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놓치지 말아야 할 우리나라 여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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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해 수많은 영화들이 개봉했고, 그만큼 훌륭한 연기를 선보인 여자 배우들도 가득한 한해였습니다. 하지만 여러 정황상 충분히 회자되지 못한 호연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오늘 씨네플레이 연말 결산은 ‘2016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여배우’라는 타이틀로 그 여배우들과 그들의 연기가 빛을 발했던 캐릭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에디터의 주관을 듬뿍듬뿍 반영했습니다. 🙂


 신은수 
<가려진 시간>의 오수린

신은수의 등장은 분명 화려했습니다. 첫 영화 <가려진 시간>에서 강동원과 함께 주연을 맡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가려진 시간> 스틸 외엔 세간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던 열다섯 살의 신인배우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죠. 하지만 개봉 전의 떠들썩한 반응에 비해 영화는 그다지 많은 관객들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신은수를 ‘올해 놓치지 말아야 할 배우’ 리스트에 올린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영화를 그득그득 채운 눈부신 클로즈업이 더 많은 이들에게 닿지 못했다는 게 못내 아쉬웠달까요.

엄마를 잃고 새아빠와 함께 이사 온 낯선 섬에서 늘 ‘다른 세계’로 가는 법을 궁리하고, 스스로 만든 글자로 시를 쓰는, 보통 애들과는 조금 다른 여자애. 신은수는 외로운 아이의 옅은 우울뿐만 아니라, 마음이 맞는 친구와 어울리며 점차 불어나는 생기, 오랜 시간을 거슬러 어른의 모습으로 자기 앞에 나타난 친구에 대한 믿음 등 사춘기 근처의 소녀가 품을 수 있는 다채로운 감정을 그대로 이끌어냈습니다. 엄태화 감독은 오디션장에서도 졸린 내색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꾸밈 없는 모습에 이끌려 신은수를 캐스팅 했다고 하죠. 그녀가 보여준 ‘자연스러움’은 ‘첫’ 연기의 다듬어지지 않는 에너지에 신은수라는 개인이 품은 나른한 여유가 더해져 나온 결과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항나 
<4등>의 엄마

<4>은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지만 대회 때마다 4등에 그치는 소년 준호를 통해, 폭력을 감당하면서까지 성과를 추구하는 사회에 대한 성숙한 비판을 드러내는 영화입니다. 준호와 그에게 체벌을 가하면서 실력을 올리는 강사 광수(박해준)의 이야기를 주를 이룹니다. 하지만 <4등> 속 폭력의 주체는 광수만이 아닙니다. 그가 가하는 신체적 폭력만큼이나 준호를 괴롭히는 건 아들의 순위권 진입을 오매불망 바라는 엄마의 집착입니다.

엄마 역의 이항나 배우는 <변호인>에서 송우석 변호사(송강호)의 아내로 분했지만, 작품 활동이 드물어 조금 낯선 배우입니다. 이항나가 연기한 엄마는 4등에 그친 아들을 격려하기는커녕 싸늘하게 다그치기만 합니다. 다니지도 않는 교회를 쫓아다니면서 겨우 알아낸 ‘용한’ 코치자 자기 자식의 온몸을 멍들게 했다는 사실을 모른 체하는 건 물론, 수영을 그만두겠다는 아들에게 윽박을 지르고, 코치를 찾아가 아들을 다시 맡아달라고 애원합니다. 현실이라고 믿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한 이와 같은 행동들을, 배우 이항나는 아이들의 부담을 고스란히 체험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사실적으로 구현합니다. 매일 속을 끓이는 나머지 피로가 자글자글한 얼굴을 뚫고 뿜어져 나오는 집착의 기운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분노를 넘어 공포에 떨게끔 합니다.만약 ‘2016 문부장 영화제’가있다면, 여우주연상은 <4등>에서 엄마 역을 맡은 이항나에게 돌아갔을 것입니다.


 박명신 
<우리 손자 베스트> 숙희

2016년은 유독 배우 박명신의 연기를 많이 만날 수 있었던 해였습니다. <동주> 속 몽규의 어머니, <좋아해줘> 속 새 드라마 작가, <미씽: 사라진 여자> 속 10층 보모… 하지만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된 얼굴은 <부산행>에서 좀비가 득시글대는 자동문을 열어 자기만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이들을 벌하는 할머니일 테죠. 여기에 또 다른 캐릭터 하나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바로 올해 가장 잘 만든 영화이자 가장 처절하게 외면 받은 영화 <우리 손자 베스트> 속 숙희입니다.

초점이 흐린 눈빛으로 낮이고 밤이고 종로3가 주변에서 지난 세월에 대한 넋두리를 늘어놓는 여자. 스스로 말하길, 그녀는 “오줌 지리듯이 눈물이 질질 새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젊었을 적 기지촌 양공주 일로 먹고 살며 한때 미군 사이에서 낳은 아들도 부양했던 숙희는, 종로 일대를 어슬렁거리며 ‘빨갱이 타령’이나 해대는 정수(동방우) 곁에서 사랑을 갈구합니다. 사실 숙희는 <우리 손자 베스트>에서도 주변부 인물입니다. 교환(구교환)과 정수가 보수꼴통 노릇을 하며 허약한 존재를 부르짖는 동안, 숙희는 간간이 나타나 이 적적한 이야기에 파토스를 불어넣습니다. 어느 날 숙희는 (정수가 아닌) 한 노인에게 국밥집에서 김민기의 ‘가을편지’와 함께 사랑 고백을 받습니다. 국밥그릇에서 피어나는 김처럼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온기가 흐르는 이 대목, 숙희는 박명신 특유의 목소리보다 더 탁하고 날카로운 웃음소리만을 흘립니다. 그리고 사랑은 이어지지 않죠. 눈에 힘을 주지 않아도 상대방을 쏘아보는 듯한 느낌을 늘 안겨주던 박명신은, 투명하다보다 못해 공허한 눈빛으로 혼잣말을 하는 숙희를 통해 한국사회 주변부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모습을 절절하게 제시했습니다. <죽여주는 여자>에서 윤여정이 연기한 소영을 기억하는 분들에게 힘주어 권합니다.


 김소희 
<비밀은 없다> 최미옥

낯설고 새로운 문법으로 한국영화에 전혀 다른 공기를 퍼트린 <비밀은 없다>. 영화를 장악하는 건 뭐니뭐니 해도 제 커리어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 손예진의 몫이었지만, 독특한 형식을 뒷받침 하는 무정형의 퍼포먼스를 선보인 배우들의 공도 무시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미스터리의 키를 쥐고 있는 듯한 미옥 역의 김소희가 유독 돋보였습니다.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에도 그 어떤 영화 데이터베이스에서도 이름이 등재돼 있지 않았던 김소희는 그렇게 느닷 없이 한국영화계에 나타났습니다.

열여섯 중학생 미옥은 메말라 보입니다. 구르는 낙엽만 봐도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10대 여자애의 쾌활함 따윈 없는 태도. 그녀는 그렇게 건조한 얼굴로 자기의 유일한 친구인 민진을 추적하는 연홍(손예진)을 처음 마주합니다. “똥차 몰아요 뒤에 똥 엄청 싣고 다녀요”하고 유일한 피붙이인 아버지를 소개하는 미옥은 늘 억울한 듯 웅얼대듯 말하며, 관객에게 그녀가 용의자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불어넣으며 스릴러의 정서를 유지시키죠. 메마른 태도와 달리 미옥의 얼굴은 많은 순간 물기에 젖어 있었습니다. 비를 맞으며 귀가하던 중 민진이가 어떤 차를 타고 가는 걸 목격하고, 눈물을 쏟아내 퉁퉁 불은 얼굴을 하고 사건의 전말에 입을 꾹 다물기도 하죠. 동네 할머니에게 “얼굴에 피가 떡칠이 된” 모습을 들키기도 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쉽사리 감춰지지 않는 미옥의 감정이 끝까지 유지될 수 있는 건 김소희의 얼굴이 불러일으키는 기묘한 느낌 때문이겠죠. <비밀은 없다> 이후 소속사와 계약을 맺고 본격적으로 연기 활동을 시작한 그녀의 새로운 모습은 드라마 <솔로몬의 위증>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최수인 
<우리들> 이선

윤가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 <우리들>은 오프닝부터 아이들의 연기가 범상치 않을 거라는 확신을 대번에 심어줍니다. 주인공 선이 피구에서 팀을 짜는 가운데, 친구들한테 자기가 선택되기를 기다리는 장면인데요. 꽤나 오랫동안 다른 친구들이 이름이 호명되는 가운데에도 자기를 부르지 않자, 처음 얼굴에 생생하게 감돌던 기대가 점점 사그라지는 모습이 그대로 노출됩니다. 불과 1분 남짓한 시간에 폭우처럼 쏟아지는 감정의 다양한 층위가 고스란히 다가옵니다. 이토록 맑은 순간을 만든 배우는, 내년에 중학생이 되는 최수인 양입니다.

<우리들>은 예쁘고 괴로운 영화입니다. 여름방학 직전에 만난 아이들이 방학동안 서로 우정을 쌓아가는 모습이 마음을 따뜻하게 덥힌 다음, 개학하고 학교라는 시스템 아래 다시 들어오면서 어떻게 그 마음이 부서져나가는지까지 세세하게 들여다봅니다. <우리들>의 주인공 선이는 친구가 없습니다. 반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애들 무리에게 은근히 무시당하곤 하죠. 선이는 그 순간순간을 경험하며 일어나는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못합니다. 연출을 맡은 윤가은 감독은 배우들에게 연기에 대한 직접적인 디렉션을 주는 대신, 해당 상황에 대해 아이들과 충분히 대화를 나눈 다음 그때의 감정이 무엇인지 스스로 해석하기를 이끌고, 그걸 그대로 구현하기를 방향으로 연기 지도를 했다고 말합니다. 감독의 의견이 아닌 배우 저마다의 판단에서 나오는 감정이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더더욱 또렷한 일상의 순간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가장 큰 공은 배우의 연기에 있습니다. 지아(설혜인)와 따스한 여름방학을 보내는 행복에 겨운 얼굴, 갑자기 자기한테 등을 돌린 지아에게 어쩔 줄 몰라는 얼굴, 그리고 힘든 시간을 지나 지아가 “금을 밟지 않았다”고 말해준 뒤 서로 나란히 서 있을 때 피어나는 기쁨의 얼굴. 최수인은 선이가 느끼는 그 모든 감정을 모두 다른 표정과 몸짓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유인영 
<여교사> 추혜영

벌써 배우 커리어 13년 차에 접어들 배우 유인영에게는 늘 ‘발성’에 대한 지적이 따라다녔습니다. 모델 출신답게 훤칠한 키와 몸매, 고혹적인 마스크로 데뷔 때부터 크게 주목 받았던 그녀지만, 외모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게 들리는 높은 톤의 발성 때문에 배우로서의 커리어는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게 사실입니다. 아무쪼록 그녀는 꾸준히 배우 활동을 이어나가며, 연기에 대한 논란을 점차 줄여나갔습니다.

<여교사>의 추혜영은 유인영에게 어떤 전환점을 마련해줄 만한 캐릭터입니다. 아직도 확실하게 다듬어지지 않는 높은 톤의 목소리가 아주 잘 어울리는 인물이거든요. 학교 이사장의 딸로 자라 고생이란 모르곤 살았던 그녀는 아버지 덕에 손쉽게 고등학교 정교사가 됩니다. 혜영은 매우 살가운 사람입니다. 그런 척하는 게 아니라, 아무런 구김살 없이 자란 사람 특유의 쾌활함이 몸에 배어 있죠. 오히려 그 때문에 친해지고 싶은 효주(김하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합니다. 오랜 계약교사 생활에 지칠 대로 지쳐 있는 효주는 자기 계급과 처지에 대한 뒤틀린 심사로 매우 경직된 자세로 혜영을 대하죠. <여교사>가 흥미로운 건 효주의 경직된 자세와 ‘엄친딸’ 혜영의 쾌활함이 상충하면서 일어나는 긴장이 이야기의 동력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성숙한 외모와 아이 같은 태도와 말투의 혜영을 연기하는 유인영은, 지난 13년간 자신의 경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단번에 증명해 보입니다. 영화 크레딧이 오르자마자 지금껏 놓친 유인영의 지난 캐릭터가 궁금해질 정도로요.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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