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년 세계를 사로잡은 베스트 퀴어 영화 1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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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패션 매거진 <i-D>가 ‘2010년대를 정의한 퀴어 영화 50선’ 리스트를 내놓았다. 100개 남짓한 상영관에서 개봉해 8주차에 14만 관객을 만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셀린 시아마가 연출한 작품이 3편이나 포함된 점이 눈에 띈다. 마침 서울에선 셀린 시아마의 장편 전작을 상영하는 특별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 등장하는 그림과 의상을 직접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리스트 상위를 차지한 10개 작품을 소개한다.


10.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

I Am Not Your Negro, 2016

20세기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손꼽히는 제임스 볼드윈이 1970년대 중반 쓴 노트와 서한을 모은 미완성 원고를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 흑인 인권운동가 메드가 에버스, 맬컴 X, 마틴 루더 킹 Jr.의 연이은 죽음을 축으로, 볼드윈이 원고를 통해 쏟아낸 글과 TV/공개토론의 발언으로 백인 중심의 야만적인 미국과 투쟁하던 시절을 갖가지 푸티지를 동원해 돌이켜본다. 내레이션은 새뮤얼 L. 잭슨이 맡았다. 10대 시절 스스로 게이임을 자각하고 <조반니의 방>, <다른 나라>, <기차가 떠난 지 얼마나 됐는지 말해줘> 등 LGBT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소설들을 발표하면서 사회에 관한 남다른 시선을 보여줬던 볼드윈의 경력을 감안한 선택으로 보인다.


9.

톰보이

Tomboy, 2011

셀린 시아마의 카메라가 탐구하는 대상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여성. 영화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영화를 찍기 시작한 시아마는 수중발레부 부장을 짝사랑 하는 15살 여학생의 이야기 <워터 릴리즈>(2007)를 발표하고, 4년 후 두 번째 장편 <톰보이>를 내놓았다. 오랜 공백기에도 불구하고 <톰보이>는 3주간 시나리오를 쓰고, 또 그만큼 캐스팅을 진행해, 20일 만에 촬영을 마쳤다. 제목 그대로 남자 같은 외모를 한 10살 소녀 로레(조에 헤란)는 새로 이사 온 동네에서 리사(잔느 디송)에게 반해 자신을 미카엘이라고 소개하고, 동네에서도 남자로 알려진다. 여자애를 좋아하는 여자애의 마음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성정체성에 관한 질문으로 뻗어나간다.


8.

호수의 이방인

L’Inconnu du lac, 2013

코미디, 포르노, 스릴러. <호수의 이방인>은 이 세 가지 장르를 하나씩 풀어놓으면서 게이들이 모이는 호숫가에서 시간을 죽이던 남자의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단골처럼 호숫가에 드나들던 프랑크(피에르 델라동샴)는 마음에 드는 남자를 기다리다가 뚱뚱한 앙리와 시덥잖은 대화나 나누다 집에 가기 일쑤다. 첫눈에 매혹된 미셸(크리스토프 포우)과 연애를 시작하고, 그가 전 애인을 죽이는 걸 목격해 두려움에 떨지만, 미셸에게서 좀체 벗어나지 못한다. 한여름, 헐벗은 남자들이 추파를 던지고 몸을 맞대는 풍경에서 유머와 에로스가 출몰하고, 거기에 살인사건이 더해지면서 서서히 관객의 목을 조여온다. 유유히 흐르는 물결과 낮과 밤 전혀 다른 분위기의 숲속이 내뿜는 관능에 알프레드 히치콕이 부럽지 않을 서스펜스를 퍼뜨리는 솜씨는 동시대 가장 재능있는 프랑스의 시네아스트 알랭 기로디의 저력이 만방에 드러난다. <호수의 이방인>은 한국에 수입됐지만 적나라한 수위로 제한상영가를 받아 정식 개봉하지 못했다.


7.

탠저린

Tangerine, 2015

<탠저린>의 두 주인공 신디와 알렉산드라는 남자로 태어나 자신이 여자임을 깨닫고 수술로 여자의 외형을 갖췄지만 아직 남성기를 제거하지 않은 트렌스젠더다. 아이폰 5S로 촬영된 영화는, 교도소에 있는 동안 포주인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와 바람 폈다는 걸 알고 그 여자를 찾으러 나서는 신디와 그의 친구 알렉산드라가 속사포처럼 수다와 욕설을 내뱉으며 LA 거리를 들쑤시고 다니는 과정을 자유분방하게 담아냈다. 영화를 가득 메운 EDM 음악처럼 유쾌하고 정신사납게 진행되던 이야기는, 남성기가 있는 트랜스젠더하고만 돈 주고 관계를 맺는 아르메니아인 택시기사 라즈믹이 끼어들면서 점점 소수자로 살아가는 이들의 지친 얼굴에 시선을 돌린다. 절절한 크리스마스 영화.


6.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Portrait de la jeune fille en feu, 2019

<톰보이>에 이어, 파리 외곽 빈민촌에 사는 네 흑인 여고생의 이야기 <걸후드>(2014)로 ‘성장담’ 3부작을 완성한 셀린 시아마. 데뷔작 <워터 릴리즈>의 주연 배우이자 한때 연인이었던 아델 에넬을 다시 한번 캐스팅 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만들었다. 18세기 말, 화가 마리안느는 밀라노의 귀족 집안에 시집 가는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리러 브리타니의 외딴 섬에 간다. 그림을 남기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엘로이즈를 세세히 관찰해 그 기억을 더듬어 몰래 초상화를 그리다가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이건 셀린 시아마의 영화다. 비단 두 여자의 이야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시선의 주체와 객체가 예술을 넘어 결국 사랑으로 이어지는 관계도 충분히 매혹적이지만,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한 집에 사는 하녀 소피와 연대해 다함께 평온한 시간을 즐기는 순간에 다다르면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보다 높이 도약한다.


5.

아가씨

2016

<친절한 금자씨>(2005)의 금자,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의 영군, <박쥐>(2009)의 태주, 그리고 할리우드에서 만든 <스토커>(2013)의 인디아까지. 캐릭터를 향한 박찬욱의 시선은 그것이 여성일 때 한껏 더 따뜻했다. 레즈비언이 주인공인 역사 소설에 매진해온 세라 워터스의 대표작 <핑거 스미스>에서 모티브를 얻은 <아가씨>는 그야말로 여성들이 행복을 거머쥐는 걸 보여주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영화다. 장물아비의 손에 자라 소매치기로 먹고 살던 숙희(김태리)는 백작(하정우)의 작전대로, 부모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히데코(김민희)를 등처먹기 위해 그 집 하녀로 들어가 히데코를 사랑하게 된다. 변태 애서가인 이모부에게 어려서부터 착취 당했던 히데코와 그녀를 속이려는 의도조차 감추지 못하는 숙희는, 육체적인 쾌락을 나누는 건 물론 서로 연대해 자신을 짓누르던 남자들을 무찔러 사랑과 자유를 쟁취하고야 만다. 박찬욱과 그의 오랜 프로덕션디자인 파트너 류성희가 구현한 탐미적인 미장센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4.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Call Me By Your Name, 2017

이번 기획에서 소개하는 작품들이 사랑과 더불어 그를 둘러싼 성별, 계급, 인종과 같은 문제를 아울렀다면, 감미로운 제목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오로지 사랑에만 집중한다. 1983년, 이탈리아 북부 지방에서 부모와 함께 여유롭게 여름을 나고 있던 17세 소년 엘리오(티모시 샬라메)는 고고학자인 아버지의 논문을 도우러 온 올리버(아미 해머)의 건장한 육체에 반한다. 처음엔 엘리오의 마음을 외면하던 올리버 역시 그를 받아들여 꿈결같은 날들을 보내고 결국 이별한다. 이탈리아 크레마의 한적하고 여유로운 분위기 아래 엘리오가 따사로운 볕을 벗삼아 예술과 여름, 그리고 사랑을 마음껏 누리는 걸 보는 쾌락만으로도 충만한 작품이다. 티모시 샬라메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통해 오스카 최연소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며 일약 월드스타로 발돋움했다.


3.

캐롤

Carol, 2015

<파 프롬 헤븐>(2002) 이후 오랫동안 동성애의 뉘앙스를 거둔 작품들을 내놓던 토드 헤인즈는 2015년,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소금의 값>을 각색한 레즈비언 로맨스 <캐롤>을 발표했다. 백화점 점원 테레즈(루니 마라)와 딸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온 캐롤(케이트 블란쳇)을 만나자마자 이끌리고, 캐롤이 두고 간 장갑을 매개로 둘은 친구가 된다. <캐롤>은 1950년대를 배경으로, 생전 처음 느껴보는 낯선 감정을 마주한 여자의 마음이 불어나는 과정을 고전적인 문법으로 연출한다는 점에서 <파 프롬 헤븐>과 닮았다. 현란한 비주얼이나 파격적인 묘사에 기대지 않은 채 서로 다른 계급의 두 여자가 마음을 나누는 겨울의 시간들이 눈처럼 소복소복 쌓인다. 전혀 딴판인 테레즈와 캐롤의 온도차가 점차 완만해지는 걸 완벽하게 드러내는 루니 마라와 케이트 블란쳇의 세심한 연기가 일품이다.


2.

120BPM

120 battements par minute, 2017

제목 ‘120BPM’은 80년대 말 90년대 초 유럽에서 유행하던 하우스 음악의 템포다. 몸을 흔들기에 적합한, 심장이 가장 건강하게 뛰는 속도. 1989년 파리, 에이즈 확산에도 방관하기만 하는 정부와 제약회사에 대항하는 ‘액트 업 파리’ 일원들은 하루하루 절박하게 활동한다. 이제 막 ‘액트 업 파리’에 들어온 나톤(아르노 발노아)은 이미 에이즈로 고통 받고 있지만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투쟁에 임하는 션(나우엘 페레즈 비스키야트)과 연인이 된다.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해 프랑스의 교육 현실을 꼬집은 <클래스>(2008)의 각본과 편집을 담당했던 로뱅 캉필로는 다큐멘터리를 방불케 하는 터치로써 <120BPM>의 리얼리티를 조직했다. 점점 야위어 가는 션과 끝까지 그의 곁을 지켰던 나톤의 사랑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그려내 LGBT는 물론 일반 관객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1.

문라이트

Moonlight, 2016

<문라이트>는 마약이 횡행하던 70년대 말 마이애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샤이론의 성장기를 시절 별로 풀어놓는다. 왜소한 몸집 때문에 ‘리틀’이라 불리는 샤이론(알렉스 히버트)은 동네 아이들한테 괴롭힘 당하고, 마약에 중독된 어머니(나오미 해리스)로부터 보호 받지 못한다. 그런 샤이론에게 동네 마약상 후안(마허샬라 알리)은 아버지처럼 곁을 내어주고 그 덕분에 힘든 시절을 견뎌낸다. 후안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샤이론의 삶을 지탱하는 건 어릴 적부터 친구인 케빈에게서 느끼는 사랑이다. 유년기, 사춘기, 성인기의 샤이론을 서로 생김새도 전혀 다른 세 명의 배우 알렉스 히버트, 애쉬튼 샌더스, 트래반트 로즈가 연기했지만 그들은 저마다 샤이론의 눈빛을 공유하고 있다. 2016년 9월 텔루라이드 영화제를 통해 처음 상영된 <문라이트>는 곧장 열화와 같은 지지를 이끌어내 그 해 최고 화제작이 됐고, 이듬해 흑인 캐릭터로만 이뤄진 LGBT 영화 최초로 오스카 작품상을 거머쥐었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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