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9일, 재개봉한 <히트>를 보려던 관객들은 혼란에 빠졌다. 상영 한 시간 전에 영화 상영이 어렵다는 연락을 받았던 것. 수입사 측의 문제로 상영이 어려워졌다는 소식에 관객들은 그저 화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극장에 영화가 걸리는 데는 많은 이들의 노력이 필요한데, 가끔은 과한 노력이 관객들에게 화를 입히기도 한다. 기껏 영화를 보러 왔더니 한국만의 '특별한' 상영본일 때, 관객들은 힘이 빠지거나 분노하기 마련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걸까. 그동안 국내에서 있었던 '한국판' 상영본들의 이야기로 그 이유를 알아보자.

이 장면은 어디로? 편집

과거 가장 흔하게 일어났던 원본 훼손 방식이다.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상영 시간을 줄여 회차를 늘리거나, 원하는 등급을 받기 위해 영화의 장면을 들어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제5원소> 개봉 당시 내한한 뤽 베송 감독이 영화가 편집됐다는 사실을 알고 모든 일정을 취소했던 전례도 있다. 간혹 편집이 됐다 해도 한국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인터내셔널 버전'인 경우도 있다.

<윈드 리버>

<윈드 리버>는 가장 최근에 일어난 '최악의 편집' 사태라 할 수 있다. 지난 9월 개봉한 <윈드 리버>는 111분 상영본으로 공개됐다. 일부 관객은 미국 웹사이트에 등록된 '상영시간 107분'과 비교하며 의문을 제기했다. 배급사 측은 '1월 선댄스 영화제와 2월 베를린 영화제에서 공개한 인터내셔널 버전'이라고 대답했다. 107분 상영본은 칸 영화제에서 공개하고 북미에서만 개봉하는 버전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국내 상영본이 '인터내셔널 버전'에서 40초가량 편집한 결과물이라는 게 밝혀졌다. 삭제된 장면은 폭행·강간을 담고 있었다. 배급사 측은 '집요함이 불편했다'는 이유로 북미 제작사를 직접 설득해 편집했다고 해명했다. 문제는 극장판 개봉 후 일주일 만에 107분짜리 북미 상영본을 감독판으로 또 개봉했다는 것. 편집 사실을 숨긴 점, 일주일 만에 다른 버전을 개봉한 점 때문에 배급사는 관객들의 강력한 비판을 받아야 했다.

윈드 리버

감독 테일러 쉐리던

출연 엘리자베스 올슨, 제레미 레너

개봉 2016 미국, 영국, 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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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리의 꿈>

애니메이션은 보통 더빙판과 자막판 두 버전으로 개봉한다. <부도리의 꿈>도 그랬다. 특이한 건 더빙판에서 10분이나 편집됐다는 것. 108분인 원본과 달리 국내 DB에는 90분으로 등록돼 있다. 이 순해 보이는 애니메이션에 폭력성이나 선정성이라도 담겼던 걸까? 수입사 측의 해명은 "오랜 시간 집중하기 어려운 어린이 관객들을 배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연히 일반 관객은 물론이고 학부모들도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개봉 당시 자막판, 수입사 측의 명칭을 빌리자면 '감독판'은 서울 인근에서도 딱 2곳에서 상영됐다.

부도리의 꿈

감독 스기이 기사부로

출연 오구리 슌, 쿠츠나 시오리, 에모토 아키라

개봉 2012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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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

지금이야 관객들이 인터넷으로 정보를 교류하니 이런 무단 수정을 빨리 알아챈다. 하지만 2002년 3월 1일에 개봉한 <알리>는 이틀 후인 3월 3일에서야 무단으로 편집된 상영본이란 게 보도됐다. 그 분량은 자그마치 28분이었다. 151분짜리 영화가 123분으로 둔갑했다. 배급사 측은 "우리 정서와 맞지 않아 지루한 부분을 삭제했다"라지만 무려 28분을 덜어낸 일은 관객들에게 비난받기에 충분했다. 

알리

감독 마이클 만

출연 윌 스미스

개봉 2001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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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의 보디가드> & <블랙북> & <라 비 앙 로즈>

8월 끝자락에 개봉해 쏠쏠한 흥행 성적을 올린 <킬러의 보디가드>는 아예 두 가지 버전으로 심의를 받았다. 그리고 각각 시사회를 열어 관객들의 피드백을 받았다. 그 결과 잔인한 장면 10초가 삭제되고 블러 효과를 입힌 15세 버전으로 개봉했다.

킬러의 보디가드

감독 패트릭 휴즈

출연 라이언 레이놀즈, 사무엘 L. 잭슨

개봉 2017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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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사례를 보면 대형 배급사나 수입사만 이런 짓을 저지르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굿나잇 앤 굿럭>, <버블>, <더 퀸> 등 예술영화를 적극적으로 수입하던 한 영화수입사도 <블랙북>을 145분에서 10분 정도 편집해 개봉했다. 그 1년 뒤엔 <라 비 앙 로즈>의 140분 중 12분을 삭제해 128분으로 만들기도 했다.

블랙북

감독 폴 버호벤

출연 캐리스 밴 허슨, 세바스티안 코치, 돔 호프먼

개봉 2006 네덜란드, 영국,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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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비 앙 로즈

감독 올리비에 다한

출연 마리옹 꼬띠아르

개봉 2007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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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뽀얀 화면은 무엇인고, 블러
담배를 피우는 장면에서 이렇게 쓰이기도 한다.

블러는 화면의 특정 부분을 뿌옇게 만들어 가리는 효과를 말한다. 가까운 예로는 광고나 예고편 등에서 담배를 가린 걸 생각하면 된다. 모자이크보다는 이미지에 영향을 덜 주면서 자극적인 부분을 가리는 방식이라 편집 대신 자주 사용되곤 한다. 

<퓨리> & <채피> & <언프렌디드: 친구삭제>

블러 수정이 가장 '핫'했던 시기는 2014년 말부터 2015년 초이다. <퓨리>, <채피>, <언프렌디드: 친구삭제>가 연이어 폭력적인 장면을 블러 처리했다. 공교롭게도 세 작품 모두 15세 관람가를 받았기 때문에 등급 때문에 블러 처리했다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퓨리

감독 데이비드 에이어

출연 브래드 피트, 로건 레먼, 샤이아 라보프

개봉 2014 미국,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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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두고두고 회자되는 건 <채피>다. 다른 영화들은 그래도 블루레이 등으로 무수정 버전을 볼 수 있으나, <채피>는 그마저도 블러 처리된 버전이 발매되면서 국내에선 공식적으로 무수정 버전을 볼 수 없다. 영화가 좋은 평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팬들이라면 아쉬울 수밖에 없다.

<채피> 속 블러 효과
채피

감독 닐 블롬캠프

출연 샬토 코플리, 휴 잭맨, 시고니 위버, 데브 파텔

개봉 2015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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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시에르토>

<그래비티>의 알폰소 쿠아론이 제작을, 그의 아들 조나스 쿠아론이 감독을 맡은 <디시에르토>는 사막을 횡단하는 밀입국자와 감시자를 자처한 미국인의 이야기를 다룬다. 국내에서 원체 조용하게 개봉했고 극장에서 관람한 관객들이 '블러'가 영화를 망쳤다고 후기를 남기면서 완전히 외면당했다. 한 관객은 "블러가 너무 많아서 오히려 더 잔인하게 느껴진다"며 상상의 묘미를 만끽했다고 비꼬기도 했다.

디시에르토

감독 조나스 쿠아론

출연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제프리 딘 모건, 알론드라 히달고, 디에고 카타노, 마르코 페레즈, 오스카 플로레스, 다비드 로렌조

개봉 2015 멕시코,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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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포매니악> & <러브>
포스터마저 블러 효과를 준 바로 그 영화.

반면 '가리지 않고는' 개봉할 수 없었던 영화들도 있다. 국내 심의상 노골적인 성관계나 성기 노출 장면 등은 상황에 따라 '제한상영가'를 받고 일반 극장에서 개봉할 수 없다. 제목부터 '여성 색정광'을 뜻하는 <님포매니악 볼륨 1>과 <님포매니악 볼륨 2>는 장면 편집은 하지 않았지만 블러를 쓰지 않고는 개봉할 수 없었고, '무삭제 유수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11월 2일 개봉한 <러브> 역시 블러를 피해 갈 수 없었다. 영화제에서 먼저 관람한 관객이 "이 영화는 한국에서 영화제 말고는 원본을 볼 수 없겠다"라고 남긴 후기처럼 주인공 연인이 관계를 맺는 장면이 편집, 블러로 최대한 덜 선정적이게 수정됐다. 특히 3D로 촬영된 영화인데도 3D로 볼 수 있는 극장이 하나도 없다는 게 팬들의 아쉬움을 샀다.

님포매니악 볼륨1

감독 라스 폰 트리에

출연 샤이아 라보프, 샤를로뜨 갱스부르, 스텔란 스카스가드, 스테이시 마틴

개봉 2013 덴마크, 독일, 프랑스, 벨기에,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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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감독 가스파 노에

출연 칼 글루스맨, 아오미 뮈요크

개봉 2015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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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야 할 뒤통수가 안 보여, 화면비 변경

국내 개봉에 아무리 여러 변수가 있다 해도 화면비가 변경되는 경우는 극도로 드물다. 하지만 몇몇 기술적인 문제나 원본을 수입하는 형태에 따라 화면비율이 이상해지기도 한다. 영화는 대개 1.85:1(비스타비전)과 2.35:1(시네마스코프) 비율을 사용한다. 화면비가 달라지면 경우에 따라 영상이 잘려나가거나 억지로 화면비율을 맞춰서 상하·좌우에 레터박스(흔히 말하는 블랙바)가 들어가게 된다.

<더 문>
당시 극장에서 관람한 관객의 후기

샘 록웰이 출연한 SF 영화 <더 문>은 2.35:1, 시네마스코프 비율로 촬영됐다. 하지만 국내 상영본은 1.85:1, 비스타비전으로 상영됐다. 감독의 의도를 중시하는 예술영화 계열의 관객 특성상 꽤 민감한 문제였다. 배급사 측은 자막을 입히는 작업 중 문제가 생겨 화면의 좌우가 잘려나갔다고 사과했다. 물론 극장에서 관람하려다 이 소식에 발길을 돌린 관객의 마음까진 잡진 못했다.

더 문

감독 던칸 존스

출연 샘 록웰, 케빈 스페이시

개봉 2009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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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2013년 미국 아카데미에서 남우주연상(매튜 맥커너히)과 남우조연상(자레드 레토)을 모두 석권한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은 국내 공개 당시 1.85:1 비율이었다. 개봉 직전, 원본은 2.35:1이란 소문이 나면서 관객들의 항의가 이어졌고, 수입사 측은 "처음 계약을 하면서 받은 자료에 1.85:1로 명시돼있었다. 미국 상영본의 화면비가 다르단 걸 알았을 땐 개봉일을 잡은 후였다"고 설명했다. 다행히 수입사 측은 개봉 전에 원본을 수입, 상영하는 절차를 밟았다.

왼쪽이 원래 화면비, 오른쪽이 수정된 화면비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감독 장 마크 발레

출연 매튜 맥커너히, 제니퍼 가너, 자레드 레토

개봉 2013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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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고질라>

<신 고질라>는 아주 특이한 경우다. 2.35:1로 촬영한 영화를 2.35:1 스크린에서 틀기는 했다. 문제는 상영본이 2.35:1 화면 위 아래에 블랙바가 들어가 있는 상태의 16:9 비율로 고정돼 있었다는 점이다. 극장의 스크린은 보통 1.85:1이나 2.35:1에 맞출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여기에서 16:9 상영본을 틀면 좌우에 블랙바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 결국 영상의 상하좌우 모두에 블랙바가 생기게 된 셈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미지를 준비해봤다.

2.35:1 모니터에서 16:9 영상을 틀었을 때(왼쪽) / <신 고질라> 16:9 상영본을 틀었을 때 (예상도)

이는 수입사 측에서 애초 극장 상영본이 아닌, VOD용 상영본을 극장 상영에 썼기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다. 와이드TV 비율인 16:9에 맞춘 상영본이 극장에 걸렸으니 스크린과 맞지 않았던 것. 심지어 개봉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이 상영본을 틀었다고 하니 아예 극장 상영본을 수입하지 않았던 것이다.

수입사는 이후 "1.37:1 플랫으로 좌우상하 여백 발생, 마스킹 커튼 작동X, 이는 감독의 의도에 의한 것"이라는 문구를 상영관 앞에 내걸었으나, 일본 상영 당시엔 2.35:1 시네마스코프 스크린에 맞춰 상영됐다는 사실이 드러나 더 큰 욕을 먹었다.

신 고질라

감독 안노 히데아키, 히구치 신지

출연 하세가와 히로키, 다케노우치 유타카, 이시하라 사토미

개봉 2016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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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에디터 성찬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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