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배트맨>은 배우 폴 다노가 봉준호 감독의 <옥자>(2017) 이후 첫 연출작 <와일드라이프>(2019)를 작업하고, 오랜만에 카메라 앞에 선 작품이다. 단순 복귀작을 넘어, 영화의 메인 빌런 리들러 역을 맡아 <다크 나이트>(2008)의 조커(히스 레저)에 필적할 만한 명연을 보여줬다. <더 배트맨>을 만나기 전까지 폴 다노가 지금까지 거쳐온 영화들을 한데 모았다.

<L.I.E.>

10대 초반 브로드웨이와 TV 드라마에서 경력을 시작한 폴 다노는 2001년 <L.I.E.>로 영화에서 처음 주연을 맡았다. 뉴욕의 고속도로 롱 아일랜드 익스프레스(Long Island Expressway, LIE)를 인용한 제목의 영화는, 남자에게 이끌리는 걸 깨닫고 있는 소년 호위(폴 다노)와 중년의 남성 소아성애자인 이웃 아저씨의 관계를 그린다. 자극적인 소재에도 온전히 성 정체성의 혼란을 통과하는 소년의 불안에 집중하는 폴 다노의 연기는 16세 시절에도 여간이 아니다.

<내겐 너무 아찔한 그녀>

에밀 허쉬와 엘리샤 커스버트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 <내겐 너무 아찔한 그녀>(2004)에선 우리가 익히 아는 안경 쓴 너드 이미지의 폴 다노를 만날 수 있다. 주인공 매튜의 친구들 중 하나인 클리츠(폴 다노)는 여자 앞에선 숙맥이지만 남다른 그것(!)을 가지고 있어 섹스 코미디의 잔재미를 주는 캐릭터다. 폴 다노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가장 가벼운 영화.

<테이킹 라이브즈>

캐나다 몬트리올의 한 마을에서 십수 년째 범행을 저지르고 있는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스릴러 <테이킹 라이브즈>(2004)에서 폴 다노는 바로 범인 마틴 애셔의 10대 시절을 연기했다. 차분하고 심약해 보이는 외모를 뚫고 광기를 발산해내는 폴 다노의 에너지가 오래전에도 무르익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폴 다노에 이어 성인이 된 마틴을 어떤 배우가 연기하는지 예상해보는 것도 <테이킹 라이브즈>의 감상 포인트.

<발라드 오브 잭 앤 로즈>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아내 레베카 밀러 감독과 작업한 <발라드 오브 잭 앤 로즈>(2005)에도 폴 다노가 출연했다. 하나뿐인 딸과 단둘이 자연에서 살아가는 잭(다니엘 데이 루이스)은 시한부 판정을 받고 딸에게 가족을 만들어주기로 한다. 폴 다노는 잭이 데려오는 애인 캐슬린의 두 아들 중 타디우스의 역. 뚱뚱하고 의기소침한 로드니와 달리, 타디우스는 시종 의뭉스러운 태도로 잭을 자극한다.

<미스 리틀 선샤인>

<미스 리틀 선샤인>(2006)은 막내딸 올리브(아비게일 브레스린)가 미인대회에 내보내기 위해 낡은 승합차를 타고 다니는 콩가루 집안의 이야기다. 기괴한 이론을 팔려는 대학강사인 아빠(그렉 키니어), 2주째 닭날개 튀김만 저녁 메뉴로 내놓는 엄마(토니 콜렛), 마약 복용으로 양로원에서 쫓겨난 할아버지(알란 아킨), 남자 애인한테 차이고 자살을 기도한 외삼촌(스티브 카렐), 그리고 전투기 조종사가 되기 위해 9개월째 말을 하지 않는 아들 드웨인(폴 다노). 드웨인은 왜 묵언수행을 깨고, 그가 내뱉는 첫마디는 무엇일까.

<데어 윌 비 블러드>

폴 다노의 존재를 전 세계에 각인시킨 걸작 <데어 윌 비 블러드>(2007). 석유업자 다니엘 플레인뷰(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농장을 두고 갈등하는 선데이 가문의 아들 폴과 일라이의 1인 2역을 맡았다. 본래 폴 다노는 비중이 적은 폴 역에만 캐스팅됐으나,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촬영 첫날 다노의 연기를 보고 그에게 1인 2역을 청하고 곧장 형제의 설정을 일란성쌍둥이로 바꿀 만큼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대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생애 최고의 명연을 선보이는 가운데에도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한 긴장을 만들어내는 폴 다노의 연기는 세상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믹의 지름길>

폴 다노는 2007년부터 조 카잔과의 연애를 시작했다. 미국 인디영화계를 대표하는 여성 감독 켈리 라이카트의 <믹의 지름길>(2010)은 다노와 카잔 커플이 호흡을 맞춘 ‘첫’ 작품이다. 토마스(폴 다노) 밀리(조 카잔) 부부는 새로운 정착지를 위해 오리건 사막을 건너는 세 가족 중 하나다. 밀리가 점점 묘연해지는 여정과 길에서 생포한 인디언에게 공포를 느끼는 가운데,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남편 토마스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전적으로 남성 위주 장르였던 웨스턴의 컨벤션을 뒤집은 작품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영화 속 무능력한 남성들은 차라리 필연적이다.

<나잇 & 데이>

비교적 작은 규모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폴 다노는 톰 크루즈와 카메론 디아즈가 호흡을 맞춘 액션 로맨스 <나잇 & 데이>(2010)를 통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도 발을 들였다. 작은 영화였다면 고지식해 보이는 안경과 듬성듬성한 수염이 거대한 음모를 꾸미는 악당이었겠거니 싶지만, 실은 두 주인공의 보호를 받는 고등학생 천재 발명가 역할.

<카우보이 & 에이리언>

<아이언맨> 1,2편을 연달아 성공시킨 존 파브로 감독의 2011년 작 <카우보이 & 에이리언>에서도 폴 다노를 만날 수 있다. 과거의 기억을 잃고 사막에서 깨어난 남자 제이크(다니엘 크레이그)와 그와 함께 괴생명체를 무찌르는 마을의 권력자 달러하이드 대령(해리슨 포드)이 주축이 되는 영화에서 폴 다노는 달러하이드의 망나니 같은 아들 퍼시 역을 맡았다.

<루비 스팍스>

<미스 리틀 선샤인>을 연출한 부부 감독 조나단 데이튼, 발레리 패리스는 다음 작품 <루비 스팍스>(2012)에 폴 다노, 조 카잔 커플을 나란히 캐스팅 했다. 카잔이 직접 시나리오를 쓴 영화는 로맨틱 소설을 쓰며 상상 연애 중인 작가 캘빈(폴 다노)이 작품 속 캐릭터 루비(조 카잔)가 현실에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로맨스를 그린다. 부부 감독이 만든 배우 커플의 영화가 판타지 섞인 귀여운 사랑 이야기라면 뭐가 달라도 다르달까.

<루퍼>

폴 다노는 배우 특유의 아우라보단 친근한 이미지가 앞서는 배우다. 그래서일까, 그가 조연을 맡는 영화에선 주로 주인공의 동료, 그것도 중반에 최후를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 브루스 윌리스, 조셉 고든 레빗의 액션 스릴러 <루퍼>(2012) 역시 마찬가지. 미래의 자신을 보고서도 그만 죽이지 못하고 사건의 소용돌이를 만드는 세스(폴 다노)는 작중 최고의 루퍼 조(조셉 고든 레빗)의 동료다. 루퍼는 미래에서 배달된 사람을 죽이는 킬러를 뜻한다.

<노예 12년>

19세기 중반 미국의 흑인 노예제도를 파고든 문제작 <노예 12년>(2013)에서는 백인 목수 존 티비츠를 연기했다. 자유 흑인에서 하루아침에 플랫이란 이름의 흑인 노예가 된 노섭(추이텔 에지오포)은 그나마의 동정심이 있는 농장주 윌리엄(베네딕트 컴버배치)에게 팔려오지만, 그걸 못마땅하게 여기는 목수 존(폴 다노)은 계속 노섭을 괴롭힌다. 악역을 맡은 폴 다노 특유의 출처 모를 음침한 캐릭터와는 결이 다른 노골적인 인종주의자의 표상이다.

<프리즈너스>

<프리즈너스>(2013)는 캐나다 영화 <그을린 사랑>(2010)으로 발표 당시 영화계의 주목을 이끌어낸 드니 빌뇌브 감독의 첫 할리우드 작품이다. 딸을 납치당한 켈러(휴 잭맨)는 유력 용의자 알렉스(폴 다노)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자 그를 추적하고, 형사 로키(제이크 질렌할)는 그런 켈러를 쫓는다. 10살의 지능을 갖고 있는 알렉스는 켈러에게 붙잡혀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범인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오묘한 태도로 켈러는 물론 관객의 긴장을 휘어잡는다.

<러브 앤 머시>

<러브 앤 머시>(2014)는 전설적인 밴드 비치 보이스의 브레인 브라이언 윌슨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폴 다노가 존 쿠색과 함께 브라이언 윌슨을 연기했다. 다른 전기영화보다는 실존인물과 싱크로율이 떨어지는 편인데도, 다노는 1960년대 전성기를 누리던 당시 걸작을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에 괴로워하는 청년기 윌슨의 불안을 끄집어내면서 실제 윌슨에게 극찬을 받았다.

<스위스 아미 맨>

다니엘 래드클리프와 호흡을 맞춘 <스위스 아미 맨>(2016)은 두 배우의 필모그래피 가운데서도 가장 파격적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무인도에서 길을 잃고 자살하려는 행크(폴 다노)는 살아 있는 시체가 된 매니(다니엘 래드클리프)를 만나 우정을 나누는 버디무비다. 더럽다는 말로는 부족한 기상천외한 설정이 그야말로 출몰하는 영화는 영리한 두 배우의 열연에 힘입어 우정이라는 테마를 온전히 빛내는 데에 성공한다.

<옥자>

폴 다노는 봉준호의 러브콜을 받은 할리우드 배우들 중 하나다. 넷플릭스와 손잡고 만든 <옥자>(2017)에서 슈퍼돼지 친구 옥자를 찾으려는 산골 소녀 미자(안서현)를 돕기 위해 온 환경단체의 리더 제이를 연기했다. 미자를 위해 한국까지 찾아왔다는 설정에 맞춰 비공개로 한국에 와 촬영 일정을 소화했다. 그동안 폴 다노가 보여준 선과 악을 오가는 이중적인 이미지가, 이 환경단체가 순수하게 옥자를 돕는 게 맞을까, 의심을 놓지 못하게 했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