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훈 로드’가 되겠군요.
=브리핑을 잠시 해 드리면, 일단 가로수 길로 들어가서 사람 구경을 해요. (웃음) 그러곤 한남동으로 빠져서 남산을 한 바퀴 돌든지, 아니면 남산 돌다가 해방촌으로 빠져서 경리단길을 거쳐 다시 남산과 삼청동으로 갑니다. 삼청동 끝자락에 제 친한 동생이 하는 카페가 있어요. 보통은 거기를 마지막에 들르죠. 날 좋고 기분이 좋으면 그 가게 루프탑에 앉아서 술을 한잔 하곤 해요. 제가 대리운전을 부르는 순간이죠. 오늘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웃음)
-(운전대 잡은 손을 보고는) 왼손잡이시군요! 아까 밥 먹을 때도 왼손 쓰시더니.
=운전할 때 왼손, 밥 먹을 때도 왼손. 양손잡이죠.
-좌뇌와 우뇌가 균형 있게 발달했겠네요.
=제가 젓가락질도 왼손으로 똑바로 하는데 젓가락질로 세대 차이 느끼는 거 혹시 아시나요? 꼰대처럼 ‘젓가락질 잘해야 해!’ 이런 건 절대 아니고요. (웃음) 의외로 젓가락질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많이 없거든요. 물론 DJ DOC 노래처럼 젓가락질이 대수는 아니지만.
-“젓가락질 잘해야만 밥 잘 먹나요~♬” 가사 말이죠?
=네. 그 말이 맞는 말이지, 하다가도 이런 상상을 하면 또…가령 훗날, 여자 친구 집에 가서 장인어른 될 분을 처음 뵙고 식사를 하면서 “따님을 저에게 주십시오!” 하는데 젓가락질이 어눌하면 뭔가 모양이 빠지겠다 싶은 거예요.
-하하하, 젓가락질 하나로 굉장히 구체적인 상상을 하셨군요.
=배우는 어떤 선입견을 활용하기도 하고 깨부수기도 하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래서 정갈한 역할을 맡으면 오히려 젓가락질을 이상하게 하는 쪽으로 연습하기도 합니다. 캐릭터로 접근하는 거죠.
-정석임을 자부하는 젓가락질은 부모님에게 혼나면서 배운 건가요?
=사람에게 훈계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렇게 부모님이 혼내며 가르쳐도 못 고치다가, 결정적 계기를 만났죠. 초등학교 6학년 때 우리 반에 정말 인기 많은 친구가 있었어요. 초등학교 급식이 저희 6학년 때 처음 도입됐는데, 걔가 젓가락질을 정말이지 너무 ‘딱!’ 하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 없었어요. 그걸 보고는 저도 젓가락질을 잘하게 됐죠. 연습 없이 ‘한 큐’에!
-왜 그렇게 자극받았을까요. 그 친구가 평소 멋있었다는 게 영향을 미쳤겠죠?
=분명 있죠. 마치 우리가 (정)우성이 형 때문에 오토바이를 타는 것처럼 말이죠. (일동 웃음) 저는 집에 <비트> 블루레이도 있어요.
-정말이지, 당신 또래 남자들이 정우성이란 배우에게 지니는 로망이란!
=아우, 저도 제 나이 또래라고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지금 10대 20대들도 정우성 그러면, 그의 영화는 안 봐도 ‘움짤’이라도 찾아봐요. 시대를 대표하는 슈퍼스타라는 게 그런 것 같아요.
-시대의 아이콘인 거죠.
=네. 퀸이나 마이클 잭슨 같은. 요즘 그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대중성과 예술성은 그리 멀리 있는 게 아니구나,란 생각을요. 가령 카페에서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제가 선호하는 장르가 아님에도 끌릴 때가 있어요. 핸드폰 검색기능으로 찾아보면 여지없이 명반이에요. 사랑받는 것들은 다 이유가 있다는 걸 알았죠.
-왜 요즘 그런 생각을 자주 하게 됐을까요.
=그건 <아수라> 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황)정민이 형이나 연기 잘하는 분들을 보면 뭔가 자기 세계에 빠져서 감정을 표현할 것 같잖아요? 그런데 아니에요. 그들이 더 대중을 생각합니다. 감독이 오케이 해도 “딕션, 이상하지 않아요? 이게 관객들에게 전달이 되나요?” 해요. 저는 예술성과 대중성을 어떤 선입견을 두고 바라봤는데, 진짜 플레이어들은 그걸 다르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요.
-<궁>이라는 작품을 통해 많은 사랑이 쏟아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최근 당신을 향한 대중의 관심도 못지않다고 느껴요. 하지만 과거에 받은 사랑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궁> 때 뭔가가 확 변했죠. 그때 제 나이 스물다섯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연기자로 데뷔한 건 아니었던 거죠. 연기 전공자는 아니었지만, 모델 쪽에서는 나름 선배에 속한 나이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남들이 보기엔 새내기인데, 제 입장에서는 새내기가 아니었던 거예요. 실상은 새내기가 맞았는데 말이죠. 나름 세상을 안다고 생각하다 보니, <궁>이라는 게 훅 들어와도 휘청이거나 들뜨고 싶지 않았어요. ‘아, 이건 한 번에 온 거기 때문에, 한 번에 나갈 거야’라는 생각을 했던 겁니다.
-철이 일찍 드셨군요. 스물다섯도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게 더 많은 나이인데.
=제가 스물한 살 때부터 가장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세상을 조금 거칠게 바라본 면이 있습니다. 조금 비관적으로 보기도 했고요. 아, 비관적이라기보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어떤 행운이 오면 의심부터 하는?
=맞아요. 나를 둘러싼 세계가 너무 한 번에 변하니까 가치 충돌이 있었던 겁니다. 내가 무슨 특별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데, 그냥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뿐인데, 뭐가 특별하다고 유난을 떠나 하는 식의 생각이 강했던 거예요. 지금이야 몸으로 경험하며 터득한 대처 방법들이 있지만, 그땐 그런 게 없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그게 큰 경험이 됐군요.
=생각해보면…그땐 너무 무섭고 두려웠던 거예요. 말 그대로 눈 뜨고 일어났더니 온 세상이 나를 보고 있었던 거니까… 갑자기 튀어나온 저에 대한 반감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궁>이 만화로 이미 인기가 많은 작품이어서 “네가, 뭔데”라는 댓글도 많았거든요. 어떻게 보면 견디려고 신경을 차단시킨 면이 있어요.
-무의식적으로 말이죠.
-네. 나는 그냥 나다. 나는 이전과 똑같다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그때의 나를 바라보니, 너무 많이 흔들리는 나약한 존재였던 거고요.
=맞아요. 그런 생각은 해요. 20대에만 받을 수 있는 종류의 사랑이 있잖아요? 팬들이 <궁> 느낌을 계속 원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일부러 피한 느낌이 없지 않아요.
-그렇죠. 그 다음 작품이 <궁>과는 결이 완전히 다른 <마왕>이었으니까.
=‘이런 건 안 할 거야~’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반대되는 것들에 매력을 느꼈던 것 같아요. 어렵게 들리지만, 점심에 자장면 먹었으니까 저녁엔 중식 말고 한식을 먹고 싶었던 거죠.
-사실 매니지먼트 바닥에서는 자장면이 대박나면 자장면을 한동안 미는 법인데, 본인이 튕겨 내신 거네요.
=인지도나 금전적인 것들로 이야기하면 그로 인해 손해 본 지점이 없지 않아요. (웃음) 하지만 긴 배우 인생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공감하는 바에요. 늘 궁금했던 게, <궁>과 <마왕> 사이에 연기 갭이 크게 느껴집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말이죠.
=저는 제가 모르는 것들을 불안해해요. 연기라곤 짧은 단막극 한두 개밖에 없는 상황에서 <궁>에 들어가다 보니, 기본적으로 항상 쫄아 있었어요. 가령 “렌즈 갈아~”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니까, 혼자 ‘어…어…어…?’ 하고 있었던 거예요. 지금이야 연기할 때 콘티가 머릿속에 그려지는데, 그땐 몰랐죠. 어쨌든 <궁>의 흥행으로 자신감을 얻고,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게 되니까, 다음 현장에서는 덜 쫀 거죠.
-준비된 자와 준비되지 않은 자의 차이였군요.
=우리가 아는 길을 갈 때와 모르는 길을 갈 때 완전히 다르잖아요? 그런 느낌인 거죠.
-뮤지컬 <돈주왕>은 어땠습니까. 그 또한 익숙하지 않은 길이었잖아요?
=<돈주왕>은 그래도 부끄럽지 않은 게, 그때 음악감독님이 그런 편지를 주셨어요. ‘다른 파트에서 활동하다가 넘어온 배우들 통틀어서 너만큼 열심히 한 사람 본 적 없다’라고. 그런데 사실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잖아요? 보통 뮤지컬 시스템은 10 to 6을 하다가, 공연 시작 2주를 남기고 10 to 10을 해요. 그런데 저는 늘 두 시간 전에 나가서 연습하고, 문을 닫은 후에도 남아서 연습했습니다. 쉬는 날 없이요.
-그게 어떤 마음이었나요. 부담감? 누군가를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마음?
=저는 성격이 그래요. 남들이 잘한다고 하든, 못한다고 하든, 저 스스로 자신감이 들 때까지 해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대신 준비됐다고 생각하면,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죠. <돈주왕>이 더블캐스팅이었는데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모두 저를 예뻐해 주셨어요. 공연 첫날, 모두 보러 와 주셨는데 저 빼고 모두가 목에 담이 왔다는 거예요. 제가 실수할까 봐 숨죽여 보시는 바람에 말이죠. 공연 끝나고 다들 “지훈이 많이 떨렸지?” 하는데, 정작 저는 “안 떨렸는데요…” (일동 웃음)
-자기 기준이 높다고 해야 할까요?
=허들이 높긴 합니다. 요즘은 그래도 편해졌어요. 세월과 함께 나름 쌓인 게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허들만 높아서 제가 저 자신을 되게 괴롭혔던 것 같아요. <궁>과 이어지는 이야기인데, 조금 기뻐할 수 있는데 계속 채찍질만 했던 거죠.
-아까 그랬잖아요? 깨어났더니 세상이 바뀌었다고. 그럴 때 뭐가 가장 중요할까요? 주변에 좋은 이야기를 건네주는 조언자? 아니면 나 스스로에 대한 강한 믿음? 혹은 다른 무엇?
=정우 형과 김용화 감독님이 해 준 말이 있어요. 듣는 순간 ‘아, 내가 찾아 헤매던 답이다!’ 싶었던 말입니다. 두 분이 그랬어요. “큰 사랑을 받을 땐 깊이 감사해야 한다. 내가 잘나서라고 생각하면 절대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일에는 변수가 참 많으니까”라고. 맞는 말이에요. 우리가 작품으로 관객들을 만나는 중간 과정엔 예측할 수 없는 변수와 소위 말하는 운이라는 게 분명 있거든요. 흥행은 나 혼자 잘한다고 되는 게 절대 아닌 거죠. 그러니 큰 사랑을 받을 땐 그저 감사해야 하는 거고요. 그 말이 점점 와 닿고 있어요.
-말씀처럼 영화나 연기라는 게 크고 작은 변수가 너무 많은 일이기에 웬만한 약한 마음으로는 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부침(浮沈)은 몇 번 겪는다고 해서 나아지는 게 아니니까요.
=그럼요. 절대 나아지지 않아요. 그래서 조금씩 아픈 거예요, 다들. 그래도 요즘은 이전에는 밝히길 꺼려했던, 공황장애나 우울증들을, 조금씩 커밍아웃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나쁘지 않은 변화라고 생각해요.
=네. 가치는 계속 변해 가는데, 그 가치를 따라가는 시간은 다를 수 있잖아요?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타인이 보기엔 고집이나 아집으로 보일 수도 있고요. 나는 바뀔 의향이 있는데 그 시간이 조금 늦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고민이 있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