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던 필 감독은 <어스>의 촬영을 준비하는 루피타 뇽에게 공포영화 10편을 봐주기를 요청했다. 1963년 작 <새>부터 2014년 작 <팔로우>에 이르는 리스트다. 전혀 다른 성격의 도플갱어까지 1인2역을 맡아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는 주연배우에게 권한 작품들인 만큼, <어스>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지표이기도 하다. 10편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어스>와의 접점을 짚어봤다.


The Birds, 1963

<현기증>(1958),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 <싸이코>(1960) 등의 걸작을 연달아 만들어내던 알프레드 히치콕의 황금기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 기존 히치콕의 영화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긴장과 공포를 주력으로 삼았다면, <새>는 사람이 아닌 새를 공포의 주체로 설정해 어느 마을이 새떼의 공격을 받는 상황을 밀어붙였다. 스크린을 찢고 달려들 것처럼 프레임을 헤집어놓는 새들의 린치가 '영문도 모르는 채' 펼쳐진다는 점이 공포를 배가시킨다. 한적한 마을이 한바탕 난리통이 되는 풍경이 <어스>의 공간과 닮아 보인다. 마이클 아벨스가 만든 <겟 아웃>과 <어스>의 음악은 히치콕의 음악 파트너였던 버나드 허먼의 날카로운 현악 사운드에 크게 빚지고 있는데, 정작 <새>는 전자건반과 실제 새소리로 만든 효과음만으로 채워졌다.


샤이닝

The Shining, 1980

스탠리 큐브릭의 고전 <샤이닝>은 작년 스티븐 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에 주요하게 인용되는 등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큰 영향력을 자랑하고 있다. 공포소설의 거장 스티븐 킹의 원작을 토대로 해 큐브릭의 지독한 집념 끝에 완성된 이미지 연출, 귀신 들린 집을 매혹적으로 구현한 프로덕션 디자인, 그리고 수많은 테이크 끝에 끄집어낸 잭 니콜슨과 셜리 듀발의 명연에 힘입어 원작소설의 오싹함을 완벽하게 구현했다. 조던 필은 <겟 아웃>에서 <샤이닝>의 오버룩 호텔을 레퍼런스를 삼아 낯선 공간에 초대돼 위험에 빠지는 인물을 그린 바 있다. 별장으로 향하는 주인공 가족을 불길하게 내려다보거나, 그들의 친구 집안의 아이들을 쌍둥이로 설정함으로써 다시 한번 <샤이닝>에 대한 흠모를 드러냈다.


환생

Dead Again, 1991

영국을 대표하는 배우/감독 케네스 브래너의 연출작은 크게 둘로 나뉜다. 셰익스피어를 원작으로 삼았거나 그렇지 않았거나. 두 번째 감독작 <환생>은 후자에 속한다. 기억상실증에 걸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는 여자와 그녀를 돕는 사립탐정은 점차 과거를 알아가면서 두 사람이 부부였고, 남편이 아내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죽었다는 걸 알게 된다.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 <환생>은 도플갱어를 연기해 1인2역을 소화하는 케네스 브래너와 그의 페르소나이자 아내였던 엠마 톰슨의 호흡, 흑백의 과거와 컬러의 현재를 교차해 진행하는 방식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도플갱어의 설정, 과거와 현재의 교차, 살해의 도구로 가위가 활용된다는 점이 대번에 <어스>를 떠올리게 한다.


퍼니 게임

Funny Games, 1997

제목 '퍼니 게임'은 완전한 반어다. 한 중산층 가정이 호숫가로 휴가를 즐기러 온 별장에 두 청년이 별안간 찾아와 일가족에게 고문을 가하는 영화는 재미는커녕 관객을 극한의 불쾌함으로 몰아넣는다. 오스트리아의 시네아스트 미카엘 하네케는 데뷔부터 줄곧 게으로그와 안나라는 부부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잔인한 폭력이 자행되는 과정을 TV와 비디오카메라 등 미디어를 경유해 한껏 부풀리면서 중산층의 불안을 보란 듯 전시했다. 하네케는 본래 <퍼니 게임>을 미국을 배경으로 찍고 싶었지만 사정상 포기하고 자국 오스트리아에서 제작했고, 그로부터 10년 후 나오미 왓츠, 팀 로스, 마이클 피트를 기용해 미국판 리메이크를 직접 연출했다. 비슷한 색과 모양의 옷을 입은 괴한이 돌연 집에 침입해 죽음의 위기에 처한다는 골격이 유사하다.


식스 센스

The Sixth Sense, 1999

<겟 아웃>으로 호러의 솜씨를 뽐내 단숨에 할리우드의 가장 뜨거운 감독으로 올라선 조던 필을 상찬하며 함께 언급되는 이름, M. 나이트 샤말란이다. 샤말란 역시 초기작 <식스 센스>(1999)를 통해 대중과 평단의 고른 갈채를 받으며 장르 마스터로 성장한 감독이기 때문이다. 영화 전반에 흩어진 사소한 요소 하나 허투루 쓰지 않고 관객을 공포에 몰아넣는 능력은 <어스>에서 보다 확실히 드러난다. 어릴 적 트라우마로 무언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혼자만 직감하게 되는 <어스>의 애들레이드와 <식스 센스>의 콜은 어쩐지 겹쳐 보인다. 애들레이드가 품고 있는 비밀은 무엇일까.


장화, 홍련

2003

리스트에 한국영화도 있다. 김지운 감독의 2003년 작 <장화, 홍련>이다. 코미디 <조용한 가족>(1998), <반칙왕>(2000)으로 이름을 알린 그는 아시아 호러 옴니버스 <쓰리>(2002)에 속한 단편 <메모리즈>에 이어 한국 공포영화의 대표작으로 추앙 받는 <장화, 홍련>을 발표해 다양한 장르를 능숙하게 다루는 솜씨를 자랑했다. 공포와 슬픔을 동시에 끌고 가는 <장화, 홍련>과 달리, <어스>는 공포와 코미디를 유려하게 뒤섞으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갈등 구도가 가족 내부에서, 다른 가족과의 관계에서 이뤄지는 점도 다르다. 하지만 어릴 적 상처를 품고 있는 듯한 여성 주인공이 영화 전반을 이끌어가는 공통분모만큼은 뚜렷하다.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

Martyrs, 2008

21세기 들어 극단적인 수위의 신체 훼손으로 무장한 일련의 프랑스 공포영화들이 호러의 새로운 경향으로 떠올랐다. 사회 단체들과의 소송 끝에 프랑스 호러 영화 최초로 18세 관람가(프랑스에선 포르노에만 부여되는 등급)를 받은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은 <엑스텐션>과 함께 '뉴 프렌치 익스트림'을 대표하는 영화다. 감독 말에 따르면 '고문'이 아닌 '고통'에 대한 이야기인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은 극한의 고통을 견뎌낸 뒤 얻는 순교를 보여주고자 했다. 동의할 수 있든 없든, 분명 형이상학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셈이다. 인종차별이라는 사회적인 테마로 똘똘 뭉친 <겟 아웃>과 달리, <어스>는 어떤 개념으로 쉽게 정리할 수 없는 인간과 삶의 징후를 보여주고자 하는 작품이다.


렛 미 인

Let the Right One In, 2008

<렛 미 인>은 공포보단 로맨스에 가깝다. 심약한 소년이 따돌림을 경험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쏟고, 군데군데 많은 피가 쏟아지긴 하지만, 12살의 소년과 오랜 세월을 12살의 모습으로 살아온 뱀파이어의 사랑 이야기가 두드러진다. 그리고 한겨울 스웨덴의 서늘한 공기가 확연히 남는다. <어스>와 <렛 미 인>은 캘리포니아 샌타크루즈 해변과 스웨덴 교외의 설원처럼 서로 딴판이다. <어스>가 바캉스 시즌의 뜨거움 아래 디스토피아의 서늘한 풍경을 보여준다면, <렛 미 인>은 가시지 않는 한기에도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스한 심장이 만져진다. 어쩌면 조던 필은 <렛 미 인>에서 서로 어긋난 기후와 정서의 온도차를 그리는 터치에 탄복했던 거 아닐까.


바바둑

The Babadook, 2014

공포영화의 영원한 고전 <엑소시스트>(1973)의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은 SNS에 "싸이코, 에일리언, 디아볼릭 그리고 지금 바바둑"이라고 남기며 영화 <바바둑>을 극찬한 바 있다. 출산하러 가던 길에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그때 태어난 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주인공은 행동장애를 보이는 아들이 남편의 창고에서 가져온 그림책 '바바둑'을 읽고 저주에 든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여성감독 제니퍼 켄트가 연출한 <바바둑>에서 무엇보다 돋보이는 건 엄마가 아들과의 갈등을 딛고 저주에 맞서는 의지다. 고전적인 방법으로 공포를 퍼트리면서도 무리 없이 싱글맘의 고충과 가족 간의 기묘한 사랑을 전하는 데 성공했다. 가족에서 시작해 가족으로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닌 <어스> 속 루피타 뇽의 얼굴에서도 복잡한 모성애가 엿보인다.


팔로우

It Follows, 2014

단명한 제목 그대로다. <팔로우>는 누군가 자신을 따라다닌다는 섬뜩한 느낌에 시달리는 주인공을 따라간다. 섹스로 저주가 전염된다는, 호러와 청춘 로맨스를 가로지르는 아이디어가 반짝이는 영화로 데이빗 로버트 미첼은 2014년 즈음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정체를 알 수 없되 그 실체는 두 눈 똑똑히 보이는 존재에 쫓기는 주인공의 처지를 <팔로우>와 <어스>의 두 여성 캐릭터 모두 공유한다. 한편, 두 작품의 스탭진을 훑어보면 겹치는 이름이 있다. 촬영감독 마이크 기오울라스키스다. <팔로우>를 통해 이름을 알린 그는 <23 아이덴티티>(2016)부터 M. 나이트 샤말란의 카메라를 잡은 데 이어 조던 필의 신작 <어스>의 촬영을 맡았다.


문동명 /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