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22년 만의 첫 주연이다. 1999년 데뷔해 긴 무명시절을 보내고 영화 <내부자들>로 빛을 보기 시작한 조우진. 그는 16년 무명시절 동안 하지 못한 작품들을 몰아서 하기라도 하듯 매년 꾸준히 여러 편의 작품에 이름을 올리며 영화계의 다작왕으로 떠올랐다. 이번에 개봉한 영화 <발신제한>은 부단한 노력 끝에 만난 그의 첫 주연작이다. 영화는 은행센터장 성규가 출근길 아침 의문의 발신번호 표시제한 전화를 받고, 돌연 테러 용의자로 지목되어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되는 도심 추격 스릴러다.

첫 단독 주연작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명시절 동안 탄탄하게 쌓아온 연기 내공과 50여 편의 작품 활동으로 다진 캐릭터 소화력으로 높은 몰입도를 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의 캐릭터 소화력이 남다른 데에는 선과 악이 함께 깃든 얼굴도 한몫하는데, 이 때문에 스타일링에 따라 인상이 확확 바뀌어 버리곤 한다. 오늘은 영화 <발신제한> 개봉을 맞아, 조우진이 연기한 수많은 인물들을 선()과 악()의 얼굴로 나눠보았다.

惡 <내부자들> 조상무

충무로에 조우진 이름 석 자를 알리게 된 <내부자들>을 빼놓고 조우진 캐릭터를 논할 수 없다. 스틸컷만 봐도 '여 썰고, 저 썰고'가 들리는 듯. 무테안경 아래 서늘한 눈빛을 보니 한여름 무더위에 에어컨이 없어도 될 정도다.

善 <도깨비> 김비서

안경 하나 벗었을 뿐인데 인상이 이토록 달라지다니. 2016년 드라마가 방영하던 당시 <내부자들> 조상무와 <도깨비> 김비서를 연기한 배우가 같은 사람인 것을 알고 놀란 이들도 꽤 많았을 것이다. 조우진은 중독성 강한 말투로 극 중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내며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善 <더 킹> 태수 수사관

<내부자들>의 섬뜩한 눈빛도, <도깨비>의 잔망스러운 말투도 싹 잊게 해준 <더 킹> 속 조우진의 얼굴. 9:1로 넘긴 머리에 뿔테안경을 낀 그는 검사 박태수(조인성)를 보좌하는 수사관을 연기하며 순박한 매력을 보여주었다. 

善 <보안관> 선철

부산 기장을 무대로 한 이 작품에서 그는 부산 토박이이자 동네 여론 조성의 선봉장 선철을 연기하며 때 묻지 않은 얼굴을 보여준다. 후줄근한 아웃핏부터 수줍은 듯한 손가락 하트, 이마를 야무지게 덮은 앞머리까지 모든 게 완벽하다.

善 <시카고 타자기> 갈지석

사진만 봐도 모니터 뚫고 뛰어나오는 저 깨방정 표정을 보라. 갈지석은 출판계의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는 출판사 황금곰의 대표로, 마치 <도깨비>의 김비서가 직업만 바꾼 듯한 기시감을 주는 인물이다.

惡 <리얼> 사도진 변호사

이즈음 조우진은 충무로의 가장 핫한 배우 반열에 오른다. 영화 자체는 아쉬운 성적과 평가를 남겼지만, <리얼>에서 그는 상류 비즈니스 설계사인 변호사 사도진 역할을 맡아 돈이면 뭐든 다 하는 인물의 면면을 보여주었다. 

惡 <브이아이피> 검사

변호사에 이어 이번엔 검사다. 북에서 온 VIP가 살인사건 용의자로 지목되고 경찰과 국정원의 충돌을 다룬 이 작품에서 그는 경찰을 돕는 검찰청 검사를 연기한다. 전작에서와 비슷한 정장을 입고 비슷한 눈빛으로 보여준 냉철한 연기였다.

惡 <남한산성> 정명수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내부자들>에서 철천지원수였던 조우진과 이병헌이 <남한산성>에서 다시 만났다. 조우진은 병자호란 시기 조선 천민에서 청의 역관으로 변모한 정명수를 연기하며 이병헌과 다시 한번 대척점에 선 모습을 보여준다.

善 <부라더> 미봉

한동안 또 악독한 연기를 줄곧 해오던 그의 능청스러운 얼굴을 볼 수 있던 작품. 그는 집안은 안중에도 없는 형제를 대신해 종손 노릇을 하며 미래 종손이 되길 꿈꾸는 미봉을 연기했다. 예상치 못한 포인트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코믹 연기가 포인트. 

惡 <강철비> 최명록

이번엔 액션이다. <강철비>에서 그가 연기한 최명록은 북한 최정예 요원 엄철우(정우성)의 목숨을 호시탐탐 노리는 북한 암살 요원이다. 첫 액션 연기 도전이었음에도 정우성과 완벽한 호흡을 보여주며 극에 팽팽한 긴장감을 제대로 더했다.

善 <1987> 박종철 삼촌

<강철비>와 단 2주 간격으로 개봉한 영화 <1987>에서 조우진은 조카의 죽음에 울분을 터뜨리는 삼촌으로 분해 전작 속 최명록과 전혀 다른 결의 인물을 보여준다. 잠깐이었지만 몹시 인상 깊은 연기에 그가 캐릭터 장인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 작품. 

善 <미스터 션샤인> 임관수

김은숙 작가 작품에서 보는 조우진의 얼굴은 늘 선하고도 귀엽다. 그는 미국공사관의 역관 임관수를 연기하며 또 한 번 잔망미 넘치는 얼굴을 보여주었다. <내부자들>, <남한산성>에 이어 이병헌과 또 한 번 찰떡 호흡을 자랑한다.

善 <창궐> 박을룡

야귀떼가 창궐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창궐>에서 조우진이 연기한 박을룡은 백성을 구하기 위해 야귀에 맞서 싸우는 무관이자 의협심 넘치는 충신이다. <강철비>에 이어 또 한 번 훌륭한 액션신을 선사한 작품.

惡 <국가부도의 날> 재정국 차관

1997년 IMF를 소재로 한 이 작품에서 조우진은 재정국 차관을 연기한다. 그는 정부 관료를 대변하는 인물이자 IMF 협상을 주도하는 인물로, 하버드 MBA 출신의 엘리트다. 국가 위기의 순간에도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며 움직이는 캐릭터이지만 조우진은 이 캐릭터에 대해 선과 악을 나눠 연구하진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이 작품으로 청룡영화상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한다. 

惡 <마약왕> 조성강

러닝타임 139분의 영화에 단 세 장면 등장했을 뿐이지만 <마약왕>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인물은 조우진이 연기한 조성강이다. 조직폭력배에 마약중독자인 그는 시종 초점이 나간 눈으로 관객들을 오싹하게 만드는데, 조우진은 이 캐릭터를 위해 8kg을 감량하기도 했다고.

善 <돈> 한지철

<돈>에서 금융감독원 사냥개로 불리는 한지철은 금융계를 교란하는 자들을 집요하게 쫓는 금융감독원의 수석검사다. 돈보다 정의가 우선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이 인물은 어떻게 보면 고지식하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그러한 점 때문에 더욱 인간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善 <봉오동 전투> 마병구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를 영화화한 이 작품에서 조우진이 연기한 병구는 해철(유해진)을 만나 독립군에 몸을 담게 되는 마적 출신의 저격수로, 해철에 대한 충성심이 투철한 인물이다. 다른 건 다 차치하고라도 길게 늘어뜨린 머리와 콧수염만으로 캐릭터 변신은 확실히 했던 작품이다. 

善 <도굴> 존스박사

캐릭터 이름부터가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존스 박사를 떠올리게 하는 <도굴>의 존스 박사는 그를 오마주한 캐릭터다. 코믹하면서도 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낭만 가득한 인물로, 이 작품을 통해 오랜만에 조우진의 캐쥬얼한 착장을 볼 수 있었다. 

惡 <서복> 안 부장

역시 조우진은 정장이다. <서복>을 통해 다시 익숙한 모습으로 돌아온 그는 인류 최초의 복제인간 서복(박보검)의 존재를 은폐하기 위해 전직 요원(공유)에게 그를 안전하게 이동시킬 것을 제안하는 안 부장을 연기한다. 특유의 카리스마와 악랄함으로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으며 오랜만의 악역 연기를 선보인다.

<발신제한> 성규

여느 날과 같던 출근길이 지옥으로 바뀌어버린 상황 속 도심 테러의 용의자가 된 성규는 어떤 인물일까. 어딘지 차가워 보이는 눈빛과 잔뜩 찡그린 미간은 성규 역시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그게 뭐 그리 중요할까. 선과 악을 떠나 배우 조우진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스펙트럼의 인물들이 그저 놀랍고 오래도록 보고 싶을 뿐이다. 

씨네플레이 객원기자 B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