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민이 그려낼 타짜가 많이 궁금한데요, <타짜3>가 개봉하면 이 영화관에서도 걸리겠군요. 이 극장에서 만나자고 한 건 당신에게 어떤 추억이나 의미가 있는 장소여서겠죠?
=태어나 처음으로 와 본 극장이 여기입니다. 중1 때 부모님 따라 쫄래쫄래 와서 본 영화가 <쉬리>였어요. 이후 얼마간 조폭 코미디를 자주 봤어요. <달마야 놀자>, <조폭 마누라> 류의 영화들이 한창 붐이었거든요. 그때까지만 해도 제겐 좋아하는 영화 형식이라는 게 없었어요. 인기 있는 영화다 싶으면 휩쓸려가서 보곤 했죠. 그러다가 만난 영화가 이제, <와이키키 브라더스>예요. 역시 이 극장에서 봤습니다.
-당신 인생에 엄청난 방향키가 됐다는 <와이키키 브라더스> 말이군요.
=네. 당시 제가 16살이었어요.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미성년자 관람불가였기에 다른 티켓 끊고 들어가서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봤죠. (웃음) 그리고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헉, 세상에 이런 영화가 있다고?’ 영화라는 것에 호기심이 생기는 순간이었죠.
-저는 그래서 영화의 힘을 믿어요. 이것 봐요. 한 사람의 인생을 이렇게. (웃음)
=그 영화 참 희한해요. 저한테 처음으로 꿈을 심어준 영화기도 하고, 어쩌다보니 그 영화에 등장하시는 선배님들과도 연이 심상치 않게 닿기도 하고요. (박)원상 선배님(중3 때 친구 별장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배우), (황)정민이 형(박정민 소속사의 정신적 지주), 이번에 만나는 (류)승범 형님까지. 그리고 도일출의 아버지 ‘짝귀’ 주진모 선배님도 그 영화에 휴게소에서 카세트 테이프 파는 아저씨로 나오시죠. (웃음)
-(놀라며) 오, 정말 그러네요.
=그리고 그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 자체가 제가 늘 고민하는 거예요. 그 대사, 너무 좋아하거든요. “너는 행복하냐? 그렇게 좋아하는 일 하면서 사니까 행복해?”
-당신에게 연기는 가장 좋아하는 일인가요?
=네. 가장 좋아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고민인 거군요.
=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산다고 해서 늘 행복한 건 아니니까요.
-왜 ‘좋아하는 일은 직업으로 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반대로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서 행복하다’는 사람도 있고요. 당신은 어느 쪽입니까.
=어느 순간에는 그래요. 지난 내 모든 선택을 후회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그때 왜 그분을 만났지? 내가 그때 그 영화를 왜 봤지? 그때 그 학교(한예종)를 왜 들어갔을까. 안 그랬더라면!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불행하지 않을 텐데, 라고요.
-저런.
=그런데 이게, 참. 제가 치유를 가장 많이 받는 것도 결국 이 일입니다. 그러니까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아요. 아직 자리를 확고하게 잡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불안함 때문이라는 생각도 해 봤는데, 한편으론 또 그렇더라고요. 자리를 잡으면? 자리를 잡는다고 과연 불안이 없어질까. 아닐 것 같더라고요.
-한계를 깨면 또 다른 한계가 오죠.
=또 다른 불안이 오고요.
-뭐가 가끔 당신을 불안하게 하나요.
=불특정 다수에게 칭찬도 받고 욕도 먹는 직업이잖아요? 관심을 받는다는 게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제가 하는 일에 대해 보여주는 관심이 아니라, 박정민이라는 한 개인에 대한 관심도 점차 커지는 걸 느껴요. 그게 부담일 때가 있습니다.
-어쩌죠. 제가 보기에, 당신을 향한 대중의 관심이 앞으로 더 커질 텐데요.
=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제가 또…(웃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연기라는 게, 누군가를 속이는 일이잖아요?
-배우는 그 거짓을 진실 되게 표현해야 하는 존재고요.
=네. 아이러니죠. 거짓을 진실처럼 연기한다는 게 말입니다. 그러다 보면 저 자신까지 속이는… 음, 속인다기보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연기적으로 뭔가 잘 안 풀려서 그럴싸하게 넘어가려고 할 때가 있는데, 그 순간이 저는 두려워요.
-타인을 실망시키는 것보다, 자신에게 실망하는 게 더 두려운가요?
=그건 나눌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적당히 타협하고 넘어가자, 하는 그 순간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겐 미안하고 저 자신에겐 수치스러운 거죠.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은 하는데 혹여나 그게 드러나서 들킬까 봐 늘 불안한 겁니다. 너무 잘하고 싶으니까, 나의 능력치를 꽁꽁 숨기고 전전긍긍하는 거예요. ‘아씨, 이거 들키면 안 되는데…’ 그러다가 ‘들키겠는데…’ 하는 순간 확 무너지는 거죠.
-그런데 1신부터 100신까지 모든 장면을 진심으로 연기한다는 게…그럼 너무 힘들어서 기진맥진할 거예요.
=왜냐하면 저는 천상 배우의 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자격지심 같은 게 있거든요. 그러다 보니 남들보다 더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습니다.
-천상 배우의 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정확한 기준을 제시할 순 없는데, 왠지 모르게 저한테 그런 느낌을 주는 배우들이 있습니다. 그 배우 이면에선 어떤 노력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엔 타고나게 잘하는 것 같은 거죠. 그런데 저는 아닌 거예요.
-왜 본인을 아니라고 확신하죠? 남들의 눈엔 그렇게 보일 수도 있는데요.
=글쎄요. 제가 살아온 과거도 그렇고…누군가 저를 보고 ‘와, 쟤는 배우다’라고 생각해 주신다면 그건 고마운 일이에요. 그런데 저는 그걸 왜 그렇게 못 받아들이겠는지 모르겠어요.
-간질간질한가요.
=그런 것도 있고, 저 정말 평범한 사람이거든요. 제가 배우 되겠다고 했을 때 저희 엄마가 그러셨어요. “아이고~ 우리 정민이가 그런 애가 아닌데, 큰일 났네.” (웃음) 어릴 때 누구 앞에 서는 걸 극히 싫어하는 존재감 없는 아이였습니다. 좋아도 좋은 티 못 내고, 화 자체를 내지 않았던 사람. 어떤 규제 안에서 사는 게 너무나 편했던 사람. 그게 저였어요. 감정들을 자제했던 거죠.
-여전히 스스로를 어떤 틀 안에 가둬놓는 경향이 남아있나요?
=있죠. 그건 피가 그래요. 아버지 닮아서. (웃음) 아버지가 남에게 피해 주는 걸 극도로 꺼리는 분이세요. 늘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셨어요. 어릴 땐 그 모습이 답답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아버지처럼 답답하게는 살지 않을 거야’ 생각하기도 했죠. 제가 <7년의 밤> 오디션을 봤었어요.
-<7년의 밤>이 아버지와 아들에게 일어나는 슬픈 이야기잖아요?
=네. 오디션 때 자유 연기를 준비해 오라고 해서 직접 아버지와 관련된 대사를 만들어 갔어요. 오디션 때 울컥울컥하는 게 쉽지 않은데, 그날은 독백하면서 엉엉 울었어요. 아버지 관련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어어…어어…흑…크아앙” 이렇게 된 거죠. (일동 웃음)
-뭐가 그렇게 슬펐습니까.
=아버지와 너무 닮아 있는 내 모습이 소름 끼치더라고요. (좌중 폭소)
-세상 많은 부자들을 보면서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 아들에게 아버지란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인지, 뛰어넘어야 하는 존재인지.
=저는 개인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성격도 그렇고 제 성격도 그렇고, 서로에게 살가운 편이 아니에요. 애정 표현에 서툴고 무뚝뚝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 클수록 점점 그렇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