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일본 나가사키 현 사세보 시로 전학 온 카오루는 범생 스타일의 도련님으로, 변해버린 자신의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어렸을 때 이혼한 어머니와 선원이라 자주 집을 비운 아버지 때문에 반 고아처럼 자란 그는 잘생긴 외모와 달리 소심하고 경계심 많은 성격으로 위축되고 외로운 삶을 보냈다. 그런 카오루를 구제해준 건 구제불능으로 소문난 문제아 센타로와 다정한 학급위원인 리츠코다. 레코드 가게를 하는 리츠코네 집에 놀러갔다가 센타로가 연주하는 재즈 드럼과 마주친 그는 어떤 다른 음악도 인정하지 않는 센타로의 고집과 열정에 휘말리게 되며 자신도 재즈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하지만 서로의 사랑이 엇갈리고 영원할 것 같던 우정에 위기가 찾아오며 이들 청춘은 새로운 앞날을 향해 발을 디딘다.
<언덕길의 아폴론>은 코다마 유키가 소학관의 순정 만화잡지 ‘월간 플라워즈’에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연재했던 작품으로, 9권의 본편과 1권의 번외편이 100만부를 돌파할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어찌 보면 굉장히 흔하디흔한 설정을 갖춘 이 작품은 그러나 1960년대라는 노스탤지어를 자극시키는 배경에, 꼬리에 꼬릴 무는 5각(?) 관계라는 청춘 로맨스와 음악(그것도 재즈!)을 부각시키며 2009년 “이 만화가 굉장해!” 여성부문 1위를 차지했고, 완결된 2012년엔 제57회 소학관 만화상 일반부문을 수상하는 등 대중적 지지와 함께 비평적 성공까지 이뤄냈다. 무엇보다 낭만적인 요소를 극대화시키는 동시에 세밀한 내면을 드러내며 청춘과 추억, 사랑과 우정 그리고 음악을 황금비율로 녹여낸 복고지향적인 이야기는 잔잔한 파고를 남긴다.

- 언덕길의 아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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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미키 타카히로
출연 치넨 유리, 고마츠 나나, 나카가와 타이시
개봉 2018 일본
만화 자체가 1960년대 재즈 전성기를 전면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만큼 수많은 명곡들과 레전드 반열에 오른 아티스트들이 끊임없이 언급되고 있는데, 깨알 같은 디테일들과 고증이 어우러지며 음악팬들을 즐겁게 만든다. 가령 존 콜트레인의 죽음(1967년)을 애도하는 장면이나 당시 최고 인기작이었던 <사운드 오브 뮤직>을 극장에서 놓쳐 못 봤다(1965년)는 리츠코의 고백을 비롯해, 피아노를 치는 카오루의 외모는 놀랄 만치 당시 최전성기에 있던 빌 에반스를 연상케 하고, 전공투로 인해 도망자 신세가 된 트럼펫을 부는 쥰이치는 치아가 망가져 몰락해버린 쳇 베이커(1966년)의 상황을 빗대는 등 이런 잔재미들이 작품 전반에 걸쳐 등장한다. 만화의 성공으로 아예 본편에 등장하는 곡들을 모은 이미지 앨범이 2009년에 발매되기도 했다.
카오루와 센타로가 재즈로 만나게 되는 계기이자 사실상 이 작품을 상징하는 곡처럼 되어버린 아트 블래키와 재즈 메신저스의 ‘Moanin'(1959)’을 필두로, 극중에서 러브 테마처럼 활용된 빌 에반스 연주의 <백설 공주> 삽입곡 ‘Someday My Prince Will Come(1960)’과 리츠코가 좋아한다고 밝혔던 <사운드 오브 뮤직>의 ‘My Favorite Things(1961)’을 존 콜트레인이 소화한 넘버, 그리고 쥰이치가 쳇 베이커에 잔뜩 투영이 돼 그 매력을 한껏 표출해내던 ‘But Not For Me(1956)’와 재즈 합주의 즐거움 속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호레이스 실버의 ‘Blowin' The Blues Away(1959)’나 마일즈 데이비스의 ‘Bags Groove(1957)’ 등 거장들의 주옥같은 레퍼토리들을 선별해 재즈 초심자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만든다.
만화의 나라이자 아니메의 나라인 일본에서 이 히트작을 가만 놔둘 리 만무한데, 만화책이 완결된 다음해인 2013년 후지TV의 심야 애니 브랜드로 유명한 ‘노이타미나’ 라인업으로 애니화 발표가 이루어졌다. 감독은 <카우보이 비밥>과 <사무라이 참프루>의 와타나베 신이치로. 무려 8년만의 일선 복귀작이었다. 제작진의 면면도 화려하기 그지없다. 90년대 3대 캐릭터 디자이너라는 명성을 떨친 유키 노부테루가 참여한 건 물론, 총 작화엔 베테랑 야마시타 요시미츠가, 제작엔 일본 아니메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백전노장 마루야마 마사오가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슴을 뛰게 만드는 건 음악을 맡은 칸노 요코의 존재감이다. <카우보이 비밥>의 그 인상적인 사운드를 기억한다면 와타나베와 칸노의 해후가 엄청 반가울 것이다.
와타나베의 연출 데뷔작이자 칸노의 아니메 음악 데뷔작이기도 했던 <마크로스 플러스>로 세상에 충격파를 던진 그들은 재즈를 중심으로 클래식에서부터 민속음악, 록, 테크노, 뉴에이지, 아이돌 팝까지 온갖 잡다한 장르들을 녹여 독자적인 색채를 만들어낸 <카우보이 비밥>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리고 무려 14년 만에 만나 다시 재즈 선율을 선보인다. 그때와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언덕길의 아폴론>은 <카우보이 비밥>과 달리 미래의 음악이 아닌 과거의 음악이라는 점. 그래서 원작에서 인상 깊게 등장했던 수록곡들(앞서 언급한 만화책의 이미지 앨범에 실린 고전들)을 다시 불러와 미치나가 타카시(피아노), 이시와카 슌(드럼) 등 젊은 재즈 세션들을 기용해 파릇파릇하면서도 열정적인 모습의 색다른 해석을 들려준다.
여기에 마일즈 데이비스의 ‘Four’나 크리스 코너의 ‘Lullaby of Birdland’, 일본의 그룹사운드 더 스파이더스가 1966년에 발표한 ‘헤이・보이 ヘイ・ボーイ’나 ‘뱅뱅뱅 バンバンバン’ 등을 선곡해 시대적인 색채에 방점을 찍는다. 물론 칸노 요코만의 감각적이고 세련된 오리지널 스코어가 가진 감성도 고전들 사이에서 위화감 없이 조화를 이루며 빛을 발한다. 이미 <불량 공주 모모코>와 <허니와 클로버>, <바닷마을 다이어리> 등에서 청춘과 현실에 대한 서정성과 아름다움을 들려준 바 있기에 그녀의 재기발랄하면서도 다양한 스펙트럼의 음악들은 원작이 가진 여러 의미들을 더 입체적으로 부각시킨다. 음악을 좋아하는 와타나베 감독은 12화에 이르는 각 에피소드 소제목에 유명한 재즈 곡명들을 붙이기도 했다.
원 소스 멀티 유즈를 지향하는 일본답게 <언덕길의 아폴론>은 2018년 실사화 됐다. 연출은 청춘 연애물의 대가(!)로 자리 잡은 미키 타카히로. 그는 데뷔작이었던 <소라닌>을 비롯해 지난 8년간 <우리들이 있었다>, <아오하라이드>, <핫 로드>, <푸른 하늘 엘>, <선생님!... 좋아해도 될까요?> 등 유난히 많은 만화 원작의 영화들을 만들었다. 보통 극악의 평가를 받으며 코스튬 영화라고 평가절하 당하는 것과 달리 그가 찍은 작품들은 좋은 각색과 높은 원작의 이해도를 보이며 평균 이상의 평가를 이끌어냈다. 재밌게도 <소라닌>과 중편인 <관제탑>, <입술에 노래를> 그리고 이번의 <언덕길의 아폴론>까지 음악이 소재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가 소니 뮤직에서 뮤직비디오를 찍으며 경력을 시작했다는 걸 떠올려본다면 충분히 이해될 듯 싶다.
그런 만큼 이 작품의 음악을 담당한 이에게 관심이 모아진다. 1987년 결성돼 지금까지 일렉트릭과 재즈, 록, 민속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크로스오버하며 자신만의 색깔을 보인 관록의 그룹 ‘리틀 크리쳐스’의 베이시스트 스즈키 마사토가 처음 영화음악에 데뷔한다. 그는 2시간이란 영화의 시간적 제약 때문에 원작과 애니판에 등장하던 다양한 고전 넘버들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없었다. 대신 본편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Moanin'’과 ‘Someday My Prince Will Come’, ‘My Favorite Things’에 집중하며 여러 버전으로 편곡해 관객들 마음에 다가간다. 워낙 친숙한 곡이기도 하지만, 짧게 환기하며 반복/각인시키는 그의 선택도 탁월했다. 그리고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와 팻츠 나바로의 ‘Fat Girl’을 새롭게 선택했다.
나머지 빈 공간에 스즈키 마사토의 짧은 스코어들이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다. 긴 이야기를 짧은 시간 안에 우겨넣고 바쁘게 진행하는 만큼 사실 음악이 들어갈 공간은 그리 넉넉지 않다. 하지만 재즈의 느낌을 간직하면서도 추억을 건드리는 긴 여운은 은은하고 영롱하다. 칸노 요코의 요란뻑적지근한 스타일리쉬함과 달리 그의 영화판 스코어는 차분하고 정갈하다. 건반과 기타가 메인이 돼 생애 가장 소중했던 우정과 사랑을 복기해내는 음악은 미키 타카히로의 섬세한 연출력과 어우러져 관객들은 사로잡는다. 마치 기억이 그런 것처럼, 오래된 친구가 그런 것처럼 인생의 언덕길에서 거친 숨을 몰아쉴 때 위로가 되어주는 음악이다. 자신도 모르게 극장 문을 나서며 절로 ‘Moanin'’의 선율을 흥얼거릴 것이다.
사운드트랙스 / 영화음악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