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광 역의 이정은은 <기생충>의 절대적 신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1991년 연극배우로 커리어를 시작해, 지난 몇 년간 부지런히 영화/드라마에 출연해 잊기 어려운 인상을 남긴 배우다. 그동안 이정은이 보여준 영화 속 활약상을 정리했다.

칸 영화제 포토콜 중 이정은


<마더>

(2009)

연극계에서 연기를 시작했지만 원래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서 꾸준히 중/단편영화를 찍고 단역으로도 많이 참여했다. 나문희 주연의 <열혈남아>(2006)를 보고 "더 이상 영화판에 기웃거리지 말자"고 결심했는데, 결국 봉준호의 <마더>에 출연했다. 봉준호 감독과 함께 한 첫 작품이다. 아들 도준(원빈)이 여고생을 죽였다는 누명을 썼다고 철썩같이 믿는 '마더'(김혜자)는 죽은 아이 화장터에 찾아온다. 어처구니 없는 방문에 아이의 친척들은 황당해 하다가 "내 아들은 아니야!"라는 소리까지 내뱉자 확 멱살을 잡는다. 그 안경 쓴 친척이 바로 이정은이었다. "드디어 김혜자 선생님을 만났"지만 하필 드잡이를 하며 욕설을 내뱉어야 했다.


<변호인>

(2013)

<마더> 이후에도 연극과 뮤지컬 활동을 이어가던 이정은은 4년 만에 영화 <변호인>을 찍었다. 부동산 등기 변호사로 돈을 번 송우석(송강호)은 생계가 어려웠던 시절 공사장 인부로 일하며 각오를 새긴 그 집을 찾아온다. 한쪽 눈만 화장한 채 문을 연 집주인은 그를 집에 들이고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집을 내놓지도 않았는데 아랫집이 내놓은 집값에 1/4을 더 얹어준다는 말을 듣자 그제사 화색이 돌며 '주씨'라도 드실랍니까? 한다.


<카트>

(2014)

천만 관객을 돌파한 <변호인> 속 짝눈화장 집주인으로 톡톡히 얼굴을 알려 2014년부터는 드라마와 영화 작업을 활발히 병행하기 시작했다. 영화에서는 여전히 단역만 맡았는데, 부당해고에 파업 투쟁 한 마트 노동자들의 실화를 영화화 한 <카트>에서는 짧고 작게 꽤 많은 신에서 얼굴을 비춘다. 염정아, 문정희, 김영애, 천우희 등은 물론 조/단역 여성 배우들의 장이라 부를 만한 영화 속에서 '계산원 1'역의 이정은 역시 그들의 사실적인 호흡에 한몫 한다. 혜미(문정희)를 비롯해 여러 직원들이 부침 끝에 투쟁 대열에서 나와 다시 일터로 돌아가는데, 계산원 1 역시 그들 중 하나다. 이정은의 무표정에서 생존의 의지와 동료를 등졌다는 죄책감이 동시에 묻어난다.


<조선명탐정: 사라진 놉의 딸>

(2015)

김석윤 감독은 드라마 <시트콩 로얄빌라>(2013)에 조연으로 참여한 이정은을 영화 <조선명탐정: 사라진 놉의 딸>에도 캐스팅 했다. 노비 소녀들이 잡혀가는 왜구 기지의 관리직 역이다. "야 이 종간나 에미나이들아!" 윽박을 질러 애들을 세우고는 특유의 기묘한 억양으로 "너 달거리 했니?" 묻고 거짓말 하는 아이에게 손찌검을 한다. 외계어 같은 일본말로 아이들을 처리하라고 지시한다. 유쾌한 기운이라고는 일절 없는 악한을 연기하는 이정은을 볼 수 있다. 김석윤 PD와 이정은의 연은 드라마 <송곳>(2015), <눈이 부시게>(2019)로 이어진다.


<검사외전>

(2016)

<검사외전>의 가장 유명한 장면. 우종길(이성민)의 선거 홍보단으로 잠입한 한치원(강동원)이 '붐바스틱'에 맞춰 한바탕 몸을 흔드는 신이다. 이정은은 옆에서 그 못지 않게 화끈한 춤사위를 선보이는 운동원으로 등장한다. 그녀의 활약은 댄스에서 그치지 않는다. 넉살 좋게 치원에게 호구조사를 하다가 그가 서울대생이라는 걸 슬쩍 흘리자 "엄마가 얼마나 좋아하시겠노~ 아고 나도 이런 아들 있었으믄 좋겠다!" 난리법석을 떤다. 치원은 그 덕에 미션을 처리한다.


<곡성>

(2016)

덕기(전배수)는 종구(곽도원)와 성복(손강국)에게 저 산 위 외지인(쿠니무라 준)의 집을 가르쳐주다가 동물 시체들을 발견하고 황급히 자리를 피하려다 벼락에 맞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병원 신, 이정은은 덕기의 부인으로 나온다. 마른 하늘에 별안간 비가 쏟아져 벼락을 맞는 웃지 못할 상황은 "어떻게 벼락을 다 처맞느냐고~ 맞을라고 쫓아댕겨도 못 맞는 것을~~ 그려도 비암이다 뭐다 자라다 하도 처먹어갖고 뒤지지는 않은 거지라우" 하는 말을 듣고 나면 결국 뻘한 웃음을 터트리게 한다. 봐도봐도 이상한 유머다.


<재심>

(2017)

돈도 빽도 없는 변호사 준영(정우)는 거대 로펌에게 잘 보이기 위해 무료 변론 봉사를 한다. 로펌 직원 오미리(이정은)는 준영과 시간을 죽이다가 퇴근하던 중 택시기사 살인사건의 누명을 쓰고 10년간 복역한 현우(강하늘)의 사연을 전한다. 현우의 날선 태도로 그냥 발을 돌리려던 준영은 미리의 은근한 협박에 못 이겨 그의 자세한 사정을 듣는다. 워낙 다채로운 사투리를 구사해왔던 데다가 시골이 배경이라 자칫 놓치기 쉬운데, 이정은은 <재심>에서 서울말씨를 쓴다. 2018년 개봉한 독립영화 <어른도감>에서도 법조인을 연기하면서 표준어를 구사했다.


<옥자>

(2017)

이정은은 <옥자>에서 영화의 마스코트 옥자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봉준호는 "뮤지컬 연기를 한다는 건 목소리에 탁월한 컨트롤이 가능하다는 것"이라며 <빨래> 등 뮤지컬 배우로도 널리 알려진 이정은의 목소리를 빌린 이유를 밝혔다. 단순히 꿀꿀 대는 흔한 돼지 소리가 아니라 대목마다 감정을 달리 실어가며 소리를 내야 하는 어려운 작업인지라, 이정은은 하루 종일 돼지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옥자 목소리 연마에 힘썼다. "목소리만 나오면 섭섭하니까" 사람 캐릭터도 하나 맡겼다. 옥자와 미자(안서현)가 회현지하상가 안에서 도망치다가 마주하는 휠체어를 탄 여자다. 돌진해오는 옥자를 보고 동물적인 비명을 지른다. 자기가 자기를 보고 놀란 셈.


<군함도>

(2017)

<군함도>는 연회장 신에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누가 봐도 '징용'을 기념하는 자리, 즐겁지 않은 분위기를 어떻게라도 살려보려는 듯 부인회 회장은 방정맞은 웃음을 흘려가면서 여기저기 바삐 뛰어다닌다. "보국신민도 몰라요~? 나라를 위해서는 백성의 도리를 다한다~" 라며 사람 좋은 얼굴로 합리화 하지만 당신 자식은 어떻냐고 쏴붙이자 평정심을 잃고 "우리 자식은 결핵이 있어!" 대꾸한다. 류승완 감독은 불규칙적인 억양이 드러나는 이정은의 웃음을 좋아했는지 대사 사이사이 웃어달라는 디렉션을 받았다고.


<택시운전사>

(2017)

"아따메~ 뭣헌다고 이렇게 늦었다요~" <변호인> 이후 오랜만에 송강호와 한 신에서 연기하는 <택시운전사>에서는 태술(유해진)의 아내 역을 맡았다. 이정은이 이전에 맡은 캐릭터들 같았다면 보다 쾌활하게 광주사투리를 쏟아내면서 서울에서 온 택시기사와 독일에서 온 기자를 반겼을 테지만, 태술의 처는 가만히 푸근한 미소를 띄우면서 그들을 환대한다. 놀랍게도 서울 토박이인 이정은은 사투리 연마를 위해 친구 집에 가서 취재를 시도했는데, 김치만 열 종류는 모인 밥상을 보고서 녹음기를 껐다고 한다. 사투리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보다 "광주 사람의 느낌"을 내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


<미쓰백>

(2018)

멍때리는 상아(한지민)에게 마사지샵 사장은 "쓰백아 얘 쓰백아" 돈봉투를 흔들고는 그걸 건넨다. 너처럼 일 잘하는 사람이 또 어딨냐며 퇴직금도 넣었다고 인심을 부린다. 진주가 알알이 박힌 옷을 입고 '풀메'를 한 이정은의 모습이 꽤 낯설어 보인다. 사투리도 안 써서 더더욱.


<말모이>

(2019)

<말모이>에는 특별출연으로 참여했다. <택시운전사>의 시나리오를 쓴 엄유나 감독과의 인연일 터. 이번엔 무려 제주도 방언을 구사한다. "아이고 잘 있었수가~" 제주도 교사는 정한(윤계상)을 찾아와 공책들을 건넨다. "내가 학교 그만두고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죠. 입에 풀칠은 해야겠고 해서 조그마한 국밥집을 하나 시작했는데 바빠서 많이 못했네요~" 랩처럼 쏟아지는 제주도말을 자막이 번역한다.


<미성년>

(2019)

단정한 드라마 속에 커다란 감정의 파고를 품고 있는 <미성년>이 코미디로 돌변하는 순간이 있다. 바람 피는 걸 들킨 대원(김윤석)이 가족을 피해 도망친 태안의 방파제에서 동네 아줌마를 만날 때다. 자주색 스웨터에 허연 게 잔뜩 묻은 걸로 보아 막걸리 깨나 자신 아줌마는 이것저것 묻더니 대뜸 주차비를 달라고 손을 내민다.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사람이 말이 통할 리가. 풍경이 어쨌네 제사를 지내네 자기 말만 늘어놓고 결국 만원을 받아낸다.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 아무말을 지껄이는 말투, 드문드문 끅끅 대는 트림까지 취객의 디테일이 상당하다.


<기생충>

(2019)

봉준호, 송강호와 함께 한 세 번째 작품. 문광은 기택(송강호)과 박사장(이선균) 가족 외에 <기생충>의 주축으로 알려진 캐릭터다.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 이 가정부는 언제나 풀세팅을 한 채 집안일을 돌본다. 착실히 자기 할일을 하는 거 같은데, 은근히 두 가족과의 일에 끼어들려고 한다. 문광이 퍼트리는 긴장은 <기생충>의 기상천외한 진행을 가능케 한다.


문동명 /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