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제2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캐슬린 비글로우가 <허트 로커>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로써 비글로우는 아카데미 역사상 감독상을 받은 최초의 여성감독이 되었다. 동시에 그녀의 수상은 그동안 할리우드가 얼마나 남성중심적인 산업이었는지 역설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임순례 감독의 <교섭>은 그런 의미에서 비글로의 아카데미 수상과 비슷한 맥락의 ‘경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23년 설연휴를 앞두고 개봉하게 될 <교섭>은 약 170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대작이다. 작년 12월에 개봉한 <영웅> (윤제균) 이후로 이렇다 할 한국영화가 없었던 터에 개봉되는 <교섭>은 황정민, 현빈과 같은 A 리스트의 출연 캐스트와 해외 로케이션 등 여러가지 기대요소들이 충만한 작품이다. 또한 <교섭>은 여성감독이 연출한 첫 대작영화다. 지난 한국영화가 조은지 (<장르만 로맨스>), 홍의정 (<소리도 없이>), 박지완 (<내가 죽던 날>) 등의 출중한 여성감독과 그들의 작품을 목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성감독의 작품은, 특히 상업영화 플랫폼에서, 70억이 넘지 않는 저, 중예산 작품에 한정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독립영화에서 상업영화 플랫폼으로 완만한 이행이 이루어지는 수도 여성감독보다는 남성감독의 수가 압도적으로 더 많다는 점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는 경향이다. 대학 연극영화과에서 연출 전공 학생 수, 독립영화 출품 수 기준 성비에서 여성이 반에 가깝거나 과반이 넘은 지 이미 오래지만 유독 상업영화에서만큼은 여성 감독의 활약을 보기가 힘든 한국영화산업이다. 이러한 편차는 예산이 큰 상업영화일수록 더 극심하다. 물론 <교섭>이라는 작품이 빼어나지 않았다면 이러한 선례 또한 반쪽의 성공으로 남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교섭>은 2007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났던 샘물교회 선교단 피랍사건을 극화 한 영화다. 아프간의 분쟁지역에서 선교단 21명이 탈레반에게 납치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교섭전문 외교관, 정재호 (황정민)가 현지에 파견된다. 재호가 아프간에 도착했을 때 사건에 먼저 투입된 국정원 요원 박대식(현빈)은 이미 상황을 주도하고 있는 중이다. 인질 구조라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원칙주의의 공무원과 현지에 익숙한 현장요원은 사사건건 부딪히고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인질 한 명이 탈레반에 의해 처형된다. 또 다시 24시간의 살해 시한이 다가오고, 협상 상대, 조건 등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교섭의 성공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진다.
1994년 단편, <우중산책>으로 데뷔한 이래로 총 8편 (<교섭> 포함)의 장편영화를 연출한 임순례 감독은 한 장르에 머물지 않고 다채로운 작품들을 만들어 왔다. 그녀의 대표작이자 가장 큰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작품인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이하 ‘우생순’, 2008)을 스포츠영화라고 한다면 그녀의 장편 데뷔작인 <세 친구>는 성장영화, <제보자> (2014)는 범죄드라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작품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실패’다. <세 친구>의 친구들은 사회적인 낙오자들이었으며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성우 역시 끝내는 자신의 밴드,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지켜내지 못한다.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도 취업과 연애에 모두 실패한 우울한 청춘이며 스포츠영화인 <우생순>에서조차 핸드볼 팀은 금메달 획득에 실패한다.
임순례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실패’는 중요한 키워드다. 임순례 감독의 첫 영문 볼륨, ReFocus: The Films of Yim Soon-rye (에딘버러 대학 출판, 2023)에 수록된 인터뷰에서 감독은 “장르가 (주로 주인공의 성공이 메인 스팩터클이 되는) 스포츠 영화든 음악 영화든 성장 영화든 내 영화는 항상 주인공들이 실패한다”라고 농담처럼 언급한다. 그녀의 말처럼 임순례의 영화들은 한국(상업)영화에서 캐릭터들이 성공하거나 이기는 위풍당당한 순간을 부각하는 전통에 도전해왔다. 그녀는 “이 캐릭터들을 통해 성공을 하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다, 그리고 만약 다시 도전해서 또 실패하고 포기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결국 실패라는 것이 모든 것의 끝은 아니니까”라고 말한다.
<교섭>은 이 같은 감독의 ‘실패 미학’에서 벗어나는 영화이기는 하다. 궁극적으로는 두 주인공이 인질 구출에 성공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마지막의 ‘트라이엄프’를 얻어내기까지 재호와 대식은 끊임없이 실패한다. 영화의 3/4은 이들이 어떻게 실패하고 어떻게 다시 시작하는지의 지난한 과정을 조명한다. 그리고 이 부분이 <교섭>의 중추이자, 임순례의 ‘실패 미학’이 빛을 발하는 부분이다.
임순례의 캐릭터들은 ‘실패’라고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들은 사회적 시스템의 실패를 환기하는 인물들이다. <세 친구>의 친구들은 단지 대학에 안 가서, 남자답지 않아서, 혹은 군 면제자라서 낙오자의 타이틀을 얻었고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 역시 취업을 못했기 때문에 도시에서 밀려난 인물이다. 따라서 이들은 삶의 기준에서 실패한 인물들이 아닌 사회의 기준으로부터 제외된, 즉, 시스템의 부당함 (injustice)을 상징하는 인물들인 것이다. 이 영화들의 말미에 보여지는 ‘실패’는 삶의 끝이 아닌 하나의 매듭이며 이는 또 다른 종류의 시작을 암시한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성우가 밴드를 지키지 못했지만 그의 실패가 어린 시절 친구인 ‘인희’ (오지혜)와 듀엣을 결성하는 계기가 되는 것 처럼 말이다.
<교섭>의 재호와 대식도 비슷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탈레반과는 협상할 수 없다는 원칙을 받아 들일 수 없는 재호는 상관으로부터 거부당하고, 과거 비슷한 사건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변칙(?)으로 대항했던 대식은 이미 조직으로부터 반쯤 버려진 요원이다. 딱히 내키지는 않지만 대식의 협박으로 인질 구출을 돕게 되는 한국인 이민자이자 범법자인 카심 (강기영) 역시 ‘언더독’으로서의 삶에 있어서는 이들과 궤를 함께 하는 인물이다. 영화는 어쩌면 이들의 ‘사회적 실패’ 때문에 인질 구출에 성공하는 것임을 시사한다. 이들이 매뉴얼과 글자뿐인 시스템에 의존했다면 21명의 목숨을 구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팬더믹으로 인한 몇 차례의 개봉 연기에 기대 반 염려 반을 가지고 지켜 본 <교섭>은 엄청난 성취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수작이었다. 다수의 인질구출영화에서 보여지는 주인공들의 신파성 전사(前事)와 구색으로 착취되는 가족 서사가 완전히 배제 되어있다는 것, 동시에 영화적 디테일들은 오롯이 사건의 서술과 재현을 위해 할애 되어있다는 점도 이 영화의 큰 강점 중 하나다. 잘 만들어진 영화가 그렇듯 나는 이 영화가 관객에게 마땅한 사랑과 응원을 받기를 바란다. 또한 그에 더해 바라는 것이 있다면 2010년 아카데미에서 새로운 여성영화사가 시작되었듯, 이 영화를 필두로 더 많은 여성감독의 대작이 제작되는 것이다.
임순례 감독은 상업영화의 작품 수 기준으로도, 누적 관객수로도, 수상 경력으로도 이미 다수의 ‘여성 유일’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제는 더 이상 그녀가 ‘유일’이 아니기를 바란다. <교섭>의 성공적인 행보가 또 다른 여성감독들의 상업영화에서의 활약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란다.
김효정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