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어쩌자고 <발레리나>는 봐가지고'. 원고 마감일에 쫓겨 광란의 타자를 치는 간간이 자학의 제스처로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있자니 등 뒤에서 뭔지 모를 싸한 기운이 느껴진다. 돌아보니 깊이를 알 수 없는 까만 동공의 고양이가 지긋이 나를 올려보고 있다. '쯧쯧'. 물론, 고양이가 혀를 찰리 만무하고, 한심하다 말하는 듯한 그 눈빛은 인간 감상의 투영이라는 것쯤 알지만, 나는 이 3.5kg의 생명체를 통해 종종 비인간의 시공간을 상상한다. 매주 같은 후회로 일관하는 이 부조리한 인간을 보며 나의 고양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인간의 부조리를 관조하는 동물의 마음이 궁금했을 당신에게 당나귀의 시선이 도착했다. 영화 <당나귀 EO>를 통해서다. 회갈색의 털, 차분한 걸음걸이, 생각에 잠긴 듯한 동그랗고 까만 눈망울의 당나귀 EO가 인간세계의 이기와 탐욕, 부도덕을 경고하기 위해 가장 낮은 곳에 임하셨사오니, 부덕한 우리 인간이여, EO를 영접할 준비를 하자.


포스터에 속지 말자

해외판 포스터(좌)와 한국어판 포스터

"제 이야기 들어보실래요?"라고 묻는 순진한 당나귀의 얼굴이 박힌 한국판 포스터를 보고 <당나귀 EO>를 <닥터 두리틀>류의 영화로 착각해 영화관을 찾는 이도 있겠으나, 스릴러물을 연상시키는 붉은 영상으로 시작되는 도입부에서부터 이러한 기대는 단숨에 무너진다. 도축장인가 싶었지만, 다행히 회갈색의 당나귀와 한 여인의 움직임은 서커스 공연의 일부다. EO는 서커스단의 당나귀다. 폴란드의 시골을 순회하며 공연에 동원되는 EO는 서커스단에서 모진 대접을 받지만, 자신에게 지극한 애정을 쏟는 인간 파트너 '카산드라'가 있기에 그럭저럭 버티는 중이다.

하지만 서커스단이 동물을 학대한다는 동물보호단체의 시위와 청원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EO는 동물보호자들의 손에 이끌려 서커스단에서 '구조'된다. 카산드라와는 생이별이지만 적어도 착취는 사라졌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까? 동물을 구조했다는 독선에 빠진 이들은 정작 구조 후 동물의 삶에는 별 관심이 없다. 비슷한 종으로 분류되어 함께 수용된 '구조'된 말들이 훤칠하고 튼튼한 몸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EO는 짐수레를 끌며 고된 노동에 시달린다. 이후 농장에서 일하며 다른 동물을 만나기도 하고, 장애 아동들의 체험학습장에서 나름 평화로운 시간도 보내지만, 카산드라를 잊지 못한 EO는 담장을 허물고 탈출을 감행한다.

착취 당하는 EO와 홀리건에 얼떨결에 끌려가 어리둥절한 EO

영화는 예상치 못한 탈출에서 시작된 EO의 시공간을 좇는다. EO는 탈출 후 야생의 한가운데로 떨어져 인간 사냥꾼들의 타깃이 되고, 홀로 낮과 밤을 걷는다. 흥분에 도취된 훌리건들에 의해 얼떨결에 축구팀 마스코트로 끌려다니다가, 모피 농장에서 매일 죽어나가는 철창 속 동물들을 마주하기도 한다. 살라미 공장으로 실려가던 중 한 남자와의 우연한 동행으로 머나먼 이탈리아 저택의 백작부인과 의붓아들의 수상한 관계를 맞닥뜨리는 등 고난의 순례를 이어가던 EO는 마침내 운명의 날을 맞이한다.


'패션 오브 동키(The Passion of the Donkey)' 당나귀의 고난의 행군

영화는 성자와 닮아있는 당나귀의 눈에 비친 인간의 모순과 부조리를 끊임없이 열거한다. 인간 세계의 폭력과 악덕을 온몸으로 관통하는 EO의 고난의 행군은 예수의 수난에 비견될 만하다. 그래서 혹자는 이 영화를 '패션 오브 동키(The Passion of the Donkey)'라 부르기도.

당나귀를 통해 인간의 모순과 부조리를 고발하고 진정한 인간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영화적 주제와 예수에 대한 은유는 원작에서 이어받은 유산이다. <당나귀 EO>는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당나귀 발타자르>(1966)를 재해석했고, <당나귀 발타자르>는 도스토옙스키의 장편소설 「백치」에서 영감을 얻었다.

<당나귀 EO>

성모 마리아를 베들레헴으로,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데려간 짐승 당나귀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관련된 온유함, 예속, 겸손의 상징으로 자주 언급된다. 원작 소설에서는 세속에서 미치광이 행세를 하면서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수도자를 일컫는 유로지비(바보 성자) 미쉬킨 백작이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그것을 당나귀로 각색한 것이 발타자르다. 소설 「백치」와 <당나귀 발타자르> 그리고 <당나귀 EO>의 결말은 모두 다르다. 구원받을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한 세상에서 「백치」의 미쉬킨 백작은 파멸했지만, 발타자르는 계속적인 착취의 끝에 한 노인을 만나 평안함에 이른다. <당나귀 EO>의 결말은 직접 확인하길 바란다.


주목해야 할 여섯 개의 이름들!

영화 주인공 EO의 이름은 당나귀 울음소리에서 착안한 것이다. 당나귀가 이오오오 울어서 이오로, 멍멍, 야옹이와 비슷한 계열이다. 특히,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놓치지 않고 챙겨봐야 할 여섯 개의 이름이 있다.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인 여섯 당나귀 Tako, Ettore, Hola, Marietta, Mela 그리고 Rocco다. 영화 주인공을 자세히 살펴보면 때론 회갈색이 더 진해지기도 연해지기도, 몸집이 커지기도 작아지기도 한다.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EO 당나귀>로 심사위원상을 받은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은 “나의 당나귀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수상소감을 시작해, 주연을 맡은 여섯 당나귀 모두를 지역별로 꼼꼼히 언급한 후 "이오오오오오(Eeeeeoo)"라는 당나귀어로 소감을 마무리해 박수를 받기도 했다.

스콜리모프스키 감독과 당나귀(좌), 그리고 꽤 괜찮은 노동 환경(우)

촬영은 전문 동물랭글러(미디어에 출연하는 동물을 섭외하고 훈련시켜 연기 활동을 돕는 역할) 아가타 코르도르의 감독 아래, 당나귀들의 동물권 존중을 최우선으로 하여 진행됐다. 촬영 시간은 절대로 8시간을 넘기지 않았으며, 동물들은 충분한 휴식 시간을 가졌다. 현장에는 수의사가 상시 대기하며 당나귀의 상태를 꼼꼼히 체크했다. 이 같은 노동 환경은 당나귀들의 컨디션을 최상으로 끌어올려, 명작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짐작된다.


말을 대신하는 연출과 음악

<당나귀 EO>

말을 대신하는 다양한 화면 구성과 음악에도 주목하자. 감독은 EO의 반응을 중심으로 샷/리버스 샷(Shot/reverse shot)을 구축하고, 주관적인 사운드 디자인을 활용해 관객이 EO의 관점에서 세계를 경험하도록 하는 일종의 영화적 마술을 펼쳐 놓는다. 바깥으로 향하는 렌즈 하나와 동물을 향한 또 다른 렌즈 하나는 EO의 옅은 숨소리까지 남김없이 포착하고, 말간 눈동자의 심연을 읽을 기세로 주인공을 클로즈업을 하다가 정처 없이 협곡을 내달리기도 한다. 자연 다큐와 실험 영화, 드론 AI 로봇 등을 동원한 미디어아트, VR 체험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연출은 감각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EO에 대한 비유로 다가오다가, 인간 본성에 내재한 잔인성과 파괴적 충동으로 구성된 혼돈의 시공간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인간 사회의 모순적이고 부조리한 이해관계에 따른 당나귀의 고난을, 아무 이유 없이 동물에 가해지는 고통을 바라보는 것은 꽤나 괴롭다. 저항하거나 복종하지 않고, 그저 한없이 깊고 맑은 눈으로 우리를 응시하는 당나귀의 시선을 마주할 땐 더욱더. 하지만, 동물 앞 인간이 가진 '원죄'로, 고통스럽지만 끝까지 우리는 이 영화를 봐야만 한다.

웃는 듯한 EO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