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부도의 날> 포스터

영화는 빠른 속도로 150만 관객을 넘었다. 흥행 성적도 좋고, 무대인사도 다녔으니 들뜰 만도 한데, 그의 소감은 간결했다. “기뻐요.” 그건 겸손한 것도, 그렇다고 감정을 억지로 감추는 말도 아니었다. 딱 그 세 글자에 <국가부도의 날>을 연출한 최국희 감독의 간결하고, 솔직하고, 그러면서 성급하지 않은 심성이 담겨있었다.


<국가부도의 날>을 연출한 최국희 감독

최국희 감독은 2016년 <스플릿>으로 장편 영화계에 들어섰다. 자신이 쓴 각본으로 연출한 영화는 관객들의 호평에도 76만 명이란 성적에서 만족해야 했다. <국가부도의 날>은 전작과 달랐다. 엄성민 작가가 쓴 시나리오에 화제성 1위인 배우들이 호흡을 맞췄다. 직선적이었던 <스플릿>과 달리 <국가부도의 날>은 다층적이고 복잡했다. 그 도전을, 최국희 감독은 과감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성공했다.

“시나리오를 받았고, 소재부터 신선했다. 저 역시 IMF 세대라 읽고 나서 울분도 생겼고. 시나리오 완성도가 높았다. 그래서 잘 만들어보고 싶었다.”

갑수 역의 허준호(가운데)와 장면 논의 중인 최국희 감독(오른쪽)

최국희 감독은 탄탄한 시나리오를 믿었다. 어려운 경제 용어가 쏟아져도, 많은 인물이 나오는 동시다발적인 얘기에도 시나리오를 착실히 옮기면 관객들이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 계산은 들어맞았다. 용어를 설명하는 자막 없이도 관객들은 <국가부도의 날>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어려운 경제 용어들의 비주얼화. 그런 것에 신경을 많이 썼다. <타짜>를 볼 때 모든 관객이 장이 뭔지, 사쿠라가 뭔지 다 아는 건 아니지만, 상황이 주는 것, 혹은 배우들의 표정만 봐도 이해를 한다. 경제 용어가 많고 어려워도 관객들이 따라오는 건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감정들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나리오가 잘 돼있어서 다양한 인물을 잘 보여줄 수 있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인물의 색깔 정도였다.”

여러 이야기가 교차되기에 각 이야기의 ‘색’만 제대로 살리면 잘 섞일 거라고 최국희 감독은 생각했다. 촬영 톤, 컬러감에 조금씩 변화를 줬고, 자료들을 토대로 1997년 배경을 최대한 보존했다. 가상의 이야기지만 당시 환경을 정확히 보존하지 않으면 안 될 영화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경제 서적을 읽고 할리우드의 경제 영화들을 챙겨봤다.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다. <마진 콜>도 좋았고, <빅 쇼트>도 재밌게 봤다. 하지만 그들은 그 사태를 비꼬거나 희화화할 수 있지만, IMF는 그런 주제가 아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다른 영화들하고는 톤앤매너(작품의 일관된 정서나 분위기)가 다르다.”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왼쪽), <빅쇼트>는 경제계의 부조리함을 코미디로 승화시켰다.

그렇지만 <국가부도의 날>은 가짜를 진짜인 척하지 않는다.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쌓아진 이야기를 ‘가상의 이야기’라고 스스로 주장한다. 한국은행 ‘총재’가 아닌 ‘총장’의 바쁜 손놀림으로 영화를 여는 이유도 사실은 영화가 ‘가상의 이야기’임을 주장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실제 인물을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비틀었다. (조우진의 배역 이름이) 재정국 차관인 것도 비슷한 이유다.”

재정국 차관(조우진, 왼쪽)과 한국은행 총장(권해효)은 의도된 오류였다.

이렇게 판을 짜놓으니 배우들도 자신들의 역량을 한껏 드러냈다. 영화를 보면 자연스럽게 그들이 곧 우리가 지나온 1997년의 얼굴들로 느껴졌다. 특히 주연들만이 아니라 조연들의 앙상블도 탁월했다.

“통화정책팀은 팀으로 움직이니까 연기 호흡을 고려 안 할 수가 없다. 전체적으로 한시현 팀장, 김혜수 선배에게 포커스가 많이 가있지만, 조한철 배우, 장성범 배우, 박진주 배우 모두 정말 잘 해줬다. 그들한테도 공이 간다고 생각한다. 감사하다. (한보 그룹 직원들의 몽타주와 대교 위 자살남에 대해 묻자) 그분들도 다 오디션 보고 캐스팅했다. 한강 위의 자살남 맡으신 박경찬 배우도 정말 연기를 잘하신다. 좋은 배우들을 뽑으려고 노력했다.”

<국가부도의 날> 속 통화정책팀

이쯤에서 물어봤다. 이렇게 쟁쟁한 배우들에게서 최국희 감독이 느낀 그들의 장점은 무엇이었을까.

“김혜수 선배는 정말 준비를 많이 하시고, 상대 배우의 토씨까지 외우신다. 시나리오 쓰는 입장에서도 헷갈릴 때가 있는데, 정말 다 외우신다. 그 정도로 열정과 열의, 태도가 있으시다. 존경할만한 배우다.”

“유아인 배우는 소통을 정말 잘하고, 같이 있으면 에너지가 솟게 하는 친구다. 사실 분량도 적고 다른 주요인물과 만나지도 않는 배역인데 유아인 배우가 잘해줬기 때문에 감사하다. 계급 변화의 욕망을 보이면서도 동료에게 돈 버는 거 좋아하지 말라고 손찌검하고, 축하파티에서도 씁쓸한 모습을 보이고. 저는 그게 현실감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표현하기 쉽지 않은데 그걸 잘해줘서 더 좋고, 감사하다.”

“허준호 배우님은 언제나 웃고 계신데, 인자한 웃음이 있다. 하루 종일 항상 웃고 계신다. 주변 인물도 웃게 만드는 웃음이 있으시지만, 카메라 앞에서는 갑수로 딱 돌변하신다.”

“조우진 배우도 연기 잘하는 거 모두가 알지만 정말 준비를 많이 한다. 상황이나 대사 토씨를 분석한 걸 들고 와서 상의하고, 그런 것들이 현장에서 더 배가 되는 것 같다.”

그 배우들 중에서도 최국희 감독은 김혜수의 열정을 한껏 치켜세웠다. 그는 “열심히 하시기로는 전 세계 1등”이라고 김혜수의 노력에 혀를 내둘렀다. 반면 <국가부도의 날>을 빛낸 배우는 또 있다. 바로 군대 전역 이후 처음 스크린에 얼굴을 비춘 류덕환과 최국희 감독의 데뷔작 <스플릿>에 이어 이번에도 출연한 권해효다.

오렌지 역의 류덕환(왼쪽), 총장 역의 권해효

“류덕환 배우에겐 군 복무 중일 때 시나리오를 줬다. 원래 주연급 배우니까 작다면 작은 역인데, 선뜻해준다고 해서 고마웠다. 이 영화가 숨 쉴 때가 없는 영화인데, 류덕환 배우에게 카메라 갔을 때 관객들이 숨 쉴 공간을 만들어 준 것 같다. 연기를 잘해주셔서 가능한 거라 감사하다. 권해효 배우는 제가 좋아하는 선배님이다. 연기면에서도, 인간적으로도 멋진 분이고, 의지가 되는 분이다. 정말 순수하시다.”


영화가 한참 상영 중이지만, 혹시 차기작 계획은 어떤지 물었다. 최국희 감독은 “계속 뭘 끄적거리긴 한다. 하지만 끄적거릴 때마다 만족스러우면 얼마나 좋겠나. 그게 쉽지 않다”며 웃었다. 아직은 <국가부도의 날>로 얻은 값진 경험을 좀 더 간직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무대인사를 할 때 배우분들을 위한 경호팀이 있다. 그중 한 분이 오셔서 (영화를 보고) 아버지랑 통화했다고 하시더라. IMF 때부터 아버지랑 엄청 사이가 안 좋았는데, 영화를 보고 통화했단 거였다. 그런 반응이 정말 뿌듯하다.”

<국가부도의 날> 무대인사 인증샷. (왼쪽부터) 최국희 감독, 허준호, 유아인, 김혜수, 조우진

그는 IMF가 대한민국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친 큰 사건임은 명확하다고, 그렇지만 모든 게 그 사건에서 비롯된 건 아니라고 못 박았다. 다만, 21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봐야 할 사건인 것도 덧붙였다.

“아픈 과거이지만 한 번쯤 돌아봐야 할 이야기인 거 같다. 보신 분들은 많은 걸 생각하셨을 거고, (겪지 않으신 분들도) 많이 궁금해하실 거다. 21년, 많이 지났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에 영향을 미친 큰 사건을 다룬 영화다. (아직 안 보셨다면) 앞으로 봐주십사 바라고 있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
사진제공=영화사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