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날수록, 영화를 볼 때에 여성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줄어들게 된다. 그게 차라리 바른 상태인 것 같다고 느끼는 지금, 내 마음에 오랫동안 자리한 한국영화 속 여자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봤다.



<고양이를 부탁해>
태희
배두나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스무 살. 세상이 떠나가라 다함께 웃고 떠들 줄 알았던 친구들이 각자의 삶으로 흩어지고, 태희는 나름 부유한 집안 덕에 다른 애들보다는 여유롭게 주변을 관찰하며 미래를 궁리한다. 수전노 같은 아버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가족들이 지긋지긋하지만, 여전히 맑은 얼굴로 조금씩 지쳐가는 친구들을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가만 듣는다. 그리고 가족을 박차고 나갈 용기를 얻는다. <고양이를 부탁해> 속 태희는 (<플란다스의 개> 현남과 함께) 스무 살 즈음 배두나의 마법 같은 에너지가 가장 밝게 빛나는 캐릭터다.

고양이를 부탁해

감독 정재은

출연 배두나, 이요원, 옥지영

개봉 2001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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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름>
선영
장진영

<싱글즈>의 나난, <청연>의 경원,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연아... 장진영이 우리와 같은 세상에 살았을 적 연기한 여자들은 하나같이 장진영처럼 보였다. 인물보다 배우가 먼저 보인다는 건 결국 실패를 의미하지만, 장진영에게만큼은 예외였다. 커다란 눈동자로 저 멀리 허공을 바라볼 때가 많은 영화 속 장진영들은 언제나 이 세상에 붙박인 채로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소망했다. 그들 가운데 <소름>의 선영부터 떠오른 건 그의 처지가 희망과 가장 동떨어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소름

감독 윤종찬

출연 김명민, 장진영

개봉 2001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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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금자씨>
금자
이영애

금자는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 13년간 감옥에서 천사처럼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그렇다고 바라는 게 많은 것도 아니다. 둘뿐이다. 첫째, 딸 제니를 다시 만나서 자기 인생을 완전히 망쳐버린 백한상(최민식)을 죽이는 것. 알게 모르게 덜컹거리긴 하지만 '어쨌든' 금자는 복수에 성공한다. 그게 금자가 바라던 전부 아니냐고? 복수만큼이나 중요한 게 또 있다. 복수를 위한 총을 움켜쥔 채 "예뻐야 돼. 뭐든지 예쁜 게 좋아" 중얼거리는 금자는 언제나 '예쁜 것'을 추구하며, 추악한 인간을 벌하기 위해 돌진한다.

친절한 금자씨

감독 박찬욱

출연 이영애, 최민식

개봉 2005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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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최수인

내 마음 같지 않은 타인들을 거의 매일 마주하는 것. 돌이켜보면 학교 생활은 지옥이었다. 회사는 견디면 돈이라도 주지, 학교를 다닌다는 건 내 의사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의무였으니까. 친구라는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는 <우리들> 속 선이를 보면서 오랜만에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피구 팀을 나누는 그 짧은 시간, 누가 나를 데려갈까 하고 기대하고 실망하는 거듭하는 선이의 감출 수 없는 표정'들'을 보는데 내 마음이 다 조마조마했다. 그 떨리는 심정이 영화 마지막 선과 지아(설혜인)가 서로 눈을 맞추는 그 순간까지 계속됐다.

우리들

감독 윤가은

출연 최수인, 설혜인, 이서연, 강민준

개봉 2015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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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은 없다>
연홍
손예진

연홍은 딸 민진을 잃어버렸다. 촉망받는 정치인 남편(김주혁)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차라리 실종의 원인이거나 빠른 구출의 걸림돌일 뿐이다. 그래서 남들보다 특출난 것도 없는 자기를 믿을 수밖에 없다. 흥분하면 감췄던 전라도 사투리가 쏟아져 나오고, 딸 이메일에 들어가겠다고 떠올리는 아이디가 고작  'minjin'인 연홍이지만, 아무튼 비밀에 점차 가까워진다. "멍청해서 지켜줘야 한다"는 민진의 말을 전해듣는 연홍의 얼굴을 볼 때 눈물이 흘렀다는 건 이 기묘한 모험에 설득당했다는 뜻일 터. 극장을 나선 후 연홍의 모성애에 대해 더 오래 생각했다.

비밀은 없다

감독 이경미

출연 손예진, 김주혁

개봉 2015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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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장사 마돈나>
동구
류덕환

동구는 하필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다. 그래서 성전환수술을 위해 500만원을 벌어야 한다. 그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 여자의 몸을 갖는 걸 포기하는 것 빼고는. 동구는 자기가 원하는 걸 잘 알고, 의심할 여지가 없고, 그걸 위해서 노력한다. 늘 취한 채로 폭력을 일삼는 아빠와 행복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엄마가 발목을 붙들어도 결국 자기가 원하는 길로 달려간다. 사랑하는 일본어 선생님(초난강)에게 첫 월경을 축하 받는 꿈을 꾸고 사정한 팬티를 울면서 빨아야 하는 날도 있었지만, 자기 앞에 놓인 벽들을 하나하나 뒤집어버린다. 그리고 더 완벽한 동구가 된다.

천하장사 마돈나

감독 이해영, 이해준

출연 류덕환

개봉 2006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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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치온더비치>
가영
정가영

가영은 전남친과 다시 자고 싶고 다시 사귀고 싶어서, 그의 집 문을 당연하다는 듯 두드린다. 집념이 대단하다. 이미 다른 여자를 사귀고 있는 전남친이 넘어오지 않자 온갖 땡깡을 부린다. 우선적으로 원하는 걸 해결하고 나니, 그 다음으로 원하는 걸 요구하고 또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린다. 이 우습고도 묘하게 야릇한 상황에서 '자존심' 같은 건 끼어들 틈이 없다. 그저 원하는 걸 취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의 의지가 있다. 언제든 이 오기를 그만두고 잘생긴 오빠를 만나러 쏠랑 가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 더더 좋다.

비치온더비치

감독 정가영

출연 정가영, 김최용준, 이하윤

개봉 2016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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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소뜸>
화영
김지미

언제부턴가 대중문화 속 혈연 관계로 인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관람'하는 게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물론이고, 평생 부모라고 따라왔던 이들을 한 개인으로 바라보고자 노력하던 때부터였던 것 같다. <길소뜸> 속 화영은 맥빠지는 의문보다 차가운 질문을 남기는 여자였다. 한국전쟁 중에 이별해야 했던 연인 동진(신성일)과 아들 성운(한지일)을 수십 년 만에 만났지만, 좀체 그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 넉넉한 가정 환경과 그로 인한 품위를 누리고 살 수 있는 화영은, 돈만 생기면 자신을 찾기 위해 신문광고를 냈다고 털어놓는 동진의 가난, 개를 차에 치어 죽여놓고서 개고기 먹을 수 있다며 쾌재를 부르는 성운의 미개함에 등을 돌린다. 그녀의 결단에 무정함이 아닌 이성적인 판단을 보았다.

길소뜸

감독 임권택

출연 김지미, 강신성일

개봉 1986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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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멋대로 해라>

이나영

(기획을 슬쩍 우회해 드라마에서 선택했다) <네멋대로 해라>는 1화부터 마지막화까지 모두 챙겨본 유일한 드라마다. TV에서 보던 사람들과는 뭔가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복수(양동근)와 경에게 완전히 매료됐다. 작년 어느 날 15년 만에 <네멋대로 해라>를 다시 봤다. 의외로 유치하고 성긴 데가 많아서 조금 실망했지만, 오히려 경에 대한 마음은 더 커졌다. 경이 온갖 사건들을 통과한 후에 결국 복수를 사랑하게 되고, 더 크게 사랑하는 과정이 눈물겹도록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네 멋대로 해라

감독 박성수

출연 양동근, 이나영

개봉 2002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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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동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