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있어 일제강점기는 아직까지도 전범국 일본의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을 받지 못한 비극의 역사로 남아 있습니다. 동시에 창작자들에겐 호기심을 건드리는 미지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여러 편의 한국영화가 일제강점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다뤄왔습니다. 최근 개봉한 <군함도>를 놓고도 역사를 왜곡했다는 둥 제작진의 의식이 부족하다는 둥 이런저런 논란이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숱하게 만들어질 겁니다. 아래에 소개하는 영화들은 일제강점기를 나름의 기준으로 최대한 조심스럽게 연출했다 평가 받는 작품들입니다. 네이버 N스토어에서 8월5일(토)부터 11일(금)까지 일주일간 할인 이벤트도 진행합니다.
눈길 감독 이나정 출연 김향기, 김새론, 김영옥, 조수향, 서영주 제작연도 2015년
1944년일제강점기말, 부잣집 막내딸에 공부도 잘하는 영애(김새론)는 일본에 유학을 가게 됩니다. 영애를 동경하고 있던 종분(김향기)은 느닷없이 들이닥친 일본군의 손에 이끌려 행선지를 알 수 없는 열차에 던져집니다. 얼마 뒤 유학간 줄 알았던 영애가 동승합니다. 두 소녀는 일본군 성노예가 되어 끔찍한 날들을 보냅니다.
지옥 같은 곳에서 그들을 살게 하는 것은 서로의 온기뿐입니다. 전쟁이, 끔찍한 폭력이 언제 끝이 날까 소녀들은 고대했을 겁니다. <눈길>은 현재까지도 유효한 이슈에 조심스럽게 접근하며 참혹했던 1940년대를 (영화 제작이 완료된 시점인) 2015년의 지금과 연결합니다. 소녀들은 아직도 혹독한 겨울을 나고 있습니다. ▶<눈길> 바로보기
한 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동갑내기 사촌 윤동주(강하늘)와 송몽규(박정민). 동주는 시인이 되길 꿈꾸지만 몽규는 신념을 위해 거침없이 몸을 던지고자 합니다. 혼돈에 빠진 나라를 떠나 일본으로 유학 간 두 사람은 더더욱 다른 길을 걷습니다. 동주는 시를 통해 절망을 극복하려 하고, 몽규는 가열차게 독립운동에 매진합니다.
참상을 대하는 방식은 달랐지만, 윤동주와 송몽규는 자신의 주관과 태도를 고수하며 의연히 일제의 압박을 버텨냈습니다. 시를 쓰며 부끄러움을 말하는 윤동주는 무력 사용을 통한 운동만이 저항 방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섬세한 시나리오, 간결하고 아름다운 촬영이 영화의 서정을 돋웁니다. ▶<동주> 바로보기
1925년, 조선 최고의 포수로 이름을 날린 천만덕(최민식)은 산속 깊이 숨어 늦둥이 아들 석(성유빈)과 지냅니다. 석은 아버지가 호랑이 사냥을 계속하지 않는 것에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한편, 조선을 침탈한 일본군은 지리산 산군으로 인간의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이 된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를 수배 중입니다. 야심 있는 젊은 포수 구경(정만식)은 앞장서 ‘대호’ 사냥에 나섭니다.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와 호랑이를 지키려는 늙은 포수 만덕은 비슷한 존재입니다. 영화는 근대의 미명에 떠밀린 정신과 의식을 느리고 진득하게 애도합니다. 일제의 흉험함에 스러져간 조선의 얼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네요. ▶<대호> 바로보기
1937년, 조선총독부 1급 서기관 해명(박해일)은 절친한 친구 신스케(김남길)와 놀러간 곳에서 만난 신비로운 댄서 난실(김혜수)에게 매혹됩니다. 해명은 간신히 구애에 성공해 난실과 연인이 되는데 어느 날 난실이 싸준 도시락이 총독부에서 폭발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난실도 연기처럼 사라져버립니다. 해명은 난실을 찾아 경성을 헤맵니다.
일제강점기를 오락영화의 무대로 만든 드문 시도입니다. 주인공 해명은 독립운동엔 관심이 없고, 친일파 아버지 덕에 아쉬울 것도 없이 사는 한량입니다. 영화는 한량 주인공과 그의 로맨스를 빌어 포장이 화려할수록 공허해지고, 멀어지고자 할수록 시대에 근접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드러내며 과연 개인의 행복이 정치적 지형과 무관하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인지 질문합니다. ▶<모던 보이> 바로보기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문제는 비단 우리만의 것이 아닙니다. 다큐멘터리 <어폴로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납치돼 성노예로 끌려간 20만명 이상의 ‘위안부’ 중 한국의 길원옥 할머니, 중국의 차오 할머니, 필리핀의 아델라 할머니에게 주목하며 그들의 삶을 되짚습니다. 길원옥 할머니는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하며 수요집회에 나서고 있습니다. 차오 할머니와 아델라 할머니는 가족들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으려 용기를 냅니다.
<어폴로지>는 할머니들의 슬픈 과거에만 집중하지 않습니다. 할머니들의 현재가 어떠한지, 과거의 상처를 회복하고자 할머니들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도 주목합니다. 죄책감과 수치심은 할머니들의 것이 아닙니다. 전범국 책임자들의 것이어야 합니다. 동아시아 전역에서 벌어진 일본군 성노예 피해는 할머니들만의 이슈가 아닙니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 사례를 제대로 조명하고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보상을 받아내는 것은 동시대를 사는 모든 이들의 이슈가 되어야 합니다. 현재 생존해계신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할머니들은 37명에 불과합니다. ▶<어폴로지> 바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