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 가야겠다고 결심한 건 지난해 겨울이었다. 홍콩 디즈니랜드의 스타워즈 어트랙션이 곧 없어진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람이 많은 걸 질색하는 터라, 아무리 대단한 스타워즈 어트랙션이 있다 해도 상하이 디즈니랜드에 가는 건 무리. 스타워즈 덕후로서 하루빨리 홍콩 디즈니랜드를 방문해야겠다 마음먹었다.
     
휴가를 맞아 홍콩행 비행기 표를 끊었고, 비행기 표를 끊고 얼마 있지 않아 디즈니랜드의 스타워즈 어트랙션이 없어진단 게 헛소문이었음을(!) 알게 됐다. 아무렴 어때. 한국엔 스타워즈 어트랙션이 없는 걸. 늘 그랬듯 여행 계획 세우기를 외면한 채 흥청망청하다 출국 날짜가 다가왔고, 여권과 지갑만 든 채 비행기에 올랐다.

<천장지구> 속 유덕화. 태어나 주셔서 감사해요.

세세하게 계획을 짜진 않았지만, 홍콩 영화 몇 편을 예습 삼아 보고 가긴 했다. 이번 칼럼 속 최다 등장 영화인 <천장지구>는 그중 가장 인상 깊게 봤던 영화다. 세상에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 있었다니, 유덕화의 비주얼 덕에 보는 내내 행복했던 영화. 홍콩에 도착해선 90년대를 휘어잡은(동시에 내 마음도 휘어잡은) 홍콩 배우들의 영화를 떠올리며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그러다 보니 이번 여행은 ‘홍콩 시네마 투어’가 되어있었다는 이야기. 칼럼 순서를 맞아 일주일 전 담아온 따끈따끈한 사진들을 풀어봤다. 그들의 흔적이 담긴 장소들을 소개한다.


가스등 계단
13 Duddell Street, Central, Hong Kong

가스등 계단과 더들 스트리트

한 블록 걷고 탈진할 찜통더위를 예상했지만, 6월 초 홍콩은 생각보다 덥지 않았다. 덕분에 이런저런 촬영지를 도보로 이동할 수 있었다. 홍콩 도심을 정처 없이 걷다 보면 어김없이 만날 수 있는 곳. <금지옥엽>에서 장국영과 원영의가 처음 만난 ‘프린지 클럽’을 지나 죽 내려오다 보면 홍콩 영화 단골 촬영지인 ‘가스등 계단’을 만날 수 있다. 떠들썩한 촬영 명소라기보단 홍콩의 일상이 담겨있는 곳이다. 방문했을 당시엔 주변 공사를 위한 대나무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어 혼잡스러웠다.

<천장지구>
<금지옥엽>
<희극지왕>

낮과 밤이 완전히 다른 매력. 클래식한 분위기를 자랑하는 가스등 계단은 홍콩 영화 속 기억될만한 여러 장면들을 담아낸 장소다. <천장지구> 속 새하얀 턱시도를 코피로 물들이면서도 복수를 향해 돌진하던 유덕화의 처절한 최후가 담겨있는 곳이고, <금지옥엽> 속 장국영의 퇴근길을 담아낸 곳이기도 하다. <희극지왕> 속 장백지의 등교를 가장한 출근길이기도 했다. 가스등 계단 위론 시원시원한 야자수가 펼쳐져 있고, 계단 아래론 구찌 등 명품숍이 늘어진 더들 스트리트가 있다. 어떤 구도에서 찍어도 영화 속 명장면을 탄생시키는 인증샷 스팟일 것 같지만, 인생 사진을 남기려면 계단을 오르내리며 안성맞춤 구도를 찾아야 하는 노력을 요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귀차니즘이 심한 에디터는 장백지와 장국영을 떠올리며 계단을 내려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희극지왕

감독

출연 주성치, 막문위, 장백지, 오맹달

개봉 1999 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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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옥엽

감독 진가신

출연 장국영, 원영의, 유가령

개봉 1994 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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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마가렛 성당
2A Broadwood Road, Happy Valley, Hong Kong

<천장지구>
성 마가렛 성당
브로드우드 로드 역에 내려 언덕을 오르면 성 마가렛 성당을 만날 수 있다.

<천장지구> 속 유덕화가 복수를 실행하기 전 찾는 장소. 해피밸리 외곽에 위치한 ‘성 마가렛 성당’이다. 죽음을 직감한 아화(유덕화)는 사랑하는 여인 조조(오천련)과 함께 그들만의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성 마가렛 성당을 찾는다. 훔친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오토바이를 탄 채 성당으로 질주하는 그들의 모습은 이미 여러 매체에서 패러디된 바 있다. 영화 개봉 후 28년이 지났지만, 성 마가렛 성당은 <천장지구> 속 그들의 결혼식을 지켜보던 모습 그대로 고요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조명으로 인해 낮과 밤의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는 점이 이곳의 매력. 에디터는 쨍쨍한 대낮에 성당을 찾았고, 무릎 꿇고 기도하는 영화 속 오천련의 모습을 흉내 냈다가 무릎에 화상을(...) 입을 뻔했다. 기도 장면은 밤에 따라하길 추천한다. 해피밸리행 트램을 타고 브로드우드 로드 역에 내려 3분 정도 걷거나, 지하철 아일랜드선을 타고 코즈웨이베이 역에 내려 12분 정도 걸으면 성 마가렛 성당을 찾을 수 있다.

<천장지구> 속 오천련. 기도 장면은 밤에 따라하길 추천한다.
천장지구

감독 진목승

출연 유덕화, 오천련

개봉 1990 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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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핀치 레스토랑
13 Lan Fong Road, Causeway Bay, Hong Kong

<화양연화>
<2046>

성 마가렛 성당에서 코즈웨이베이 시내 쪽으로 10분 정도 걷다 보면 ‘골드핀치 레스토랑’을 만날 수 있다. <화양연화>에선 서로 마음을 확인한 양조위와 장만옥이 밀회를 즐긴 장소로, <2046>에선 양조위가 소설 <2046>을 집필하던 장소로 등장했다.

골드핀치 레스토랑

두터운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섬과 동시에 왁자지껄한 홍콩 거리 소음이 사라지는 이곳. 어두침침한 조명, 클래식한 인테리어 등 영화 속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랑하는 레스토랑이다. 곳곳에 붙어있는 영화 포스터들이 영화 팬들의 덕심을 자극하는 건 물론. 홍콩 영화 팬들이라면 한 번쯤 출석 도장을 찍어야 하는 명소임이 틀림없다.

2046 세트를 먹었다.

어떤 메뉴를 골라야 할지 고민된다면 ‘화양연화 세트’나 ‘2046 세트’를 추천한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먹은 메뉴로 화양연화 세트는 랍스터가, 2046 세트는 스테이크가 주메뉴다. 고기를 사랑하는 에디터는 2046 세트를 선택했다. 푸짐한 양을 자랑하는 레스토랑이니 위를 싹 비우고 방문하시길. 후식으로 나온 커피가 믹스 커피인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는 점만 빼면 매우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화양연화

감독 왕가위

출연 양조위, 장만옥

개봉 2000 홍콩,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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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6

감독 왕가위

출연 장쯔이, 장첸, 기무라 타쿠야, 유가령, 양조위, 왕페이, 베이 로건, 장만옥, 공리, 둥제, 소병림, 통차이 맥킨타이어, 오정엽

개봉 2004 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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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7 Staunton Street, Central, Hong Kong

<중경삼림>
<다크 나이트>

홍콩 여행을 한다면 한 번쯤은 타는 에스컬레이터. 바로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다. <중경삼림> 속 양조위의 집을 들락날락하던 왕페이의 교통수단(!)이었던 에스컬레이터. <다크 나이트>에서 크리스찬 베일과 모건 프리먼이 등장한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어쩐지 낭만으로 가득 찬 곳일 것 같지만 현실은 회사원들의 출퇴근길. 간간이 내려다보이는 홍콩 거리의 풍경이 눈을 사로잡지만, 내내 많은 사람들로 복작거려 얼른 탈출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방향 감각이 없는 이라면 길을 잃을 위험도 있으니 주의하시길!

중경삼림

감독 왕가위

출연 임청하, 양조위, 금성무, 왕페이

개봉 1994 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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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나이트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크리스찬 베일, 히스 레저, 아론 에크하트

개봉 2008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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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팅거 스트리트
Pottinger St, Central, Hong Kong

포팅거 스트리트

포팅거 스트리트 역시 많은 영화가 사랑했던 장소다. 완만한 계단이 빼곡히 쌓인 언덕. 이 장소를 가장 낭만적으로 담은 영화는 두기봉 감독의 <스패로우>다. 포팅거 스트리트 끝에서 사진을 찍고 있던 임달화. 그의 렌즈에 임희뢰가 잡히고, 임달화는 단번에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위의 사진 역시 <스패로우>의 임달화 샷을 따라 찍은 것. 렌즈 안에 운명적으로 들어선 이성이 없다는 게 함정이다(...).

<스패로우>

1955년작 <모정>과 <무간도3: 종극무간> 역시 포팅거 스트리트에서 촬영을 진행했다. 홍콩 도심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코미디 <로스트 인 홍콩> 속에선 유명 감독의 영화 촬영지로 등장하기도 했다. 위 사진에 담기진 않았지만 메인 스트리트를 기준으로 뻗어나간 골목골목에 아기자기한 그라피티가 가득하다. 인생샷을 남기기에 더없이 훌륭한 곳.

<로스트 인 홍콩>
스패로우

감독 두기봉

출연 임달화, 임희뢰

개봉 2008 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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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드미럴티 역 육교
Admiralty, Hong Kong

애드미럴티 역 근처 육교에서 본 홍콩 야경.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이 보인다.

‘홍콩 야경’을 떠올릴 때 빅토리아 피크, 스타의 거리, 스타 페리 등만 떠올리는 이들이라면 주목하시길.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찬 애드미럴티 역 근처 육교에 올라서 보는 야경도 그만한 가치를 자랑한다. 도로 위를 유연하게 오가는 트램과 2층 버스, 짙푸른 공원과 그를 두르고 서 있는 형형색색 건물 조명의 조화란! <영웅본색>의 촬영지로 유명한 황후상 광장 너머 장국영이 생을 마감한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도 한눈에 볼 수 있다.

<천장지구>
애드미럴티 역 근처 육교에서 본 홍콩의 야경

기승전 <천장지구>!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을 뒤로 두고 조금 더 걷다 보면 또 하나의 육교가 나온다. <천장지구>의 애틋한 엔딩이 담긴 바로 그곳이다. 오천련은 웨딩드레스를 입고 구두도 벗어던진 채 사라진 유덕화를 찾아 도로 곳곳을 오간다. 성 마가렛 성당에서 이곳까지 맨몸으로 뛰어왔다니 사랑의 대단함이 느껴지는 장면. 구글맵에 따르면 걸어서 41분이 걸리는 거리라고 한다. 흠... 여튼 이곳을 배경으로 촬영하면 인생샷을 건질 수 있다. 에디터는 한 장 건졌다. 야호!


수집가들이라면 놓쳐선 안 될 마켓들

시선을 사로잡는 각종 피규어들. 잠든 기즈모가 탐났지만... 저 조그만 피규어 가격이...
위즐리 가를 쓸어오고 싶었지만... 저 레고 하나가 왜 2, 3만 원인지 알려주실 분?

역시 쇼핑의 도시다. 몽콕 근처를 비롯해 홍콩 곳곳엔 수집가들의 마음을 들썩이게 할 장난감 마켓이 늘어서 있다. 그 종류도 가지각색. 가격 물론 가지각색이니, 여러 숍을 들른 후 가격을 비교하는 부지런을 떨어야 현명한 소비자가 될 수 있다. <앤트맨과 와스프> 캐릭터 피규어를 비롯해 아직 국내에 공개되지 않은 상품들을 먼저 만나볼 수 있는 곳.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희귀한 아이템들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에디터는 냉동된 한 솔로가 박힌 레고 열쇠고리와 엘모 토미카 등을 데려왔다. <주토피아>에 등장하는 토끼 경찰, 주디 홉스의 당근 펜도 데려왔다. 주디 홉스의 목소리가 녹음되어있는 건 물론, 실제로 녹음을 할 수 있는 펜이기도 하다. 야호!

포그의 날개가 움직이는 배지와 냉동된 한 솔로의 모습이 박힌 레고 열쇠고리는 에디터 최애품으로 등극!

코즈웨이베이 hmv의 DVD/블루레이 코너

또 하나 놓쳐선 안 되는 것, 바로 ‘hmv’다.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영국 엔터테인먼트 체인점으로, 홍콩과 싱가포르에도 지사를 운영하고 있는 기업. 이곳에선 세계 각국 영화의 DVD와 블루레이를 만날 수 있다. 국내에서 구하지 못하는 특이한 디자인의 스틸북들이 널려있는 건 물론이다. 잡지와 장난감 코너도 따로 마련되어있다. 방문하게 된다면 시간을 넉넉히 잡고 둘러보시길!


덧. 디즈니랜드 이야기를 시작으로 글을 시작했는데 정작 그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대다수의 이들이 홍콩 디즈니랜드를 오후에 방문하길 추천하지만, 에디터는 오전에 방문하길 추천한다. 오전에 방문한 에디터는 줄을 서지 않고 놀이기구를 즐길 수 있었다. <토이스토리>를 테마로 꾸며놓은 토이스토리랜드가 이곳의 메인. 그러나 에디터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투모로우 랜드의 스타워즈 관련 어트랙션에서 츄바카의 품에 안겨 사진을 찍었을 때다. 츄바카가 조금 뚱뚱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그의 털이 <한 솔로: 스타워즈 스토리>에서 보이는 것처럼 부드럽진 않았지만... 어쨌든 행복했다. (사진 찍는 게 전부지만) 스타워즈 팬들이라면 꼭 방문해보시길!


씨네플레이 유은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