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치고 싶다, 그녀의 말빨! 넷플릭스 다큐 <도시인처럼, Pretend It’s a Cit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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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는 타인과 나 사이에 그어진 선 주변을 서성이며, 내 말이 발 디딜 적절한 위치를 찾기 위한 찰나적 판단들로 구성된다. 합의된 선을 넘어 상대의 턱밑에서 웃기지 않는 농담 따위를 던지는 무례한 인간이 되고 싶지도 않지만 뒷걸음질 치며 빈정대는 냉소자로 남는 건 더 끔찍하다.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 화두를 던질라 치면 여전히 입안이 까끌까끌해지는 나이기에, 그 선을 절묘하게 넘나드는 내공 꽉 찬 이들을 열렬히 “추앙”한다. 그래서 자연인 윤여정의 인터뷰를 돌려보고, 봉준호의 작품을 즐겨 본다. 프랜 리보위츠를 만난 순간 윤여정이 떠올랐다. 담배를 즐기는 모습 때문만은 아니었다. 문화, 예술, 돈, 건강, 나이 든다는 것, 대중교통, 책에 이르는 다양한 키워드로 7편의 넷플릭스 시리즈를 꽉 채우는 프랜의 얼굴에서 ‘무례하지 않은 까칠함’으로 대화를 주도하는 애정 하는 노배우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다른 듯 닮은 두 사람. 윤여정과 프랜 리보위츠. 윤여정은 아들 둘을 건사하기 위해 열일하였고, 프랜 리보위츠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대신 택시를 운전했다.


다큐멘터리 <도시인처럼>은 뉴욕에서 살아가고 있는 1950년생 작가 프랜 리보위츠를 주인공으로 한다. 감독은 마틴 스코세이지. 봉준호가 아카데미 작품상 트로피를 텍사스 전기톱으로 잘라서 영광을 함께 나누고 싶다며 수상의 공을 돌렸던 영화계의 거장 그 마틴 스코세이지다. 프랜 리보위츠가 한국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기에, 처음 ‘도시인처럼’을 선택한 건 감독 때문이었다. 다큐를 보니 스코세이지 감독이 <Public Speaking>(2010)에 이어 다시 한번 프랜 리보위츠를 카메라에 담은 이유가 납득이 된다. 프랜은 냉소의 여왕이자 블랙 유머의 일인자이며 사르카즘의 신이었다! 다큐에 직접 출연하는 마틴 스코세이지는 프랜이 내뱉는 모든 문장에 열광하며 숨넘어가는 박장대소로 그녀의 열성 팬임을 숨기지 않는다.

‘도시인처럼’은 프랜 리보위츠의 오랜 친구인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연출했다. 다큐 내내 스코세이지 감독은 숨넘어가게 웃는다. 그의 웃음은 최고의 배경 음악이다.


풍자와 독설로 투덜대며 유감없이 웃겨준다.

늙을수록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라고 했던가? 프랜은 그럴 생각이 없다. 그는 단호하면서도 예의 바른 어조로 뉴욕의 ‘거의 모든 것’에 대해 투덜댄다. 50년이 넘도록 뉴욕에 살고 있지만, 횡단보도를 무시하는 운전자들과 스마트폰을 보느라 어깨빵하는 무리들 때문에 뉴욕이 싫다. 그래도 뉴욕을 떠나지 않는다. 딱히 가고 싶은 곳도, 갈 곳도 없기에. 여행을 즐기냐고? 여행을 떠나기 위해 냄새나는 비행기에 몸을 구겨 넣는 사람들이여, 자신의 일상이 얼마나 비참한지 돌아보라! 예술 작품 경매장에서 높은 가격에 손뼉을 치는 사람들은 도대체 제정신인가? 박수는 예술 작품의 가치에 보내야 하거늘. 돈 받고 글을 쓰기 전까지는 글 쓰는 게 좋았지만, 그 이후로는 싫어졌다. 하지만 만 권이 넘는 책을 소장하기 위해 예산보다 세 배 비싼 집을 사야만 했기에 그는 오늘도 쓰고 말한다. 사람은 버릴 수 있지만 책만은 절대 버릴 수 없기에!

빌리고 싶다. 그녀의 말빨!

다큐를 볼수록 무례한 사람들, 차별주의자, 호모포비아를 상대하기 위해 그녀의 말발을 빌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 진다. ‘의견으로 차고 넘치는’ 프랜이지만, 여기에 편견이나 비하, 우월감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불평으로 끝날 수 있는 그녀의 투덜거림이 풍자가 되는 이유다. 다큐는 이 도시에 당신만 사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척(pretend)이라도 좀 해보라는 프랜의 외침과 상식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를 담는다. 그에게 상식인 세상은 ‘개 모자이크’ 예술 작품을 걸기 위해 5개월간 지하철 수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승객들에게 진짜 필요한 부분, 예컨대 고장 난 신호등을 고치는 것이다. 버스 기사라면 응당 정류장 이름은 꿰고 있어야 하고 승객에게 마땅히 안내할 수 있어야 한다. 뉴욕 인구의 삼분의 일이 요가 매트를 들고 다닌다는 사실만으로도 요가가 싫어진다고 말하는 프랜의 솔직함에 낄낄거리다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건강 관리, 웰니스 등이 어떻게 소비되고 유행하는지를 곱씹게 하는 그의 신랄한 통찰에 무릎을 친다.

소설가 김영하 ‘과거는 외국이다’

소설가 김영하는 ‘과거는 외국’이며 ‘거기서 사람들은 다르게 산다’라고 말한다. ‘생존자 편향’ 때문에 성공한 사람들의 말만 남고 실패한 사람들의 말은 사라졌기에 젊은이들은 어른들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다고도 덧붙인다. 비틀어 생각하면 주변인으로서 살아남아 자기만의 속도로 걷는 어른들의 말은 귀 기울여 ‘들어보자’로 해석된다. 젊은 세대가 프랜 리보위츠의 말과 삶에 열광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는 레즈비언, 유대인,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주변인의 삶을 살아야 했던 시대를 버텼지만 주눅 드는 법이 없다. 냉소적인 위트가 담긴 그녀의 논평에는 그 시대를 버틴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함이 깃들여 있다. 내가 선택한 운명과 뉴욕에서의 삶을 스스로 감당하겠다는 단호함, ‘다름’을 인정하는 쿨함, 그리고 ‘라이프 스타일’이나 돈과 같은 현대 사회에서 추앙받는 가치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당당함이 공존하는 프랜의 모습을 보니 ‘이렇게 늙고 싶다!’라는 말이 절로나온다.


Think before you speak. Read before you think.

Think before you speak. Read before you think

7화에 걸친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주제는 ‘책’이다. 오직 책을 위해 집을 넓혀가는 책에 대한 그의 집착을 보니 자신감 넘치는 언사의 배경을 알겠다. <Think before you speak. Read before you think> 어디선가 한 번쯤 읽어본 이 구절이 프랜의 말이었다니. 날카로운 유머와 신랄한 통찰은 많이 읽고 생각한 날들이 남긴 지식의 흔적들이다. 그래서 프랜은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는데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한숨 나오는 인간들뿐이고, 그 인간들에게 전하지 못한 경고 혹은 조언의 말들을 가슴에 품은 채 끙끙대며, 나도 이렇게 꼰대가 되어가나 자조하게 되는 날, 프랜을 따라 뉴욕을 걸어보자. 뉴욕의 옛 정취가 묻어나는 재즈와 고전 영화를 감상하고, 우정과 활기로 넘실대던 뉴욕을 추억하는 말 잘 통하는 두 친구, 프랜과 스코세이지 의 유쾌한 대화를 듣다 보면 보면 어느새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뉴욕이 그리워지는 신비한 경험을 할 것이다.


문화 기획자 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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