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가 본인 이름보다 캐릭터 이름으로 유명한 경우가 종종 있다. 대부분은 그만큼 인상적인 캐릭터를 연기한 경우인데, 특히 장기간 한 캐릭터를 맡는 드라마로 유명해지면 더욱 그렇다. 이번에 <더 컨트랙터>라는 영화로 오랜만에 얼굴을 비춘 키퍼 서덜랜드 또한 한때는 '잭 바우어'로 더 유명한 미드 유행의 선봉장이었으니. 이번 포스트는 인터넷에서 유행하며 미드붐을 열었던 유명 미국 드라마 속 배우들의 근황이다. 너무 옛날이나 최근까지 범위를 넓히면 고르기가 벅차기에 2000년대 방영된 드라마 중에서 골랐다.
<24> '잭 바우어'
= 키퍼 서덜랜드
키퍼 서덜랜드는 80년대부터 꾸준히 활동한 배우지만 한국인들의 뇌리에 자리 잡은 건 누가 뭐래도 드라마 <24> 덕분이다. 제목처럼 24시간, 하루를 거의 실시간으로 구성한 이 드라마에서 키퍼 서덜랜드는 대테러기관 CTU 현장요원 잭 바우어를 맡았다. 테러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그럼에도 매번 현장에서 굴러야 하는 잭 바우어의 활약은 많은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런 그가 영화에서도 한 번쯤 큰 획을 그을 줄 알았지만, 아쉽게도 이후 출연한 영화들은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국내 개봉한 작품은 더더욱 적었고. 하지만 <지정 생존자>에서 정부 내각이 싹 다 사망하는 테러 사건으로 얼떨결에 대통령이 된 주택도시개발부 장관 출신 톰 커크먼을 맡으면서 다시 한번 전성기를 열었다. <24>에서 육체적 고군분투를, <지정 생존자>에서 정치적 고군분투를 하는 키퍼 서덜랜드를 보면, 어쩐지 힘들 상황일수록 연기력이 도드라지는 배우가 아닐까 싶어진다.
<프리즌 브레이크> 링컨, 스코필드 형제
= 도미닉 퍼셀, 웬트워스 밀러
과거 공중파에서 외화를 더빙해 방영하던 시절을 지나고, 처음으로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드라마를 뽑자면 단연 <프리즌 브레이크>다. 누명을 쓰고 사형수가 된 형 링컨과 그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에 교도소 청사진을 새기고 수감된 동생 스코필드의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석호필'이란 유행어를 만들고 여러 방송에서 패러디 될 만큼 인기를 모았다. 시즌을 거듭할수록 완성도가 점점 하락세를 그렸지만 그래도 시즌 1은 걸작이란 평가를 받았다.
스코필드를 연기한 웬트워스 밀러는 이후 연예계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자신을 좀 더 가다듬었다. 그는 우울증으로 점차 활동을 줄여왔고, 일 년에 한두 편 정도만 출연했다. 그러다 다시 연기자로 활약하기 시작한 건 드라마 <플래시>에서 캡틴 콜드/레너드 스나트 역을 맡으면서부터. 영화보다 더 치밀하게 세계관을 잘 짰다는 CW버스(DC코믹스 기반의 드라마 유니버스)답게 <플래시>와 연계되는 <레전드 오브 투모로우>에도 같은 역으로 출연했다. 이게 또 무슨 인연인지 모르겠지만, 형 링컨을 연기한 도미닉 퍼셀도 CW버스에서 활약 중이다. 마찬가지로 <플래시>에서 출연한 다음 <레전드 오브 투모로우>에 합류하면서 웬트워스 밀러와 호흡을 맞췄다. 가장 최근에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블러드 레드 스카이>에서 여객기를 하이재킹하는 테러리스트 버그로 출연했다.
<히어로즈> 히로 나카무라
= 마시 오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히어로붐'을 가져오기 전, 미드붐 시기에 히어로뽕을 채운 드라마가 있다. 세계에 살던 평범한 사람들이 초능력을 얻고 세상을 구하는 과정을 그린 <히어로즈>는 지금 보면 히어로 장르에 인종 쿼터, 그러면서 소시민적인 캐릭터 등등 시대를 앞서간 요소들로 가득하다. 이 <히어로즈>에서 가장 눈에 띄게 활약한 배우는 히로 나카무라를 연기한 마시 오카가 아닐까. 실제로도 배우보다 시각효과 전문가 경력이 더 길었던 그는 어디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히로 나카무라라는 캐릭터의 평범함과 그가 변화하는 과정을 폭넓게 표현했다.
당시 <히어로즈> 팬이었다면 마시 오카라는 인물을 찾아보고 그 비범함에 놀랐을지도 모른다. 컴퓨터 공학 학사 출신으로 ILM(시각효과 전문 회사)에 입사했다가 배우로 전향한 케이스니까. 여유가 있을 땐 배우와 ILM 업무를 병행하기도 했었다. 이후 그는 <하와이 파이브-0> 맥스 버그만 역으로 시즌 7까지 출연했다. 얼굴을 볼 수 있는 영화는 <메가로돈>이 마지막이며, <스파이 지니어스>에서 기무라 역으로 목소리 연기를 펼쳤다. 지금은 '모비우스 디지털'이란 회사를 설립해 <아우터 와일드>라는 SF 게임을 발매한 게임 개발자로서도 유명해졌다.
<CSI: 과학수사대> 길 그리섬 반장
윌리엄 피터슨
'미드붐'의 선두주자이자 최고참이라면 <CSI: 과학수사대>일 것이다. 글자 그대로 의문의 사건을 과학 기술로 수사하는 수사팀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건을 다뤄 인기를 모았다. 본 시리즈도 15년이나 롱런했고, 다른 지역을 배경으로 한 스핀오프들이 제작됐으니 얼마나 사랑받은 시리즈인지 짐작할 수 있다. 시리즈를 이끈 건 길 그리섬 반장을 연기한 윌리엄 피터슨. 시즌 1부터 시즌 9까지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장기 방영한 드라마가 일반적으로 갈등 때문에 팀이 와해되는 것과 달리 윌리엄 피터슨은 스스로 하차를 선택했다. 드라마가 길어지고 자신의 분량이 많아질수록 한 개인으로서 너무 커진 캐릭터의 정체성을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 2015년 드라마 <맨하탄>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휴식기를 갖다가 2021년 CSI 시리즈 20주년을 맞이해 <CSI: 베가스>에 합류하면서 팬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았다.
<위기의 주부들> 가브리엘 솔리스
= 에바 롱고리아
미드붐의 선봉대엔 당연히 <섹스 앤 더 시티>가 있지만, 1998년부터 방영작이니 여기선 잠시 미뤄두자. 그 다음 주자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내세워 공감대를 산 드라마로는 <위기의 주부들>이다. 행복해보이는 가정 뒤로 사실은 이런저런 속앓이를 하고 있는 주부들, 그리고 자살이란 미스터리적 요소를 섞은 <위기의 주부들>은 현지에서 특히 인기를 모았다. 극을 전면에서 이끄는 사람은 수잔 마이어 역의 테리 해처지만, 가브리엘 솔리스를 연기한 에바 롱고리아가 이 드라마의 최고 수혜자일 것이다.
에바 롱고리아는 <위기의 주부들> 이후 <텔레노벨라> 등 작품을 이어가긴 했지만, 배우 활동보다 교육 활동가로 열심히 일하고 있어 주연급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출연 영화들도 한국에 개봉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팬이라면 아쉬울 법. 그나마 VOD로 직행한 <도라와 잃어버린 황금의 도시>나 목소리 출연한 <보스 베이비 2>로 그리움을 달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현지에서 개봉한 <언플러깅>부터 차기작은 꽤 있는데 팬데믹의 여파인지 당장 개봉을 앞둔 작품은 없다. <위기의 주부들>처럼 억압받는 여성과 살인사건을 그린 <와이 우먼 킬>의 에피소드 한 편을 연출한 것도 눈에 띈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