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에 혜성처럼 등장한 22살의 젊은 청년, 레오 카락스 감독은 2021년까지 단 6편의 작품만을 세상에 공개했다. 작품 사이 간격이 ‘강산이 변할 정도’인 그는 2012년 <홀리 모터스> 이후 9년 만에 신작을 들고 왔다. 오늘은 선글라스에 담배가 인상적인 감독, 레오 카락스의 필모그래피를 훑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사랑 3부작으로 낭만을 표현하던 그가 도그마 선언 이후 어떻게 변했는지, 또한 사랑이란 주제를 떠난 그는 어떤 영화를 만들었을까. 최신작 <아네트>에서는 모국어를 떠나 영어로 이야기를 연출하는 새로운 시도를 했는데, 이건 어떤 레오 카락스 감독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자신이 달라졌을 때에야 비로소 새로운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레오 카락스 감독. 영화 한 편, 한 편이 인생의 방점과도 같은 그의 필모그래피를 지금 바로 확인해보길. 

*국내 개봉이 아닌, 영화 최초 개봉연도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 (1984)
주연 드니 라방, 미레일 페리어

<소년 소녀를 만나다>(1984)

레오 카락스의 첫 장편 영화, <소년 소녀를 만나다>는 흑백의 어두운 파리를 배경으로 두 남녀의 만남과 외로움을 담고 있다. 주인공 알렉스(드니 라방)은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22살 청년으로 연인이 있었지만 절친에게 빼앗겼다. 그는 세느 강변을 배회하다 주운 스카프로 절친의 목을 졸라 죽이려 하지만, 결국엔 죽이지 못하고 돌아온다. 그리고 같은 날 저녁, 또 다른 주인공 미레이유(미레일 페리어)는 연인의 변심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이별의 순간을 관통하고 있는 두 사람은 운명적인 만남을 직감하고, 서로의 감정을 나눈다. 운명과도 같은 만남이었지만, 찰나의 교감은 근본적인 고독을 해결해주지 못했고, 두 사람은 서로의 슬픔까지는 나누지 못한다. 

알렉스의 설명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알렉스는 레오 카락스 본인이다. 그는 이후 <나쁜 피>, <퐁네프의 연인들>에서도 주인공 이름을 알렉스로 정한다. 드니 라방의 알렉스는 곧 레오 카락스 본인이었고, 그에게 사랑 3부작은 자서전과도 같았다. 특히 그의 첫 작품인 <소년 소녀를 만나다>는 레오 카락스의 자전적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으로 젊음이 사랑을 행할 때 이뤄지는 열정과 광기, 비극을 시처럼 표현해냈다. ‘함께 있으면 더 외로워져’라고 내뱉는 대사들은 감독이 그 시절 느꼈던 사랑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사랑의 낭만을 이토록 냉소적으로 풀어낸 영화가 있을까. “사랑은 죽음보다 차갑다”는 말을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이 먼저 떠올리지 않았다면, <소년 소녀를 만나다>의 제목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

감독 레오 카락스

출연 드니 라방, 미레이유 뻬리에

개봉 1996.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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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피 (1986)
주연 드니 라방, 줄리엣 비노쉬

<나쁜 피>(1986)

레오 카락스의 ‘찐팬’들이 꼽는 최고의 작품, <나쁜 피>는 사랑 3부작 중 2번째 작품으로, SF-갱 장르처럼 보이지만 지독한 멜로 영화다. 줄거리가 중요한 영화는 아니지만, 거칠게 요약하자면 알렉스(드니 라방)는 아버지가 빚 때문에 ‘미국 여자’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빚을 갚기 위해 STBO 백신을 빼돌리기로 한다. STBO는 사랑 없이 성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걸리는 바이러스로 둘 중 한 명이라도 사랑하지 않으면 두 명 다 걸려 죽음에 이를 만큼 치명적이다. HIV(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 우리가 흔히 ‘에이즈’라고 부르는 것에서 모티프를 따왔다. 영화에서 알렉스는 아버지의 동료인 마크와 한스와 인사를 나누게 되는데 그때 마크의 정부인 안나(줄리엣 비노쉬)에게 첫눈에 반하고 만다. 마크를 사랑하는 안나와 그런 안나를 사랑하는 알렉스기에 이 사랑은 결코 이뤄질 수 없다. 

그는 인터뷰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은 수많은 치장에 둘러싸여 있다. (중략) 그러한 것들을 다 벗겨내고 싶었다. 그러면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사랑만 남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라며 영화 속 인물들이 사랑의 언어를 속삭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아르튀르 랭보의 시처럼 여타 텍스트에 영향을 받지 않았냐는 질문에 “영화감독이 영화에 담는 건 결국 두 가지다. 하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질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이다”라고 말했다. 찍을 당시엔 알지 못했어도, 완성된 영화에는 그의 인생 모든 게 들어 있었다고. 

나쁜 피

감독 레오 카락스

출연 미첼 피콜리, 줄리엣 비노쉬, 드니 라방, 한스 메이어, 줄리 델피

개봉 1994.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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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네프의 연인들 (1991)
주연 드니 라방, 줄리엣 비노쉬

<퐁네프의 연인들>(1991)

레오 카락스의 이름을 들어본 적 있다면 아마 <퐁네프의 연인들>에서일 것이다. <퐁네프의 연인들>은 사랑 3부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가장 대중적인 문법을 따르고 있는 영화다. 그렇다고 할리우드식 사랑 영화라는 건 아니고, 철저하게 비주류 감성이었던 레오 카락스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그나마 난해하지 않은 정도다. 알렉스(드니 라방)는 파리 세느 강 위의 퐁네프 다리에서 노숙하며 살아가는 남자다. 미셸(줄리엣 비노쉬)은 첫사랑을 위해 그림을 그리며 거리를 방황하는 거렁뱅이 화가다. 두 사람은 외로움을 매개로 점점 가까워지며 잊고 있던 생의 기쁨을 되찾아간다. 그러나 시력을 잃어가던 미셸은 약이 개발되었다는 소식에 알렉스를 속이고 그를 떠나게 되고, 남겨진 알렉스는 3년간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교도소로 찾아온 미셸은 재회를 약속하고, 정말로 만나게 되지만 찬란한 시절은 미셸이 그를 떠났을 때 이미 사라진 채였다. 

그의 영화에서 몸짓 혹은 몸부림은 빠질 수 없는 요소로 특히나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두드러진다. 알렉스(드니 라방)와 미셸(줄리엣 비노쉬)의 사랑은 몸부림처럼 보일 만큼 격렬하고 고통과 희열이 뒤섞여있는 춤이다. 일반적인 사랑이 대화로 천천히 쌓아 올리는 탑이라면, 레오 카락스가 보여주는 사랑은 무용극이다. 사랑할 때는 괴성과 몸짓으로 감정을 쏟아내고, 분노할 땐 자해로 표출한다. 순간의 예술인 춤과 같이, 영화에서 감정은 축적되지 않는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다. 언어는 발화하는 순간 왜곡이 시작된다. 청자에게 도달할 즈음에는 이미 타인의 경험과 의견으로 굴곡져 있다. 하지만 몸 안에서 그대로 추출해내는 에너지, 몸짓은 내면의 감정을 왜곡 없이 보여준다. <퐁네프의 연인들>을 두려움과 경외, 순수함을 모두 느끼는 것도 이러한 복잡한 내면을 직접 마주했기 때문이다. 

퐁네프의 연인들

감독 레오 카락스

출연 줄리엣 비노쉬, 드니 라방, 클라우스 마이클 그러버

개봉 1992.04.18. / 2014.12.04.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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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 X (1999)
주연 기욤 드빠르디유, 예카테리나 고루베바

<폴라 X>(1999)

레오 카락스 영화 중 최초로 드니 라방이 주연을 맡지 않은 영화이자, 감독 인생 최초 흑역사인 작품, <폴라 X>. <폴라 X>는 성공한 작가 삐에르(기욤 드빠르디유)가 우연히 자신의 이복 누나 이사벨(예카테리나 고루베바)을 알게 된 후 그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맞이하게 되는 비극적인 사랑을 다루고 있다. 그의 작품에선 최초로 상류층인 삐에르는 외교관 출신의 어머니와 함께 노르망디의 저택에서 살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이복 누나인 이사벨을 만난 이후 삶의 빛을 잃어간다. 어머니의 죽음과 약혼녀와의 파혼으로 그는 이사벨과 함께 파리 근교의 빈민촌에서 동거를 시작한다. 

기존 그의 작품과 무척이나 다른 이미지를 갖고 있는 이유는 <폴라 X>가 소설의 이야기 구조에서 출발해 만든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으로 소설에서 모티프를 따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그리스 신화는 물론, 단테와 셰익스피어의 작품들까지 녹여냈다고 밝혔다. 실제로 <폴라 X>는 그가 19살 때 읽은 허먼 멜빌의 소설 <피에르 혹은 모호함>을 각색해 만든 작품이다. 영화 제목이 ‘폴라 X’인 이유도 책의 프랑스어 제목인 ‘Pierre ou Les ambiguïtés’(영문 제목은 Pierre Or, The Ambiguities)의 앞글자를 따온 것이다. X는 그가 열 번째 각색한 작품이라는 뜻에서 로마자로 10을 뜻하는 X를 붙였다. 그는 X는 부모 없는 아이들이나 금기를 뜻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여담으로, 그는 영화의 주연인 고루베바와 사귄 적이 있었는데, 그의 아이 나스타 고루베바 카락스를 입양했다. 고루베바 사망 후에는 홀로 키우고 있다. 

폴라 X

감독 레오 카락스

출연 기욤 드빠르디유, 예카테리나 고루베바, 까뜨린느 드뇌브, 델핀 쉬로

개봉 1999.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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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 모터스 (2012)
주연 드니 라방, 카일리 미노그, 에바 멘데스, 에디드 스꼽

<홀리 모터스>(2012)

한때 천재 감독으로 불리던 레오 카락스는 <폴라 X>의 실패로 ‘겉멋만 든 감독’으로 평가 절하당했다. 지금까지 쌓아온 명성은 운이었다는 듯 평단과 대중은 순식간에 그에게 등을 돌렸고 그는 무려 12년 동안 신작을 내지 않았다. 모두가 이제 레오 카락스 감독을 잊어갈 즈음, 그는 13년 만에 <홀리 모터스>로 돌아왔다. 영화는 그간의 혹평이 무색할 만큼 완벽했고, 사람들은 다시 찬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BBC 선정 21세기 영화 100편에 선정되고, 2012년 제65회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기도 했다. <홀리 모터스>는 가장 레오 카락스다운 영화였다. 줄거리를 요약하는 게 무색할 정도로 난해하지만, 드니 라방의 번쩍이는 연기와 그의 독특한 연출과 미장센이 관객을 스크린 속으로 끌어 당겼다. 

드니 라방의 연기는 언제나 수작이었지만, <홀리 모터스>에서는 걸작이었다. 번뜩이는 광인 연기를 펼쳐 보이는 드니 라방의 열연을 보고 있으면 이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라도 그의 감정이 스며드는 느낌이다. 많은 관객들이 <홀리 모터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그 에너지에 압도당해 평론가들의 글을 뒤적였다. 9개의 인물을 연기하며, 레오 카락스는 연기와 영화로 자신에게 의구심을 던지던 이들에게 대답한다. 그에게 영화는 인생과 동일선상에 놓인 단어다. 이동진 평론가는 이에 “영화라는 인생. 인생이라는 가면. 가면이라는 운동. 운동이라는 영화”라고 극찬하며 별점 5개를 남겼다. 

홀리 모터스

감독 레오 카락스

출연 에바 멘데스, 카일리 미노그, 드니 라방, 에디뜨 스꼽

개봉 2013.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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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네트 (2021)
주연 아담 드라이브, 마리옹 꼬띠아르

<아네트>(2021)

음악인을 꿈꿨지만 “음악이 나를 거부했다”고 말하며 결국 음악의 길을 포기한 그가 뮤지컬 영화로 돌아왔다. 그것도 모든 대사가 전부 노래로 되어 있는 송스루 뮤지컬이다. 첫 영어 영화이자 뮤지컬 영화인 <아네트>는 여러 의미로 독보적이다. <아네트>는 스탠드업 코미디언 헨리(아담 드라이버)와 소프라노 배우 앤(마리옹 꼬띠아르),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딸 아네트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뜨겁게 사랑했던 두 사람과 그의 딸 아네트에 관한 이야기라니. 레오 카락스 감독이 드디어 따뜻한 가족영화라도 만드는 걸까, 하고 기대하면 안 된다. 영화는 사랑하는 사이가 어떻게 파국으로 치닫는지를 굉장히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대개 뮤지컬 영화하면, 생기가 넘치고 희극적인 장면을 떠올리지만 레오 카락스 감독은 송스루 뮤지컬이란 장르를 통해 오히려 통념을 부쉈다. 

장르적인 특성과 언어를 배제하더라도 <아네트>는 기존 그의 영화와는 다른 지점들이 존재한다. 우선, 시작점이 다른데 <아네트>는 처음으로 그가 외부의 제안을 먼저 받아서 작업을 하게 된 경우다. 각본은 70년에 결성된 미국의 밴드, 스파크스가 맡았다. 그는 이번 BIFF 인터뷰에서 “이번 영화는 음악 때문에 시작한 것이다. 스파크스의 음악을 13살 때부터 사랑하고 들어왔다.”며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또한 딸을 키우는 아버지로서,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은 나쁜 아버지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고. <아네트>는 2021년 칸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아네트

감독 레오 카락스

출연 아담 드라이버, 마리옹 꼬띠아르

개봉 2021.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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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객원 기자 김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