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 선언> 재난의 피해를 최소화 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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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재난 장르

노자는 일찌기 도덕경을 통해 자연이 인간을 해치는데는 어떤 의도도 없다고 했다. 이것은 대개의 재난장르의 영화에서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타이타닉>(1997)호의 탑승이나 <타워링> (1964)의 화재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악의를 지닌 자에게 좀 잔인하게 벌어지고,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자(주로 주인공) 에게는 지연되는 가공을 볼 뿐이다.

보통 이 장르의 이야기는 된서리를 피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럴 때 서사는 재난을 멀리하는 과정을, 메세지에서는 인간성의 회복을 그린다. 여기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계산적이며, 동시에 아끼고 사랑하는 일을 얼마나 잘하는지를 저변에 깔아두어야 한다. 그러다보니 그 재앙의 발생 또한 인간성의 실종에서 촉발하는 경우가 많은데, 당연히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는 인간성의 회복이 필요해진다. 이런 기조를 받아 클라이막스까지 달려가면 주인공을 갈등하게 하는 요소는 스스로가 인간성을 잃었는지에 관해 질문하는 것이 된다. 재난을 그리는 영화에서 유달리 신파가 많은 이유다.

<타이나닉>의 이 장면은 또 봐도 아름답다

바이러스라는 재난도 마찬가지다. <28일후> (2002)에서 좀비 만큼이나 무서운 인간들이 나오는 것처럼, 바이러스 재난에서 실질적 빌런은 바이러스 보다는 거기에 감염된 인간인 경우가 많다. 드라마 <킹덤> (2019)을 보면 일단 왕이 숙주로 시작하는 천인공노할 이야기다. 그러다보니 전이라고 하는 대재앙이 더욱 흥미롭게 펼쳐진다. 숙주의 도덕적 관념이 영화적 시선에서 나쁘다면, 이야기가 던지고자 하는 바는 확고해진다. 자연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지만 뭔가 운명적 랜덤을 보는 묘함이 생긴다. 그런면에서 <비상선언> (2022)은 여러가지 낯을 품은 장르영화다.

정통 장르로써의 강점

영화가 시작하면 넓은 공항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치 점묘화가 그려지듯 인물 하나하나에 집중하기 위한 비주얼적인 전략을 택한다. 군중 속에 있는 진석(임시완 분), 재혁(이병헌 분), 현수(김남길 분)를 헷갈리지 않게 잡아내기 위해 애너모픽이나 빈티지등의 렌즈군을 적절히 사용하고 있으며, 이들이 비행기로 옮겨갔을 때는 좁은 심도와 타이트한 사이즈, 컨트라스트가 큰 조명 등으로 긴장감을 올리는 동시에 개인 하나하나마다 시선을 잃지 않게 한다.

누군가에 의해 옮겨지는 바이러스가 존재하고, 그 사람이 만진 음식을 누군가가 먹게될 것이고, 심지어 입에 대기 직전에 옆 사람과 그릇이 바뀌게 되면 단지 음식을 클로즈업으로 잡았을 뿐인데 관객은 뜨악하며 긴장을 이어 나가게 된다. 이 때 마치 먼지처럼 흩뿌려지는 바이러스를 잡아내는 것 또한 비행기 내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직광이다. 리얼리티와 서스펜스의 완벽한 승리인 것이다.

비행기가 이륙하기도 전부터 우리는 진석의 수상함을 알고 있다. 이어 비행기 내에서 재앙이 닥칠 분위기를 잡는데는 음악이 일조하고 있다. 작은 행동이지만 바이러스가 퍼질 법 하다는 정보들도 음악과 합져져 효과가 배가 된다. 그리고 이 불안감은 기장을 잃은 항공기가 제멋대로 비행하는 장면에서 절정을 맞이한다. 국내 최초로 돌아가는 형태의 항공기 세트가 사운드의 절제와 더불어, 입이 다물어 지지 않는 재난영화의 한 면을 만들어 낸다.

이윽고 장르를 비틀기 시작한다. 바이러스를 거느린 악당은 테러를 감행했다. 그런데 그는 교섭도 없이 죽어버린다. <에어 포스 원>(1997)이나 <논스톱> (2014)처럼 인물이 중심이 되는 항공재난에서 기대할 수 있는 액션의 모습은 없다. 심지어 이 지점은 140분의 러닝타임에서 60분 밖에 안되는 위치다. 바이러스에서 재난이 시작하지만 숙주 어쩌구.. 하는 공식 따위로 승부하지 않는 것이다.

폐쇄된 공간이 <부산행> (2016)을 연상시킨다.

이 영화의 진짜 장르

기장을 대신해 운항하는 현수 (김남길 분)가 천신만고 끝에 하와이에 도착하지만, 미국은 착륙을 불허한다. 돌아가는 길에 들리려던 일본 또한 마찬가지다. 재혁이 컨트롤 휠을 받아 한국으로 향한다. 그러나 변이 바이러스를 가진 것이 확실시 되는 감염자들의 착륙을 바라지 않는 것은 한국의 국민 또한 마찬가지였다. 청원은 승객들을 배척하고, 시위대의 기세는 드높다.

바이러스 재난의 큰 특징 중 하나가 구원자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다소 맥이 빠진다. 이미 항바이러스제는 존재하고 있으며, 바이러스를 창궐한 제약회사가 치료제를 내놓는 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흥미가 떨어진다. 게다가 그것을 해결하는 캐릭터인 숙희(전도연 분)는 전도연이라는 초대형 배우가 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테레오 타입으로 그려져 밋밋한 인상을 받는다.

인호(송강호 분)가 몸에 바이러스를 투여하는 순간 뒷부분의 서사가 쉽게 풀리는 부분도 아쉽다. 감동은 희생을 먹고 자란다. 하지만 메시아(백신이나 치료제)를 찾거나 혹은 그러기 위한 제물이 되는 역할은 주인공의 손에 쥐어줘야 그 감동을 관객도 함께 가져갈 수 있다. 지금은 송강호라는 스타파워에 기대고 있어서 ‘주인공이 희생했다’는 인상을 받을 수는 있으나, 결론적으로 그런 희생은 비행기 내의 누군가가 했어야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나 클라이막스의 에너지가 1분단위로 역전되는데다 그 근거가 우연에 기대고 있으며, 한 명에게도 몰아주기 힘든 감정을 기내/외의 인물 모두에게 다그치다보니 헌신이 숙연한 감명으로 이어지는데는 무리가 있다.

그런데 누군가의 희생없이 – 희생을 선택했으나 결론적으로는 살아난다 – 숭고한 결정을 내린 비행기내 승객들과 외부 가족들간의 영상통화를 보면서 눈물을 짓게되는 지점은 지금까지 달려온 영화의 성품과 그 톤이 맞는지 의아함이 발생한다. 물과 기름처럼 잘 섞이지 않으니 이 외재적 추도의 장면이 그저 신파로 치부되어 폄하되지는 않을까 염려되는 것이다.

이런 지점을 보면 되려 부연이 더 필요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너무 쉽게 항바이러스제를 찾아내며, 잠깐의 위기를 겪었다가 다시 회복세로 들어서게 된다. 게다가 대한민국에서 이기적 스탠스로 시위하는 이들의 집념이 이렇게 빨리 태세전환을 한다는 건 핍진적 측면에서도 무리가 있다. 연출자의 고집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였으나, 140분의 짧지 않은 러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더 긴 시간을 필요로 하고있는 것이다.

<비상선언>이 가장 하고 싶은 것은 사회드라마였다. 영화 초반부에 극한의 재난 영화로써 기믹을 선보인 측면은 독이 된 것일까?

<비상선언>이 한국최초의 항공재난물은 아니다

그전에 <마유미> (1990>가 있다.

연출의 의도

발휘한 장르적 최대치에 비해 최종적 의도는 어긋났지만, 관객을 데리고 재앙의 품속으로 저벅저벅 안내하는 한재림 감독의 야심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상업영화의 테두리에서 애상의 마음을 드러내는 자기만의 방식과 대중언어의 결합인 것이다.

오프닝의 비주얼 컨셉을 언급하며 개인을 조망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고 했다. 이것은 ‘책임지라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제 할일을 한 것 뿐입니다’ 라는 대사를 던지는 숙희와 인호의 태도와도 맞닿아 있다.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최고 지도자,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당하는 핍박, 엔딩의 바다등을 생각하면 멀지 않은 과거에 대한민국을 덮쳤던 해양재난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그 사고는 관재에서 시작하여 인재로 끝났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어떻게하면 최소한의 피해로 그치거나 막을 수 있었을까?

개인이 제 역할을 해내는 것이 재난 해결의 실마리라는, 연출자의 메세지가 필요한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프리랜서 막노동꾼 이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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