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9일, 아이슬란드 태생의 영화음악가 요한 요한손이 타계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그는 독일 베를린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 아직 사인에 대해선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한참 왕성히 활동할 48살의 나이였기에, 요한 요한손의 이른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것>으로 제72회 골든 글로브 음악상을 깜짝 수상했고,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이하 <시카리오>)로 연속해 골든 글로브와 오스카 음악상 후보에 지명되었으며, <컨택트>까지 3연속 골든 글로브와 영국 아카데미 음악상 후보에 오르는 등 자신의 색채를 본격적으로 드러내고 있던 터라 이 갑작스러운 이별이 더욱더 안타깝게만 느껴진다. SNS 상에선 그와 함께 작업했던 이들과 동료 영화음악가 그리고 전 세계의 영화팬들이 애도를 표하고 있다.
요한 요한손의 유작이 된 <더 머시>를 함께 한 제임스 마시 감독은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다”며 “친애하는 친구를 잃었고, 함께 했던 아름다운 음악을 잃었다”고 인디와이어지와 한 인터뷰에서 밝혔다. <마더!>에서 음악 대신 사운드 컨설턴트라는 대안을 제시한 대런 아로노프스키 또한 “그는 사운드와 음악에 대해 독창적인 접근법을 지닌 뛰어난 협력자”라며 “그를 잃은 건 끔찍한 손실”이라고 전했다. 요한손과 비슷한 포지션에서 활동하고 <컨택트>라는 공통 화두가 있던 막스 리히터는 그를 추모하며 “사려 깊고 감동적인 작품이 그를 생존케 할 것”이라고 트위터에 적었다. 브라이언 타일러와 마이클 지아치노, 스티브 자브론스키, 루도비코 에이나우디, 데이비드 아놀드와 클린트 만셀, 베어 맥크레리 등 많은 뮤지션들도 저마다 소회를 밝히며 충격과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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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드니 빌뇌브
출연 에밀리 블런트, 조슈 브롤린, 베니시오 델 토로
개봉 2015 미국
아이슬란드의 독특한 영화음악가
1969년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태어난 요한 요한손은 11살 때부터 피아노와 트롬본을 배우며 음악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곧 한계를 느끼고 대학에선 음악 대신 언어와 문학을 전공했는데, 80년대 후반 프로토-슈게이징을 필두로 펑크와 일렉트릭 사운드에 빠져들어 여러 뮤지션들과 협업하며 본격적인 음악 행보를 걷기 시작한다. 아이슬란드의 인디 록밴드 올림피아와 운운, 햄 등을 거치며 기타리스트와 프로듀서로 활동했고, 짧은 기간이지만 음악 레이블이자 예술단체이며 싱크탱크인 ‘키친 모터스’를 설립해 콘서트와 전시회, 퍼포먼스, 오페라와 영상, 책과 방송에 이르기까지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인 활동을 하며 다양한 분야에 발을 담그게 된다. 펑크와 재즈, 클래식과 메탈, 그리고 전자음악까지 그가 장르불문의 복합적인 자신만의 사운드를 창출하게 된 점이나 영화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여기서 기인한 셈이다.
2002년 클래시컬한 미니멀리즘과 디지털 필터를 활용한 일렉트릭 사운드를 적절히 조화시킨 첫 솔로 앨범 ‘엥글라뵈른’을 발표하며 현대음악가로 다시 태어났고, 2009년까지 꾸준히 6장의 앨범을 발표해 자신만의 독자적인 사운드를 구축해갔다. 동시에 본격적으로 TV와 단편, 다큐멘터리의 음악들을 맡으며 영화음악가로도 발을 디디게 됐다. 초기엔 자국인 아이슬란드에서 활동했지만, 점차 활동 반경을 넓혀 프랑스 영화 <말 도둑>, 멕시코의 <낮의 시민, 밤의 시민>, 미국에서 활동하는 김소영 감독의 <포 엘렌>, 중국 인디 영화의 기수 로예의 <미스터리> 등 다양한 국적의 영화들에 이름을 올리며 독특한 예술적 지장을 확보했다. 그를 눈여겨 본 건 <그을린 사랑>으로 일약 주목받게 된 드니 빌뇌브 감독. 드니는 자신의 할리우드 입봉작인 <프리즈너스>의 음악을 요한 요한손에게 맡기며 그 역시 할리우드에 입성하게 된다.

- 프리즈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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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드니 빌뇌브
출연 휴 잭맨, 제이크 질렌할
개봉 2013 미국
요한 요한손의 또 다른 영화음악들
드니 빌뇌브와 함께 했던 세 편의 영화 <프리즈너스>, <시카리오>, <컨택트>에 대해선 이전에 한번 다뤘었고(링크), 각종 시상식에서 여러 차례 음악상 후보에 오르며 대중의 주목을 받았지만, 그 외 요한 요한손이 맡은 다른 사운드트랙들은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를 세상에 널리 알린 <사랑에 대한 모든 것> 사운드트랙은 빠르게 절판됐고, <맥카닉: 마지막 추격>이나 <아이 엠 히어> 같은 스릴러 스코어들은 영화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할리우드 작품이 아닌 다국적의 아트하우스 영화들의 경우 사운드트랙 발매는 언감생심에 가까웠다. 그나마 <프리 더 마인드>나 <코펜하겐 드림> 같은 다큐멘터리 스코어들이 요한 요한손 자신의 레이블인 NTOV에서 공개됐을 뿐이다. 짤막하게나마 이런 그의 숨겨진 사운드트랙들에 대해 소개해본다.
<드림즈 인 코펜하겐> (2009)
요한 요한손은 소리와 언어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연구하던 작곡가였다. 슈게이징에 빠지고, 미니멀한 사운드 토대 위에, 일렉트릭에 대한 꾸준한 시도와 실험을 해왔던 게 그 반증이다. 이는 국토의 80% 가까이가 빙하와 호수, 용암 지대 등으로 구성된 아이슬란드의 척박한 토양에서 자라온 환경과도 맞닿아있다. 스산하고 혹독한 자연에서 들려온 소리들이 그에겐 말처럼, 음악처럼 속삭였는지 모른다. 덴마크의 초상을 담아내는 맥스 케스트너의 일상성의 다큐 <드림즈 인 코펜하겐>에서도 그런 일면이 감지된다. 보이스를 활용하고 노이즈와 일렉트릭 요소를 부여하며 현악 4중주를 통해 들려주는 도시의 묵상은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본질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이 사운드트랙은 사색적이면서도 멜랑꼴리한 위로이자 음악으로 깨우치는 잠언에 가깝다.
- 드림즈 인 코펜하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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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맥스 케스트너
출연
개봉 2009 덴마크
<프리 더 마인드> (2012)
<프리 더 마인드>는 덴마크 출신으로 가족과 자연, 과학 등 다양한 주제들을 건들며 사유와 성찰을 하게 만드는 피에 암보가 연출한 다큐멘터리로, 세계적인 신경과학자 리처드 데이비슨을 통해 의식과 뇌, 육체와 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요한 요한손이 맡은 음악은 딱딱하고 지루할 수 있는 현학적인 화두에 독특한 리듬과 활력을 부여하는데, 얼핏 필립 글래스가 갓프리 레지오 감독과 함께 했던 다큐 ‘카시’ 삼부작 사운드트랙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미니멀한 서정성이 주는 신비스러움과 경이의 소리들은 아름답고 우아하며, 영화 내 주요하게 다뤄지는 명상과 요가의 느낌과도 맞닿아 묘한 공명이 들게 만든다. 피아노와 스트링을 위주로 섬세하게 접근해가는 사운드는 이후에 나온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의 프로토 타입으로도 느껴진다.

- 프리 더 마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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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피에 암보
출연
개봉 2012 스웨덴, 네덜란드, 오스트레일리아, 핀란드, 덴마크
<사랑에 대한 모든 것> (2014)
현대 물리학계의 판도를 바꾼, 루게릭병에 걸린 천재 스티븐 호킹과 그의 삶의 원동력이 된 제인 와일드의 실화를 다룬 작품으로, 에디 레드메인과 펠리시티 존스의 연기가 빛났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요한 요한손이 맡은 음악도 단연 화제가 되었다. 네오 클래식과 미니멀리즘, 드론과 일렉트릭 등 다양한 장르에서 전방위적인 음악 활동을 한 그의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으로, 유려하면서도 섬세한 오케스트라와 서정적인 피아노가 감동적인 실화의 무게감을 잘 받쳐주고 있다. 같은 해 개봉된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이미테이션 게임>과도 여러모로 비교됐는데, 영국 영화면서도 비영어권 유럽 작곡가들에, 미니멀한 사운드라는 점에서 닮은 조건이면서도 상이한 분위기를 담아내 대비가 됐다. 골든 글로브를 수상한 요한손의 역작.

- 사랑에 대한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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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제임스 마쉬
출연 펠리시티 존스, 에디 레드메인, 에밀리 왓슨, 데이빗 듈리스, 해리 로이드, 찰리 콕스
개봉 2014 영국
<맥카닉: 마지막 추격> (2014)
조쉬 C. 월러 감독의 범죄 드라마로 미드 <글리>의 스타였던 코리 몬테이스의 사후 유작으로 공개돼 관심을 끌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타이틀 롤을 맡은 데이빗 모스가 홀로 분전하지만 맥빠진 연출과 구멍 뚫린 각본으로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진 못했다. 다만 <프리즈너스>로 주목받은 요한 요한손이 그 느낌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한없이 무겁고 침전된 분위기를 자아내는 잿빛 스코어만큼은 쉬 잊을 수 없는 잔향을 남긴다. 신경을 긁는 듯 왜곡이 걸린 스트링과 서늘하게 일렁이는 기타, 미니멀한 피아노가 일렉트릭 사운드와 결합된 요한손 특유의 분위기는 여전하다. 영화의 완성도 때문에 스코어도 평가 절하된 측면이 있는데, 강박에 시달리는 캐릭터가 서서히 무너져가는 모습을 다루는 데 있어 그의 묵직한 사운드만큼 적절한 게 또 없다.

- 맥카닉: 마지막 추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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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조쉬 C. 월러
출연 데이빗 모스, 코리 몬테이스, 시아란 힌즈
개봉 2013 미국
<더 머시> (2018)
제임스 마쉬 감독과 다시 호흡을 맞춘 작품으로 1968년 제대로 된 항해 경험조차 없었던 도널드 크로허스트가 단독 세계 일주 요트 대회에 도전하다 실종되고만 기이한 실화를 다루고 있다. 달콤한 성공과 쓰린 실패, 그리고 욕망과 고독, 광기의 상황을 집약해 모두 품어낸 요한손의 미니멀한 사운드는 아름답고 또 처절하다. 막스 리히터나 클린트 만셀 못지않게 실험적인 사운드를 구사하면서도 음울한 서정성을 포기하지 않는 그의 탁월한 선율은 인간 본성에 대한 근원적인 탐구와 감상을 토해내고 있다.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었던 한계에 대해 위로하는 사운드이기도 하다. 심리적인 묘사를 담기 위해 앞서 소개한 자신의 <드림스 인 코펜하겐>과 <프리 더 마인드> 스코어에서 몇 개의 큐를 골라 삽입하기도 했다. 2018년 첫 번째로 만나는 올해 베스트 사운드트랙 중 하나라고 감히 뽑고 싶다. 그의 부재가 더더욱 아쉬워질 앨범.

- 더 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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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제임스 마쉬
출연 콜린 퍼스, 레이첼 와이즈
개봉 2018 영국
그리고 남겨진 유작들
워커홀릭이라고 할 만큼 요한 요한손은 다방면에서 정열적인 작업을 이어왔던 터라 아직 공개되지 않은 영화가 <더 머시> 말고 더 있다. 하나는 니콜라스 케이지가 광신도와 얽히는 액션 스릴러 <맨디>고, 다른 하나는 루니 마라가 동정녀 마리아로, 호아킨 피닉스가 예수로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이다. <맨디>는 올해 초 선댄스 영화제에서 공개돼 주목받기도 했는데, B급 액션 영화로 유명했던 조지 P. 코스마토스 감독의 아들 파노스 코스마토스가 연출하고 <맥카닉: 마지막 추격>으로 인연을 맺은 조쉬 C. 월러가 제작하는 작품으로 핏빛 가득한 고어 복수담이 될 예정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라이언>으로 주목받은 가스 데이비스의 신작으로 요한 요한손의 앨범에서 첼로를 연주했던 힐더 구드나도티르와 공동으로 음악을 맡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종교적인 대서사시를 들려줄 예정이다.
그리고 이완 맥그리거가 성인이 된 크리스토퍼 로빈으로 나와 곰돌이 푸와 친구들과 모험을 떠나는, 마크 포스터 감독의 디즈니 대작 <크리스토퍼 로빈>의 음악감독으로도 결정돼 최근까지 작업에 대한 토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그의 죽음으로 음악감독은 클라우스 바델트로 교체되고 말았지만, 요한 요한손이 끝까지 맡았다면 어떤 디즈니의 블록버스터 음악이 되었을까 굉장히 궁금해지기도 한다. 다시 한 번 그가 떠난 빈자리의 아쉬움을 느끼며 심심한 애도를 표해본다.
- 맨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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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파노스 코스마토스
출연 니콜라스 케이지, 안드레아 라이즈보로
개봉 2018 미국

-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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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가스 데이비스
출연 루니 마라, 호아킨 피닉스, 치웨텔 에지오포
개봉 2018 영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