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만들다 보면 정말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하곤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까운 건 촬영한 분량을 쓰지 못하는 경우다. 해외 매체 스크린랜트에서 가장 비싼 삭제 장면 11가지를 소개했다. 어떤 영화들이 어떤 사유로 피 같은 제작비를 날리게 됐을까.


11

구니스

문어의 공격

(약 55만 달러)

보물을 찾는 청소년들의 어드벤처를 그린 <구니스>. 캐릭터들의 개성과 어드벤처만의 호쾌함을 모두 잡아 어드벤처 영화의 대표작으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비디오 버전은 약간의 흠이 있다. 삭제 장면의 ‘흔적’이 남은 것이다. 결말 부분에서 리차드 다타 왕(키 호이 관)이 “문어가 제일 무서웠어요”라고 언급하는 문어의 공격 장면이다. 이 장면은 스텝(마샤 플림튼)이 거대한 식인 문어에게 공격받고, 친구들이 간신히 구해주는 과정을 그린다.

이 장면이 삭제된 건 여러 의견이 있는데, 문어가 너무 가짜 같아서 삭제했다는 설과 영화 개봉 전 홈비디오와 TV 방영 판권을 판매할 때, “성인 콘텐츠"를 줄여줄 것을 요청받아서 삭제했다는 설이 있다. 아무튼 이 장면의 제작비가 얼마나 들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수중 세트에서 적어도 이틀 이상 찍었다고 가정했을 때,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55만 달러는 소요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10

오즈의 마법사

지터버그 댄스

(약 101만 달러)

영화사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걸작으로 기억되는 <오즈의 마법사>. 이 명작도 삭제 장면이 있다. 도로시(주디 갈란드)와 친구들이 지터버그라는 벌레를 보는 장면이다. 뮤지컬 장면으로 5주간 리허설하고 노래 녹음까지 끝마쳤으나 최종 단계에서 상영 시간을 줄이기 위해 편집됐다. 훗날 해당 노래는 앨범의 수록곡으로 공개됐지만 영상은 작곡가인 해롤드 알렌이 공개한 비디오보다 좋은 원본이 없다고. 이 장면은 인플레이션을 적용했을 때 101만 달러가량이 들었을 것으로 예상됐다. 참고로 이 영화 외의 애니메이션, (<위키드> 같은) 관련 뮤지컬에는 이 장면이 재연됐다.


9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파이 싸움 엔딩

(약 210만 달러)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엔딩은 핵폭발 장면을 엮은 몽타주다. 베라 린의 감미로운 ‘위 윌 미트 어게인’(We will meet again, 우린 다시 만날 거예요)과 핵폭탄이 초래한 비현실적인 폭발의 조합이 미묘하게 섬뜩하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원래 엔딩은 전쟁 상황실 사람들이 서로에서 파이를 던지는 파이 싸움 장면이었다. 핵 전쟁을 운운하던 관료들이 파이로 싸우는 장면이라니,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블랙코미디에도 적합해 보인다. 실제로 이 장면은 촬영까지 끝냈다. 매일 2000여 개의 파이를 준비해 2주 동안 찍은 공들인 장면 중 하나였다.

파이 싸움 촬영 현장

그러나 촬영을 마치고 존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 당했을 때, 이 장면을 삭제할 수밖에 없었다. 암살을 전한 뉴스에서 “우리의 대통령은 인생의 전성기에서 파이를 맞고 쓰러졌습니다”(Our President has been struck down by a pie in the prime of his life.)라며 총알을 파이에 빗댔기 때문이다. 이 비유 때문에 파이가 다른 의미로 읽힐 가능성이 있었고, 결국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엔딩은 완전히 새롭게 바뀌었다. 이 파이 엔딩은 지금까지도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다(스탠리 큐브릭이 세상을 떠난 시기에만 영국 영화 협회 극장에서 상영된 바 있다). 총 3개월 중 2주간의 촬영, 장면에 사용된 파이의 양을 미루어보아 대략 210만 달러가 들었을 것이다.


8

갱스터 스쿼드

극장 총격 장면

(약 206만 달러)

<갱스터 스쿼드>도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처럼 시기가 안 좋았다. <갱스터 스쿼드>엔 TCL 차이니즈 시어터에 갱스터들이 난입해 관객들을 쏴 죽이는 장면이 있었다. 촬영을 마치고 후반 작업을 하던 중 사건이 터졌다. 2012년 6월 20일,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상영 중인 콜로라도의 한 극장에서 총기 사고가 난 것이다. 12명이 사망하고, 58명이 부상을 입은 이 사건은 미국 사회 전체를 흔들었다.

<갱스터 스쿼드> 제작진은 이런 사고 이후 해당 장면을 사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2011년 12월 15일 촬영을 마친 영화는 2012년 8월 21일부터 23일, 재촬영을 진행해 새로운 장면을 만들었다. 이 장면에 대해 워너 브러더스는 “수백만”이라고 언급했는데, 재촬영 준비 및 촬영 기간을 감안하면 206만 달러가 됐을 것으로 보인다. 삭제된 극장 총격 장면은 최초 공개 트레일러(아래 영상) 2분 4초 즈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극장 총격 장면 삭제 전에 공개된 1차 예고편(위 영상)


7

빽 투 더 퓨쳐

에릭 스톨츠 촬영 분량

(약 898만 달러)

주황색 조끼가 아닌 검은 재킷을 입은 마티 맥플라이를 상상할 수 있는가? 심지어 마이클 J. 폭스가 아니라면? <빽 투 더 퓨쳐>의 주인공은 원래 마이클 J. 폭스가 아니라 에릭 스톨츠였다. 그는 5주 동안 마티를 연기했지만 결국 하차해야만 했다. 왜? 소년의 시간 여행 소동극으로 그리기에 에릭 스톨츠의 연기는 코믹함이 적었다. 한마디로 캐릭터와 맞지 않았다.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과 밥 게일 각본가는 애초에 마이클 J. 폭스 캐스팅을 주장했으나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시드 쉰버그가 거부했다. 그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만들게 해주겠다 공언했는데, 에릭 스톨츠의 연기를 보고 자신의 말을 지켜야 했다.

에릭 스톨츠(왼쪽), 마이클 J. 폭스

마티 역이 마이클 J. 폭스로 교체되면서 영화는 전면 재촬영에 들어갔다. 정말 안타까운 건 마티의 여자친구 제니퍼 파커 역의 멜로라 하딘도 마이클 J. 폭스보다 키가 커서 하차해야 했다. 제니퍼 파커 역으로 발탁된 클로디아 웰즈에겐 행운이었지만, 멜로라 하딘은 하차 소식을 듣고 펑펑 울었다고. 에릭 스톨츠를 주인공으로 진행한 5주간 촬영은 당시 400만 달러를 사용한 것으로 밝혔다. 인플레이션을 적용하면 약 898만 달러다.


6

흡혈 식물 대소동

또다른 엔딩

(약 1081만 달러)

<흡혈 식물 대소동>(원제 ‘리틀 샵 오브 호러즈’)은 사전 시사회에서 관객들의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건 딱 하나, 엔딩 교체였다. <흡혈 식물 대소동>의 원래 엔딩은 흡혈 식물이 주인공을 삼키고 세계 전체를 점령하는 종말을 그렸다. 프랭크 오즈 감독이야 당연히 이 결말을 고집하고 싶었겠지만, 관객이 별로라는데 별 수 있겠는가. 이 엔딩은 식인 식물을 퇴치하고 주인공 커플이 행복하게 사는 내용으로 교체되었다.

원래 엔딩의 스케일이 컸기 때문에 날려버린 돈이 상당하다. 삭제된 엔딩은 무려 12분 분량으로 70여 개의 인형, 시각효과 작업 1년, 촬영 5주간의 결과물이었다. 전체 제작비 중 5분의 1을 사용했다고. 그래서 추산된 금액은 약 1081만 달러. 다행히 이 엔딩은 블루레이 매체를 통해 공개됐다. 위 영상이 원래 엔딩, 아래 영상이 수정된 엔딩이니 한 번 비교해보시라.


5

수퍼맨 리턴즈

또 다른 인트로

(약 1201만 달러)

<슈퍼맨>과 <슈퍼맨 2>에서 이어진 <슈퍼맨 리턴즈>는 간략한 텍스트와 전작들을 고스란히 오마주한 오프닝 크레딧으로 시작한다. 실은 좀 더 방대한 인트로 장면이 있었다. 이 인트로는 슈퍼맨(브랜든 루스)가 왜 2년간 지구를 떠났는지, 그가 고향인 크립톤 행성에서 무엇을 봤는지를 담고 있다. 하지만 최종 상영본에서는 삭제됐다. 6분 정도 되는 이 장면은 시각적으로 우수하지만, 대사도 한 줄 없이 무척 정적인 분위기를 유지하기 때문에 블록버스터를 기대한 관객들에게 그렇게 좋은 인트로가 아니었다. 1201만 달러가 소요된 이 장면은 2011년 <슈퍼맨 앤솔로지> 블루레이에서야 공개됐다.


4

돈 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영화 전체

(약 2199만 달러)

2018년 완성된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테리 길리엄의 ‘돈키호테 프로젝트’는 정말 오래 걸렸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돼 2018년 칸 영화제에서 공개했지만, 이 버전 전에도 촬영까지 진행했다가 엎어진 경력이 있다. 1998년 진행된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장 로슈포르와 조니 뎁이 출연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홍수에 장비가 파손되고, 장 로슈포르가 허리 디스크로 촬영이 불가능해져 제작 중단에 이르렀다. 이 과정은 <로스트 인 라만차>라는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졌다.

엎어진 영화의 제작기를 담은 <로스트 인 라 만차>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작자들은 영화가 완성되지 못한 것에 소송까지 걸었고, 테리 길리엄은 조나단 프라이스와 아담 드라이버를 캐스팅하고 다시 제작에 착수했다. 그렇게 나온 결과물이 지금의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결과적으로 이전 촬영으로 날린 돈은 2199만 달러에 육박한다고 알려졌다.


3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로그 장면들

(약 2258만 달러)

슈퍼히어로 영화, 혹은 <엑스맨> 시리즈 팬이라면 알겠지만,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은 극장판 말고 로그컷이 따로 발매됐다. ‘로그컷’은 이름처럼 로그(안나 파퀸)의 비중을 확 늘린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패스트>의 새로운 편집본이다. 안나 파퀸의 로그는 이전 <엑스맨> 삼부작에서 주요 인물이었는데, 이 영화 극장판에서는 카메오라고 할 만큼 잠깐 등장했다. 로그컷은 상영시간이 132분에서 149분으로 대폭 늘었고, 단순한 장면 추가를 넘어 로그가 이야기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방향으로 편집됐다. 대중들에게 공개됐으니 다른 영화만큼 손해는 아니겠지만, 어쨌든 이 장면들에 들어간 비용은 2258만 달러가 정도라고 한다.


2

월드워Z

3막 전체

(약 2500만 달러)

<월드워Z>는 원래 2010년에 개봉할 영화였다. 그런데 2013년에야 개봉했다. 왜? 시나리오를 갈아엎고, 재촬영을 강행했기 때문이다. <월드워Z>가 재촬영한 부분은 중후반이다. 좀 더 학술적으로 말하자면 시나리오의 3막 구조에서 3막 부분. 원래 엔딩은 제리(브래드 피트)가 반 좀비 군대에 징집되고, 그의 아내 카린(미레유 에노스)가 자식들의 식량을 벌기 위해 성매매(!)를 하는, 어마어마하게 절망적인 내용이었다.

제작진은 새로운 작가를 투입해 블록버스터에 어울리는 결말과, 그 결말로 가는 과정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전에 찍어둔 것을 전부 들어내고 지금 상영본에 담긴 장면들을 촬영했다. 이들의 선택은 신의 한수가 돼 <월드워Z>가 5억 4000만 달러를 버는 흥행작으로 등극했다. 보도에 따르면 재촬영이 든 비용은 2500만 달러. 제작비가 상승할 때야 다들 마음이 고단했겠지만, 그만큼 성적을 거뒀으니 한숨 돌렸을 것이다.


1

클레오파트라

영화 전체 1/3

(약 1억 2059만 달러)

<클레오파트라> 촬영 현장

1960년대 대서사극의 붐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여성 주인공을, 그것도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내세워 주목받았다. 조셉 L. 맨키위즈 감독은 이 영화를 1, 2부로 나눠 6시간짜리 대작으로 만들려 했다. 하지만 흥행이 우선인 제작사가 그런 야망을 가만 둘리가 있나. 결국 6시간짜리 <클레오파트라>는 4시간 2분으로, 최종적으로 3시간 12분짜리 극장판으로 재탄생했다. 그러니까 촬영 분량 절반가량이 관객들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거기다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촬영 기간 중 수술을 받아 촬영이 연기되는 일도 발생해 제작비는 천정부지로 높아졌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촬영 기간에 기관지 절개 수술을 받았다. 목의 상처가 그 흔적.

다행히 2차 매체 시장이 대두하면서 4시간 2분 버전이 비디오로 출시됐다. 하지만 조셉 L. 맨키위즈 감독이 세상을 떠난 지금, 그가 생각한 6시간짜리 ‘클레오파트라 감독판’은 영영 못 볼 가능성이 높다. 인플레이션을 적용하면 미사용 촬영 분량에 사용된 금액은 무려 1억 2059만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