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그해 처음으로 맞이할 것들에 큰 의미를 둔다. 가령, 새해 처음으로 읽을 책의 아무 페이지를 펼쳐 첫 문장을 통해 그 해의 전망을 점치기도 한다. 혹은, 새해 처음으로 듣는 음악이 그 해의 운세를 결정한다는 미신도 있다. 그래서인지 최근 3년간 1월 1일만 되면 우주소녀의 <이루리>라는 노래가 실시간 차트 1위에 등극한다. ‘이루리 이루리 다’라고 노래하는 후렴구 가사가 새해에는 모든 소원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많은 이들의 염원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기자도 올해 첫 곡을 이 노래로 시작했다.)
영화를 좋아하는 영화팬들에게도 새해 첫 영화를 무슨 영화를 볼 지 고민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예를 들어, 기자 주변에는 매년 12월 31일 폴 토마스 엔더슨의 <팬텀 스레드 (2017)>를 보는 지인이 있다. 알마 (비키 크립스 역)과 우드콕 (다니엘 데이 루이스 역)이 함께 새해 카운트다운을 하고 ‘Happy New Year’라고 외치는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을 잘 맞춰서 영화를 재생한다면, 영화 속 새해 카운트다운이 현실 속 카운트다운과 절묘하게 겹치는 점이 좋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의 분위기를 고려할 때 <팬텀 스레드>는 희망차게 한 해를 시작하게 만드는 영화는 아닌 것만 같다. 그래서 기자는 여러분에게 다른 영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2023년은 계묘년, 검은 토끼의 해다. 지난 한 해 뉴진스의 토끼 마스코트 ‘버니즈’가 국내 연예계를 흔들었던 것처럼, 토끼는 귀여운 이미지 때문에 문화의 아이콘으로 자주 활용된다. 귀여운 외모와 온순한 성격, 폴짝폴짝 뛰는 앙증맞은 움직임과 오물오물 먹이를 먹는 작은 입은 토끼를 사랑스러운 대상으로 그리기 충분하다. 당연히, 여러 영화에서도 토끼는 주된 소재로 사용된다. 귀여운 토끼들이 가득한 영화를 2023년의 첫 영화로 장식한다면, 그보다 더 사랑스러운 시작이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 함께 토끼로 가득한 영화를 알아보자!
<피터 래빗>: 이렇게 개구진 토끼를 봤나!
많은 사람에게 익숙한 베아트릭스 포터가 지은 동화 시리즈 ‘The Tale of Peter Rabbit’의 주인공 피터 래빗이 영화로 돌아왔다. 2018년에 개봉한 소니 픽쳐스의 <피터 래빗>은 2014년에 개봉한 <패딩턴>처럼 아동문학의 주인공을 실사화한 영화다. 두 영화의 큰 차이가 있다면, <패딩턴> 한없이 따뜻한 성장영화처럼 보이지만, <피터 래빗>은 왁자지껄 사고뭉치의 소동극이라는 점이다. 원작의 피터 래빗은 다양한 동물들과 함께 따뜻한 공동체를 형성하지만, 영화 속 피터 래빗은 그보다 훨씬 짓궂은 사춘기 소년에 가깝다.
피터는 토마스의 농장에 침입해서 한바탕 난장판을 만들고는 다른 동물 친구들과 도망치기 일쑤다. 심지어 이 토끼는 농장 주인 토마스를 감전시키거나, 블루베리를 먹여 알레르기로 독살하려는 시도까지 한다. 짖궂다 못해 못된 수준의 피터를 바라보며 어른이 된 여러분은 토마스에게 연민을 느낄지도 모른다. 마치, 둘리가 자신의 집을 무단 점거해서 기도 펴지 못하는 고길동 아저씨를 이해하게 되면 어른이라는 농담처럼 말이다. 하지만, 둘리보다 피터 래빗은 훨씬 귀여운 존재기에 그를 미워하기는 쉽지 않다. 미국판 성우로는 ‘더 레이트 레이트 쇼’의 진행자인 제임스 코든이 피터 역을 맡았다. 킥킥거리며 웃는 코든의 웃음소리가 개구쟁이 피터 래빗의 모든 소동극을 웃어넘기게 만든다. 다사다난한 작년에 작별 인사를 건네기에는 그보다 더한 <피터 래빗>의 소동극이 제격이다.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 웃음이 주는 강력한 힘
로버트 저메키스의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 (1988)>은 토끼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영화다. 물론, 만화계 스타인 로저 래빗 말고, 역사상 최고의 팜프파탈 캐릭터인 제시카 래빗이 더 많이 입방아에 오른다. (오해하지 말자. 제시카 래빗은 토끼가 아니라 인간이다) 캐릭터가 현실 세계에 돌아다닌다는 설정이 지금은 익숙할 수 있다. 가령, 게임, 영화, 만화 캐릭터들로 가득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 (2018)>이나, 마이클 조던 주연의 루니 툰즈 친구들과 함께하는 <스페이스 잼 (1996)> 같은 작품들 말이다. 하지만, 1988년 이 작품이 처음으로 등장했을 때는 그야말로 충격을 주었다. 주인공 에디 발리언트 (밥 호스킨스 역)이 창문을 여는 순간 거대한 코끼리 덤보가 등장하고, 추억의 베티 붑이 그에게 말을 거는 장면은 당대 수많은 관객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디즈니, 워너 브라더스를 비롯한 다양한 만화 캐릭터가 등장하는 점도 이 영화의 매력 포인트 중 하나다. 도날드 덕과 대피 덕이 서로 등을 진 채, 피아노를 치다가 한바탕 싸우고는 퇴장하는 장면은 1940-60년대 만화에 대한 짙은 향수를 자아낸다. 에디 발리언트가 툰 월드에 입성한 뒤에 미키 마우스와 벅스 버니와 함께 공중에서 떨어지는 장면은 어느 영화에서도 볼 수 없는 명장면이다. 하드 보일드 장르의 탈을 썼지만, 이 영화를 웃으면서 볼 수 있게 만드는 힘은 단연 로저 래빗에게 있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면서 어느 하나 제대로 해내는 것 없지만, 항상 웃음이 세상을 구원한다고 믿는 그의 믿음은 영화 가득 웃음기를 만들어낸다. 죽을 위험 앞에서도 사람들을 웃겨야만 한다고 말하는 로저 래빗의 ‘행복 바이러스’는 새해를 웃음으로 시작하려는 많은 이들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조조 래빗>: 겁쟁이가 아닌 토끼
<조조 래빗 (2019)>은 제목과 달리 토끼가 주로 등장하는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조조의 별명이 ‘래빗’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매일 상상 속 친구인 히틀러 (타이카 와이티티 역)을 보고 유대인을 괴물처럼 여기는 조조 (로만 그리핀 데이비스 역)는 나치즘을 동경한다. 조조는 나치에 성실히 복무하는 소년이 되기 위해 히틀러 유켄트 캠프에 참가한다. 히틀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조조는 사실 캠프에서 지시한 훈련 하나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10살 소년일 뿐이다. 토끼를 죽이면서 전투 기술을 익히자는 훈련에 오히려 조조는 토끼를 풀어주고는 도망치게 한다. 토끼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조조에게 단원들은 그를 ‘조조 래빗’ 즉 겁쟁이 조조라는 별명을 붙인다. 그러던 중 조조는 집에 몰래 숨어 들어온 유대인 소녀 엘사 (토마신 맥켄지)를 만난다. 이 불편한 동거는 어떻게 끝을 맺을까? 조조는 겁쟁이 토끼라는 오명을 지울 수 있을까?
홀로코스트와 나치즘은 영화사에서 가장 다루기 민감하고 어려운 소재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 (1993)>과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 (1997)>는 흥행에 성공하며 많은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나치즘을 다루는 방식 때문에 평단에서 호불호가 엇갈리는 작품이다. <조조 래빗> 역시 그런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현시대에 필요한 방식의 영화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토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조조가 선망하는 것은 마초적인 군인들과 전체주의의 나치다. <조조 래빗>은 남성성과 그로 인해 발발한 전쟁으로부터 작별을 고하는 방식으로 인물의 성장을 그린다.
조조는 이 영화가 끝나도 여전히 ‘래빗’ 즉, 겁이 많은 소년일 것이다. 하지만, 겁이 많고 정이 많은 성격은 그가 전쟁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답을 제시한다. 누군가를 해하고 밀어내지 않은 채, 사랑으로 품어주는 것이 용맹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겁은 많지만, 용감할 수 있다는 명제를 <조조 래빗>은 여러분에게 전달한다. 작년 한 해 우리는 수많은 비극을 목도하며, 자책하고 슬퍼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우리가 느끼는 무기력함과 두려움은 용감함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 2023년의 우리가 용감해질 방법은 폭력과 혐오가 아니라, 포용과 이해임을 <조조 래빗>을 보며 느낄 것이다.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