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것이 죄책감이 되는 삶이 있다. 그것은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아니다. 이미 떠나간 이들을 다시 떠올리고 그리워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강하게 짓누르는 그런 삶이 있는 것이다. 내가 아닌 그가, 내가 아닌 그녀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런 삶은 수백 번, 수천 번 그날의 선택에 대한 후회를 거듭하게 된다. 마치 남겨진 나의 삶이 떠나간 그의 삶이 이러했을지도 모른다는 거대한 가정법을 살아가는 느낌을 준다. 모든 죽음이 사자에 대한 강한 그리움을 주겠지만, 그것이 생존에 대한 후회와 같이 찾아오는 죽음들은 재난과 참사가 만든 것이다. 인재도 자연재해도, 나와 가장 가까운 이를 죽음을 내모는 현장이 불가항력적이라는 점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오랫동안 남겨진 자들의 마음을 짓누른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에게 그것은 2014년도의 세월호 참사이며, 8년 뒤 반복된 이태원 참사다. 일본에겐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의 상흔이 여전히 그들의 삶 속에 잔존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는 언제나 재난과 참사, 전쟁과 시대의 상흔을 함께 겪는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황폐화된 삶의 터전을 포착한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이 그랬고, 베트남 전쟁을 겪으며 미국의 참상을 고발했던 아메리칸 뉴웨이브도 마찬가지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 영화의 최근 9년은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를, 일본 영화의 12년은 동일본 대지진을 어떻게든 경유하고 있다. <부산행>(2016)을 기점으로 한국은 아포칼립스의 폐허로 그려지고, 이는 올해 여름에 개봉한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영화 또한 마찬가지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2018)부터 <드라이브 마이 카>(2021)는 직접적으로 지진의 장면을 삽입하거나, 원전의 이미지를 암시한다. 신카이 마코토의 <스즈메의 문단속>(2022) 역시 도쿄 한복판에 도사리고 있는 재난의 문이 열리면서, 일본의 지진 피해지역을 모두 쫓아 지진을 막아내기 위해 노력한다. <너의 이름은>(2016)에서도 두 커플 사이에 대지진이 직접적으로 인용된다.
그리고 이 글은 한국과 일본, 양국이 겪은 재난과 참사에 대한 가장 윤리적인 두 편의 영화를 이야기하려 한다. 하나는 10월 18일 개봉 예정인 조현철 감독의 <너와 나>(2023)이며, 다른 하나는 스와 노부히로 감독의 <바람의 목소리>(2020)다. <너와 나>는 세월호를 암시하는 수학여행 하루 전, 세미(박혜수)와 하은(김시은) 두 학생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바람의 목소리>는 반대로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지 8년 뒤, 가족을 모두 잃은 소녀 하루(모토라 세레나)가 숙모와 함께 살던 도중, 숙모의 의식불명 때문에 고향으로 길을 떠나는 이야기다. 두 영화는 서로 시제도, 처한 재난도, 심지어 재난을 향해 취하는 윤리적 태도도 상이하다. 사실 하나의 죽음과 참사에 대한 절대적인 윤리적 기준은 없다. 다만, 서로 다른 방식을 취하는 두 영화에는 공통적으로 생존자의 윤리와 애도로서의 시간과 장르 법칙이 담겨 있다. 이 지점에서 서로 공명하는 <너와 나>와 <바람의 목소리> 사이에는 정답이 없는 애도로부터, 옳은 방법을 찾기 위한 간절한 발버둥이 존재한다.
<너와 나>의 시점은 세월호 사건이 터지기 하루 전이다. 이는 수학여행에 대한 기대감으로 잔뜩 부푼 세미를 비롯한 아이들과, 부득이하게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수학여행에 함께하지 못하게 된 하은의 시간이다. 세미는 전날에 꾸게 된 기묘한 꿈(하은이 제주도의 들판 위에 죽은 듯이 놓여있는 형상) 때문에 불안해하며 하은에게 수학여행을 합류하기를 설득한다. 하은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수학여행을 가지 않으려 하고, 세미는 하은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것이 아닐지 하는 불안함을 느끼고 하은의 행적을 조사한다. <너와 나>를 작동하게 만드는 것은 두 소녀 사이의 불균형하게 놓인 사랑의 감정이다. 세미는 먼저 하은을 사랑하고 있고, 그래서 하은의 불참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빼앗기거나, 혹은 이 관계를 모두 망쳐버릴까 걱정하는 순수한 불안함이 존재한다. 하지만 동시에 <너와 나>에서 보여지는 세미가 하은에게 설득하는 과정은 서스펜스가 작동한다. 관객은 필연적으로 세미의 제안이 곧 세월호라는 재난으로 향하는 선택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밝은 노출광 속에 아름다운 2014년 4월 15일의 풍경과 두 소녀의 사랑 이야기에는 어떤 종류의 불안함이 잔뜩 서려 있다.
반면 <바람의 목소리>의 시점은 재난의 8년 후다. 하루의 삶은 8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위태롭다. 재난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섬 지역에서 숙모와 안정적으로 삶을 살지만, 마치 수면 위에 떠다니는 한 척의 보트처럼 그녀의 삶은 여전히 불안정하게 떨리고 있다. 하루는 자신을 간신히 붙잡고 있던 숙모가 의식불명 상태가 되자, 폐허가 되어서 허물어진 고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바람의 목소리>의 동력은 로드 무비에 있다. 이는 <너와 나>의 로맨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재난이 벌어지기 이전의 시간은 불가해하다. 마치 관계의 결말이 어떻게 날지 모르는 사랑 이야기와 같다. 하지만 재난이 벌어진 후의 시간에는 잔해만이 남아있다. 고로 <바람의 목소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그 흔적과 폐허를 향해 불안정하게 걸음을 떼는 것이다. 무작정 고향으로 향하는 하루의 여정에는 몇 명의 생존자들이 함께하다 사라진다.
<너와 나>의 회복은 버려진 강아지를 구출하며 일어난다. 세미는 하은의 비밀 대화 상대와 그녀의 비밀 일기장을 하은 몰래 조사한다. 이 과정에서 두 소녀는 서로에게 짜증을 내기도 하고, 서운해하기도 하며, 오히려 관계가 틀어질 위험에 처한다. 하지만 낮에 우연히 발견했던 강아지의 주인을 밤이 되어 찾아주는 매우 사소한 사건은 두 소녀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더 나아가 세미와 하은의 진심을 서로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사랑의 합일과 잃어버린 것의 회복은 더 이상 수학여행의 참석 여부를 두고 서로가 줄다리기하던 모든 감정싸움을 무마시킨다. 하은은 그렇게 살아남고, 세미는 자신의 꿈속 주인공이 결과적으로 자신임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너와 나>의 영화는 그저 그렇게 재난을 경유하여 두 인물의 관계가 봉합되고 마는 영화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앞서 언급한 재난의 시간 하루 ‘전’이라는 급박한 선택의 위기가 아직 남아있다. 가장 찬란해야 할 모든 시간과 풍경 속에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애도와 죽음의 그림자가 존재한다.
차라리 <너와 나>는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2002) 속 간절히 그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도 같다.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의 시간을 재구성한 <엘리펀트>는 사실적이고 서사가 배제된 학교의 시간을 제시하지만, 동시에 아무 의미 없이 역행하는 하늘을 통해 이 사건의 시간을 최대한 유예시키고 지연시켜, 끝내 당도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그와 유사하게 지연되고 끊임없이 미뤄지는 <너와 나>의 시간에서 조현철 감독은 단 하나의 메시지를 남긴다. 그것은 미처 전하지 못한 진심을 통해 관계가 봉합되는 것이다. 이는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의 가장 큰 부분이다. <너와 나>의 세미가 빅마마의 ‘체념’을 부르는 순간 두 인물이 행복하게 우도의 어느 초원을 거니는 장면으로 바뀌는 전환은 어쩌면 생존자의 죄책감을 뒤집은 사례다. 홀로 남겨진 하은의 죄책감은 살아남았다는 선택과, 끝내 전하지 못했던 진심이었을지 모른다. 조현철은 <너와 나>의 모든 영화적 시간을 지연시켜서라도 전하지 못한 언어를 눌러 담고 봉합하기를 선택한다. 그것이 생존자의 애도이자, 사자에 대한 윤리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스와 노부히로의 <바람의 목소리>에도 시간은 잠시 역행한다. 그것은 하루가 만난 동행인 모리오(니시지마 히데토시)를 따라 후쿠시마에 있는 그의 옛집을 방문할 때다. 모리오의 옛집은 8년 전 그때로부터 완벽하게 정지된 채 머물고 있다. 마치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이탈리아 여행>(1953) 속 폼페이의 화산재를 뒤집어쓴 형상처럼 그곳에는 8년 전 재난의 시간이 그대로 박제되어 있다. 모리오는 그 순간 단란했던 가정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의 사랑스러운 아내는 문을 열어 그를 맞이하고, 아이와 강아지는 마당에서 비치볼을 주고받으며 놀고 있다. 하지만 모리오가 하루를 발견하는 그 순간 비치볼의 바람은 빠져나가고, 그렇게 8년 전의 그날로부터 8년 뒤의 지금으로 되돌아온다. 마치 스와 노부히로는 <너와 나>의 시간적 지연이나 재현할 수 없다고 여기는 듯, 그는 하루의 여정을 다시금 진행한다.
하루의 여정이 멈춰 선 곳은 하루의 가족들이 머물던 폐허가 아니다. 그곳에서 하루는 오열하듯 눈물을 흘리지만 끝내 전하고 싶은 말을 옮기지는 못한다. 그녀는 다시 숙모가 머무는 섬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람의 목소리’라고 불리는 공중전화 부스로 향한다. 이 전화 부스는 망가져 있다. 발신자는 있지만 수신자는 없는, 정확하게는 답장은 돌아오지 않는 전화다. 하루는 전화를 붙들은 10여 분간의 통화에서 침묵과 고백을 이어갈 뿐 외치지 않는다. 덤덤히 읊조리듯 말하는 그녀의 다짐 사이로 바람들이 분다. 바람은 시간의 증거다. 이 바람은 진심과 시간을 잇는다. 살아남았기에 하지 못하고 응어리진 말은 바람에 흩날린다. 하루에게 답장은 필요하지 않는다. 그녀의 여정에서 얻은 하나의 교훈은 죽은 자의 몫까지 곱절로 밥을 먹어야 한다는 만삭의 임산부와 말 없는 트럭 기사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죽은 자들의 시간까지 곱절로 살아가며, 삶으로 진심을 전한다.
<너와 나>와 <바람의 목소리>는 시간에 대한 서로 다른 재현으로 재난을 바라본다. 이는 두 영화가 대척점에 놓인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간의 지연과 시간의 흐름 사이에서 생존자가 건네고 싶은 응어리진 언어다. 남아있는 자들이 먼저 떠난 이들의 가정법으로 살아가야 한다면 혹은 남아있는 자들이 이전부터 확인하길 원했던 말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을 통해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월호도, 이태원도, 동일본 대지진도. 남은 우리에게는 여전히 하고픈 말이 있고 듣고픈 말이 많다. 그리고 두 영화는 시간의 다양한 흐름 속에서 그 말들의 일부를 조금이라도 가닿게 하려 간절히 노력한다.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