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3월 7일,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이 세상을 떠났다. 날카로운 눈빛과 자신의 비전을 영화로 옮기는 집념, 인간 본성을 향한 냉소는 16편의 영화로 막을 내렸다. 그가 떠나고 19년이나 지났지만 그의 영화는 여전히 추앙받으며 명작 리스트에 올라가 있다. 이 명작들을 남긴 스탠리 큐브릭을 5개의 키워드로 정리해봤다.

공포와 욕망 (1953)
킬러스 키스 (1955)
킬링 (1956)
영광의 길 (1957)
스파타커스 (1960)
로리타 (1962)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1964)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1968)
시계태엽 오렌지 (1971)
배리 린든 (1975)
샤이닝 (1980)
풀 메탈 자켓 (1987)
아이즈 와이드 셧 (1999)
스탠리 큐브릭 - 영화 속의 인생

감독 잔 할랜

출연 켄 아담, 브라이언 올디스, 니콜 키드먼, 톰 크루즈, 우디 앨런, 스티븐 버코프, 아서 C. 클라크, 알렉스 콕스, 크리스티안 커브릭, 폴 마주르스키, 매튜 모딘, 잭 니콜슨, 말콤 맥도웰, 시드니 폴락, 마틴 스콜세지, 제임스 B. 해리스, 피터 유스티노프, 스티븐 스필버그, 셜리 듀발, 알란 파커

개봉 2001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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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주의

<스파타커스> 촬영장의 큐브릭

지금도 영화계에 ‘완벽주의자’ 딱지 붙은 감독이 많지만, 스탠리 큐브릭에 비견할 정도는 아니다. 1960년, <스파타커스> 연출을 맡았던 큐브릭 감독은 스타 배우의 오지랖과 제작자들의 압력에 질려, 이후에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환경에서 영화를 찍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로리타>부터 영국에서 영화를 찍었고,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부터 제작까지 도맡아 완벽주의자의 끝을 보여준다.

스파타커스

감독 스탠리 큐브릭

출연 커크 더글라스, 로렌스 올리비에, 진 시몬즈, 찰스 로튼, 피터 유스티노프, 존 게빈

개봉 1960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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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완벽주의는 무수한 재촬영으로 상징된다. 그는 배우의 연기를 한 번에 OK 하지 않고, 적어도 10번 이상 촬영한다. 배우 스스로에게 자신의 연기를 살펴보고 수정할 수 있도록, 혹은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제대로 보여줄 때까지 지켜보는 것이 그의 방법이다. 계획하되 즉흥적인 것. 이런 촬영 방식은 훗날 “큐브릭은 매 장면 100회 이상 촬영한다더라”는 루머(실제로 100회 이상 촬영한 경우도 드물게 있긴 했다)까지 씌워지면서 그의 완벽주의를 더 괴팍하게 보이게끔 했다. 

<배리 린든> 촬영장의 스탠리 큐브릭(맨 왼쪽).

큐브릭의 완벽주의는 제작 방식에서도 마찬가지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제작할 무렵, 우주시대의 디테일을 위해 실제로 NASA에 고증을 요청했고, 화성 탐사 결과에 영화가 흔들릴까봐 보험을 고려한 적도 있다. <배리 린든> 때는 극중 시대처럼 조명을 촛불과 자연광만 써야 한다며, 그 정도 광량만으로도 촬영할 수 있는 렌즈를 제작했다. <풀 메탈 자켓>에선 배우들을 삭발시키고 실제로 군 훈련을 받게 해 배우들의 눈빛이 바뀌는 걸 카메라에 담았다. <샤이닝>에 나오는 ‘All work and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 페이지에 의도적으로 오타를 삽입한 것도 유명한 일화다.  

한 해외 팬은 이 오탈자로 <샤이닝>을 대니 토랜스의 시점으로 접근하기도 했다.

그의 완벽주의는 마케팅에서도 마찬가지. 극장용 포스터를 비롯, 2차 매체(비디오테이프)의 표지 등도 직접 확인하는 성격이었다. 영국, 미국뿐만 아니라 해외의 마케팅 수단도 검토하는 성격 덕분에 사실상 공식 포스터가 인터내셔널 포스터로 쓰이곤 했다. 촬영을 마친 후엔 세트를 파괴해 다른 영화에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것도 그의 특징이다.

(위) <샤이닝>의 포스터 도안 (아래) 300여 점의 도안 중 사용된 <샤이닝> 포스터.
샤이닝

감독 스탠리 큐브릭

출연 잭 니콜슨, 셜리 듀발

개봉 1980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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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의 재창조

큐브릭 감독 작품을 모은 컬렉션.

“장르가 000”이란 농담이 과거에도 있었다면, 큐브릭 감독은 그 농담의 주인공이었을 것이다. 큐브릭 감독은 매 작품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찾는 것에 집중했고, 그 이야기를 영화 언어로 풀어내는 것에 몰두했다. 덕분에 <공포의 욕망>(1953)부터 <아이즈 와이드 셧>(1999)까지, 장르가 겹치거나 시대가 중복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렇게 치열한 고민 끝에 큐브릭 감독은 이야기를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변주했다. ‘미래 삼부작’인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계태엽 오렌지>는 각각 블랙코미디 풍자극, 하드 SF, 범죄 영화 등으로 구성됐다. 시대극은 고대(<스파타커스>), 중세(<배리 린든>), 현대(<영광의 길>, <풀 메탈 자켓>)로 겹치는 시대가 없었다. 후기로 갈수록 휴식기가 길어진 것도 전작들과 겹치지 않되 흥미로운 소재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큐브릭 감독의 연출 방향은 원작자들과 충돌이 빚었다. <로리타>부터 모든 영화에 원작이 있었는데, 그중 <시계태엽 오렌지> 앤소니 버지스와 <샤이닝> 스티븐 킹은 영화판의 완성도는 인정하면서도 새로 각색한 이야기는 극도로 싫어했다. <로리타> 역시 원작자인 블라디미르 나보코브가 직접 각색한 시나리오를 줬으나 영화가 완전히 다른 내용이라 무척 불쾌했다고 털어놨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감독 스탠리 큐브릭

출연 케어 둘리, 게리 록우드

개봉 1968 영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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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스트레인지러브

감독 스탠리 큐브릭

출연 피터 셀러스, 조지 C. 스콧

개봉 1964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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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타

감독 스탠리 큐브릭

출연 제임스 메이슨, 쉘리 윈터스, 수 라이온

개봉 1962 영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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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대칭

큐브릭 감독의 형식적 키워드가 ‘장르’라면 미적 키워드는 좌우대칭, ‘1점 투시법을 적용한 미장센’이다. 큐브릭 감독은 이 방식을 자신의 영화 대부분에 적용시켜, 공간감을 살리면서 영화 전체의 통일성을 부여했다. 장르가 다양하면서도 ‘스탠리 큐브릭’이란 인장이 남은 데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그의 일관적인 미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위에서부터) <영광의 길>, <샤이닝>, <풀 메탈 자켓>

그가 소실점 구도를 구사한 이유는 두 가지인 듯하다. 하나는 스크린 안쪽에 공간감을 부여해 인물의 동선을 확보하는 것. 공간이 평면처럼 보인다면, 인물은 좌우 외의 동선을 구성하기 어렵다. 하지만 소실점을 잡고 깊이를 담아내면, 인물이 좌우뿐만 아니라 앞뒤로 움직일 수 있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스크린 내부 세계를 풍성하게 느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불안한 안정감이란 역설을 담을 수 있다는 것. 1점 투시법을 사용한 그림은 대개 좌우의 균형을 맞춰 안정감을 준다. 하지만 큐브릭 감독의 방식대로 소실점과 인물을 모두 중앙에 둔다면, 인물의 작은 움직임이나 새로운 피사체의 등장만으로도 균형이 무너질 것 같은 불안감을 자극할 수 있다. 또한 1점 투시법이란 작위적인 화면 구성으로 통제되고 과하게 질서적인 긴장감을 조성할 수 있다. 

<시계태엽 오렌지>

그래서 본능이 앞서는 개인과 사회의 강압적 억압이 테마인 <시계태엽 오렌지>와 <샤이닝>에서 그의 1점 투시법은 더욱 도드라졌다. 반대로 인간의 욕망과 무의식을 탐구하는 <아이즈 와이드 셧>에선 스테디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보다 몽환적이고 유려한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시계태엽 오렌지

감독 스탠리 큐브릭

출연 말콤 맥도웰, 패트릭 마지

개봉 1971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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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즈 와이드 셧

감독 스탠리 큐브릭

출연 톰 크루즈, 니콜 키드먼

개봉 1999 영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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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악설

<시계태엽 오렌지>의 알렉스는 강제 교화 프로그램 ‘루드비코 시술법’을 받는다.

큐브릭을 관통하는 형식, 미적 감성을 지나왔으니 마지막으로 다룰 건 그의 인간관이다. 큐브릭 감독은 기본적으로 성악설을 믿는 사람이다.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우리가 가진 가장 위험한 착각은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이며, 인간을 악하게 만드는 것은 사회다’라는 것이다. 나는 인간의 폭력적이고 잔인한 측면에 관심이 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참된 모습이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초기작이자 범죄 영화인 <킬러스 키스>, <킬링>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그의 냉소적인 인간관은 자신이 각본을 골랐던 <로리타>부터 본격적으로 그려진다. 전 인류의 목숨을 건 핵 전쟁이 고작 한 인간의 망상에서 출발하고(<닥터 스트레인지러브>), 국가를 위해 입대한 청년들이 강제적으로 살인 기계가 되며(<풀 메탈 자켓>), 그 모든 강압적인 시스템도 인간의 저열한 욕망을 바꿀 수 없단(<시계태엽 오렌지>) 결론에 도달한다. 

<아이즈 와이즈 셧> 촬영 중 스탠리 큐브릭의 마지막 사진

그나마 그의 영화 중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아이즈 와이드 셧>이 성악설에 대한 나름의 돌파구를 찾는다. 인간 이상으로의 진화(<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혹은 그 모든 걸 내려놓고 당장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아이즈 와이드 셧>).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엔 사실상 악인이 없다는 걸 생각하면, <아이즈 와이드 셧>이야말로 큐브릭 감독이 최후에 내린 결론이 아닐까 싶다. 


#미완의 프로젝트

그의 미완성 프로젝트는 세 편이다. 하나는 <나폴레옹>. 테리 길리엄 감독이 <돈키호테>를 영원한 숙원으로 여기듯, 큐브릭 감독은 불세출의 장군이자 몰락한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영화화하려 했다. 모든 사전 작업이 끝나고 촬영을 앞뒀을 때, 러시아 영화 <워털루>가 망하면서 무산됐다. 이 영화의 아이디어 중 일부는 <배리 린든>(조명을 안 쓴다는 철칙)에 흡수됐고, 큐브릭 감독이 나폴레옹 관련 서적 1만 권(!)을 탐독하며 준비한 대본과 참고 자료 등은 사후에 책으로 발간됐다. 

<스탠리 큐브릭의 나폴레옹> 서적.


또 <아리안 페이퍼즈>라는 영화도 있다. 세계 2차대전 당시, ‘아리아인(나치가 우월하다 여긴 민족) 증명서’를 사용해 대학살에서 도망쳐 나온 유대인들을 다룰 이 영화는 당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 개봉 소식에 큐브릭 본인이 제작을 취소했다. 자신의 <풀 메탈 자켓>과 올리버 스톤 감독의 <플래툰>이 비슷한 시기에 개봉해 비교당한 전적이 이미 있기 때문이었다. 

스탠리 큐브릭이 관여한 <A.I.> 컨셉 아트.

마지막은 <A.I.>. 이 영화는 큐브릭 감독이 살아생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게 연출을 맡기고 자신은 제작을 맡을 생각이었다. 큐브릭 감독이 타계한 이후 스필버그 감독이 그의 메모와 대본 등을 참고해 최대한 큐브릭 감독이 생각한 비전을 영화화했다. 큐브릭 감독답지 않게 엔딩이 감성적이라 일각에선 ‘스필버그가 엔딩을 바꿨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이전부터 절친이었던 두 사람이기에 스필버그 감독 역시 큐브릭 감독이 작성한 원안을 최대한 반영했다. 

1960년대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푸코의 진자>를 영화화하려 했으나 에코가 거절하고, <장미의 이름>이 영화화되면서 포기했다. 또 말론 브란도와 소설 <헨드리 존스의 진짜 죽음>을 함께 각색하다가 타협을 못 보고 하차한 적도 있다. 

에이 아이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출연 할리 조엘 오스먼트, 주드 로, 프란시스 오코너, 브렌단 글리슨, 샘 로바즈, 윌리엄 허트

개봉 2001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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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로운 이야기

(위) <풀 메탈 자켓> 촬영 현장 (아래) <아이즈 와이드 셧> 촬영 현장

큐브릭 감독은 비행 조종사 자격증을 딸 정도로 비행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지인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는 일을 겪고는 극도의 비행 공포증을 앓는다. 때문에 그의 1950년대 이후 영화는 모두 런던에서만 촬영됐다. 베트남이 배경인 <풀 메탈 자켓>의 경우 야자수를 런던 스튜디오에 심어 아열대 지방 느낌을 살렸고, 뉴욕이 배경인 <아이즈 와이드 셧> 때는 뉴욕 현지에서 보낸 사진을 토대로 세트를 지었다. 당시 부부였던 니콜 키드만과 톰 크루즈는 촬영을 위해 런던으로 이사했다.  

풀 메탈 자켓

감독 스탠리 큐브릭

출연 매튜 모딘, 아담 볼드윈, 빈센트 도노프리오, R. 리 이메이, 도리안 헤어우드, 알리스 하워드, 케빈 메이저 하워드, 에드 오로스, 존 테리, 키에론 제키니스, 브루스 보아, 커크 테일러, 존 스태포드, 팀 콜세리, 이안 타일러, 게리 랜든 밀즈, 샐 로페즈, 파필론 수 수, 노크 레

개봉 1987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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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스탠리 큐브릭이 찍은 사진 (아래) 스스로를 찍은 사진.

영화 이전에 사진 기자로 일했다. 잡지 <룩(Look)>에 기고한 사진만 해도 900여 점. 취미는 체스와 탁구였으며, 첫 장편 영화 <공포와 욕망>의 제작비는 체스 경기에서 받은 상금으로 충당했다. 자택에서나 촬영 현장에서나 체스를 두곤 했는데, 특히 배우나 스태프들을 체스로 이기면 그들을 잘 통제할 수 있을 거란 나름의 전략이 있었다고. 

<스파타커스> 커트 더글라스, 스탠리 큐브릭

첫 장편 <공포와 욕망>을 정말 싫어해서 닥치는 대로 사들여 아무도 볼 수 없게 만들려고 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남은 상영 프린트가 있어 현재 유튜브에서도 볼 수 있다. 또 <스파타커스> 역시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지우고 싶어했다. 

그가 직접 선정한 위대한 감독은 엘리야 카잔, 페데리코 펠리니, 데이비드 린, 잉마르 베리만, 비토리오 데 시카, 프랑소와 트뤼포, 막스 오퓔스다. 1963년 자신이 좋아한다고 선정한 영화는 <비텔로니>, <산딸기>, <시민 케인>, <시에라 마드레의 황금>, <시티 라이트>, <헨리 5세>, <밤>, <뱅크 딕>, <지옥의 천사들>, <록시 하트>.

애니메이터 Martin Woutisseth가 디자인한 큐브릭 감독의 팬메이드 포스터.

25살에 데뷔 후 48년 동안 16편의 장편 영화만 연출했다. 2005년 영국 영화 잡지 ‘엠파이어’에서 위대한 영화감독 4위에 뽑히기도 했으나, 최근 IMDB 유저를 상대로 한 ‘과대평가된 감독’ 투표에서 9위에 오르기도 했다. 

‘예술 영화감독’이란 이미지가 강하지만, <아이즈 와이즈 셧>을 제외한 모든 작품이 손익분기점을 넘었다. 특히 그의 영화 중 가장 정적인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최고 흥행작이다. 도리어 당시 평단에서 ‘예술가인 척하는 상업 감독’이란 평가를 받았는데, 창작 시나리오가 아닌 원작을 각색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2015년 한국에서 스탠리 큐브릭 전이 열렸다. 그의 작품에 사용된 소품이나 촬영 도구는 물론이고 사용되지 못한 포스터 도안 등도 전시됐다. 스탠리 큐브릭 본인의 어록으로 이 포스트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악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과연 인간이 선할 수 있는가.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것이 핵심이 되는 도덕적 질문이다.
비극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 존재하고자 하는 것들과의 갈등 속에서 일어난다.
삶이 무의미하기에 인간은 그 자신만의 의미를 만들게 된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성찬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