이 생존을 위해 어떤 짓이든 마다않는 주인공 토마소의 생활을 펼쳐놓는다. 르포를 방불케 하는 사실적인 터치로 전후 이탈리아의 황폐한 사회를 낱낱이 고발한 이 작품은 파졸리니를 문단 스타 반열에 올려놓았고, 이를 통해 페데리코 펠리니의 <카리비아의 밤>과 <달콤한 인생>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영화계에 입성했다.


김영탁

『곰탕』

김영탁 감독은 판타지적 설정에 절절한 휴머니즘이 담긴 <헬로우 고스트>(2010)와 <슬로우 비디오>(2014)를 연출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곰탕>은 김영탁이 2018년이 내놓은 장편소설이다. 생전에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곰탕을 살아계셨을 적으로 돌아가 함께 먹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시간 여행의 아이디어를 떠올려 바로 소설 집필에 몰두했다고. 소설 <곰탕>은 그 이름처럼 따스하거나 구수하지 않은, 차가운 스릴러의 톤으로 진행된다. 쓰나미로 인해 안전한 윗동네와 목숨이 위태로운 아랫동네로 나누어진 2063년 부산에 사는 주인공 우환은 과거로 돌아가 곰탕 맛을 배워오라는 거액의 제안을 받고 2019년 부산으로 가지만 그곳엔 실체를 알 수 없는 살인 사건들이 벌어진다. 이준익 감독은 “반전의 반전을 따라가며 마지막 문장까지 정신없이 읽고 나면, 한 인간이 가진 ‘그리움’이 어떤 일을 감행하게 하는지, 결국 사람을 움직이는 게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는 추천사를 남겼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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