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배우들이 멍청한 대화를 실컷 나누는 기괴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짐 자무쉬가 좀비영화 <데드 돈 다이>를 만들게 된 이유다. 그의 의도처럼 <데드 돈 다이>는 빌 머레이, 틸다 스윈튼 등 그가 여러 영화에 캐스팅 한 바 있는 배우들이 황당한 상황에 얽혀 허우적대는 좀비영화로 완성됐다. <데드 돈 다이>에 출연한 짐 자무쉬의 단골 배우들의 캐릭터와 활약상을 정리했다.
빌 머레이
클리프 로버슨
<섬망>(<커피와 담배>) 2003
<브로큰 플라워> 2005
<리미츠 오브 컨트롤> 2009
좀비가 나타난 마을의 경찰서 서장을 빌 머레이가 연기한다면 어떨까? 아니나 다를까, 건조하고 무기력하다. 클리프 서장은 그저 난처한 얼굴을 한 채 하루아침에 낮이 길어지고 온갖 통신기기가 먹통이 되는 상황을 목격할 뿐이다.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이웃들이 좀비가 되는 걸 보면서 그의 태도에도 점점 변화가 일어난다. 워낙 많은 감독들이 총애를 받는 배우라 짐 자무쉬와 빌 머레이의 협업 역시 아주 오래된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의 만남은 2000년대 들어 시작됐다. 옴니버스 <커피와 담배> 속 단편 <섬망>에서 실제 배우 빌 머레이지만 웬일인지 카페의 점원 역할을 하며, 우탱 클랜의 멤버들 앞에서 커피를 포트째 마시고 점화기로 담뱃불을 붙이는 기행을 보여줬다. 2005년작 <브로큰 플라워>는 온전히 빌 머레이를 위한 영화다.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옛 애인이 보낸 편지로부터 자신에게 아들이 있었음을 알게 되는 왕년의 바람둥이 돈 존스턴(빌 머레이)의 로드 무비였다. <리미츠 오브 컨트롤>에선 무려 악역을 맡았다. 주인공 ‘외로운 남자’(이작 드 방콜레)가 예술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들을 차례대로 만난 후 맞닥뜨리게 되는 ‘미국인’은 “음악, 영화, 과학 등에 물든 너희들은 진짜 세상과는 무관할 뿐이야”라 말하며 비열한 표정을 짓는다.
애덤 드라이버
로니 피터슨
<패터슨> 2016
애덤 드라이버는 짐 자무쉬 사단에 가장 늦게 합류한 배우다. <데드 돈 다이> 바로 전에 발표한 <패터슨>에서 매일 같이 들르는 공간에서 틈틈이 시를 쓰는 버스 운전사 패터슨을 연기했다. 드라이버는 큼직큼직한 외모와 달리 표현은 극히 드문 패터슨에게서 언뜻언뜻 묻어나는 감정을 확연히 드러내면서 반복되는 일상에 미묘한 변화를 심었다. <데드 돈 다이>의 로니 피터슨은 전혀 다르다.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마을’ 센터빌을 둘러싼 이상 징후를 느끼면서 계속 “분명 끝이 좋지 않을 거예요”라고 중얼대면서 주변 사람들의 불안을 가중시키는 로니는한때 마을 사람들이었던 좀비들의 목을 가차없이 잘라버린다. 방어 기제라고 보기엔 은근히 좀비를 죽이는 걸 즐기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자무쉬는 그의 성을 ‘패터슨’을 변주해 ‘피터슨’으로 붙였을 뿐만 아니라, 애덤 드라이버의 대표작인 <스타워즈> 시리즈를 가지고도 농을 던진다.
틸다 스윈튼
젤다 윈스턴
<브로큰 플라워> 2005
<리미츠 오브 컨트롤> 2009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2013
짐 자무쉬가 처음부터 틸다 스윈튼의 창백한 이미지를 강조했던 건 아니다. 그들의 첫 협업 <브로큰 플라워> 속 페니는 금발이 아닌 틸다 스윈튼을 만날 수 있는 드문 캐릭터다. 딱 한 신에 등장해, 오랜만에 찾아온 옛 애인 돈에게 불같이 화내며 문전박대 한다. <리미츠 오브 컨트롤>에서도 짤막하게 등장한다. ‘외로운 남자’가 스페인의 카페들에서 마주하는 이들 가운데 하나인 ‘금발’은 영화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세상이 어땠는지 알 수 있어서 옛날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알프레드 히치콕의 <서스피션>과 오손 웰스의 <상하이에서 온 여인>(주연 배우 리타 헤이워드가 유일하게 금발로 나오는 영화다)을 언급한다.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에선 아예 뱀파이어로 캐스팅 해, 21세기 현대까지 살아남아 예술을 즐기며 순수한 사랑에 젖어 있는 커플을 보여줬다. <데드 돈 다이> 속 젤다 윈스턴(분명 ‘스윈튼’을 비튼 것이리라)은 마을을 삼켜버린 좀비보다 더 기괴한 존재다. 스코틀랜드에서 온 장의사 젤다는 불교를 믿고, 검술에 능하며, 시체를 화장시키는 취미를 갖고 있다. 도대체 무슨 캐릭터인지 종잡을 수 없다고? 그 정체모를 인상은 영화 마지막까지 계속된다.
클로에 셰비니
민디 모리슨
<실내-트레일러-밤>(<텐 미니츠: 트럼펫>) 2002
<브로큰 플라워> 2005
영화계의 오랜 패션 아이콘 클로에 셰비니는 아키 카우리스마키, 빅토르 에리세, 베르너 헤어조크, 빔 벤더스 등이 참여한 옴니버스 <텐 미니츠: 트럼펫>의 일환으로 제작된 <실내-트레일러-밤>으로 자무쉬 영화에 출연하게 됐다. 10분 남짓한 단편, 촬영 중 10분의 휴식시간에도 마음놓고 쉴 수 없는 배우의 어떤 순간을 셰비니 특유의 나른한 에너지로 장악했다. <브로큰 플라워>에서는 돈이 찾아오는 동물 의사소통사 카멘(제시카 랭)의 비서로 나왔다. 돈은 짧은 치마를 입고 업무를 보는 비서를 훔쳐보고, 그녀는 경계한다. <데드 돈 다이>는 셰비니와 자무쉬가 13년 만에 만난 작품이다. 클리프 서장, 로니와 함께 센터빌 경찰서 3인방을 이루는 민디는 주민들을 누구보다 겁에 질려 있다. 등장하는 거의 모든 순간이 ‘멘붕’이다. 게슴츠레한 눈빛과 도발적인 태도가 먼저 떠오르는 기존의 셰비니와는 사뭇 다른 이미지다. 겁부터 집어먹은 민디는 과연 좀비로부터 마을을 구해낼 수 있을까.
스티브 부세미
프랭크 밀러
<미스테리 트레인> 1989
<쌍둥이>(<커피와 담배>) 1989
<데드 맨> 1995
“미국을 다시 하얗게 만들자”(Make America White Again). <데드 돈 다이> 속 스티브 부세미가 연기하는 프랭크가 쓰는 모자의 문구다. 그는 지독한 인종 차별주의자다. 자기 농장에 닭이 없어졌다며 마을의 은둔자 밥(탐 웨이츠)을 몰아세우는 프랭크는 어딜 가나 특유의 신경질적인 말투로 불만을 드러낸다. 자무쉬와 부세미의 첫 작업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개의 짧은 이야기를 모은 자무쉬의 네 번째 영화 <미스테리 트레인>의 마지막 파트 <로스트 인 스페이스>에선 펑크 밴드 클래시의 보컬리스트 조 스트러머, 코미디언 릭 아빌레스와 함께 호흡을 맞췄다. 엘비스라고 불리는 자니(조 스트러머)가 총을 휘두루면서 벌어지는 사고 때문에 진땀을 빼는 이발사 찰리를 연기했다. 한편 <미스테리 트레인>에서 벨보이로 출연한 클리크 리가 캐스팅 된 걸로 보아 <미스테리 트레인>과 비슷한 시기에 촬영한 것 같은 <쌍둥이> 속 부세미는, 카페를 찾은 흑인 쌍둥이에게 엘비스 프레슬리를 빌어 얼토당토 않는 자신의 쌍둥이 이론을 신나게 늘어놓는다. <데드 맨>에선 윌리엄(조니 뎁)이 들른 가게의 바텐더로 아주 짧게 등장한다. 단독 숏이 없는 건 물론, 배우 크레딧에도 오르지 않고, 수염까지 덥수룩히 기르고 있어 두 눈을 똑바로 떠야 발견할 수 있다.
사라 드라이버
커피 좀비 여(女)
<영원한 휴가> 1980
<미스터리 트레인> 1989
<데드 돈 다이>에 을씨년스러운 징후를 뚫고 처음 출몰하는 좀비는 ‘커피 좀비’ 커플이다. 왜 하필 커피냐고? <데드 돈 다이> 속 좀비들은 각자 하나의 단어만을 중얼거리는데, 그들은 “커피… 커피…” 하면서 커피 맛이 기가 막힌 센터빌의 유일한 식당을 찾아와 그곳의 사람들을 잡아먹는다. 그 중 여자 좀비가 바로 짐 자무쉬의 아내, 사라 드라이버다. 1980년 자무쉬와 결혼한 드라이버는 그의 데뷔작 <영원한 휴가>부터 거의 모든 작품의 프로듀서 등 여러 역할을 맡으면서 자신의 연출 작업도 병행했다. <데드 돈 다이> 이전에 자무쉬 영화에 배우로 출연한 건 <영원한 휴가>와 <미스테리 트레인>이다. <영원한 휴가>에선 주인공의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의 간호사, <미스테리 트레인>의 두 번째 이야기 <유령>에선 죽은 남편의 관을 에스코트 하다가 발이 묶인 루이자(니콜레타 브라스키)가 대면하는 공항 직원, 모두 엑스트라에 가까운 분량이었다.
이기 팝
커피 좀비 남(男)
<캘리포니아 어딘가에서>(<커피와 담배>) 1993
<데드 맨> 1995
<김미 데인저> 2016
그럼 남자 커피 좀비는 누구일까? 1960년대 후반 펑크 밴드 스투지스로 데뷔해 현재까지 꾸준히 현역으로 활동해온 뮤지션 이기 팝이다. 뮤지션으로서 앨범도 발표하고 근작들의 음악도 직접 만드는 등 음악에 조예가 깊은 짐 자무쉬는 1993년 작업한 단편 <캘리포니아 어딘가에서>에 이기 팝과 톰 웨이츠 두 뮤지션을 실제 그들의 역으로 캐스팅 해, 커피(!!)와 담배를 즐기며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상황을 그려냈다. 톱스타 조니 뎁을 기용해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가장 시적이고 난해한 이야기를 풀어낸 <데드 맨>에선 주인공 윌리엄 블레이크가 숲속에서 만나는 캠핑 무리 중 하나로 출연해 그 근사한 목소리로 성경을 읽었다. <데드 맨>의 사운드트랙을 만든 닐 영을 위한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던 짐 자무쉬는 <패터슨>을 발표한 해, 이기 팝의 밴드 스투지스의 흥망성쇠를 그린 <김미 데인저>도 내놓아 위대한 아티스트를 향한 무한한 애정을 드러낸 바 있다.
르자(RZA)
딘
<고스트 독> 1999
<섬망>(<커피와 담배>) 2003
짐 자무쉬는 사무라이 영화 <고스트 독>의 음악을 우탱 클랜의 프로듀서 르자(RZA)에게 의뢰했다. 20년간 영화를 만들어오면서 힙합 비트를 전면에 내세운 건 처음이었다. 한편, 르자에겐 <고스트 독>이 음악감독으로서 첫 영화였다. 이전까지 르자가 선보인 비트보다는 한결 가벼운 톤이 주를 이루는 <고스트 독>의 음악은 주인공 고스트 독(포레스트 휘태커)의 황량한 마음과 굳은 의지를 아울렀다. 카무플라주 룩의 사무라이로 출연한 르자는 최후의 대결을 위해 걸어가는 고스트 독에게 “힘과 평등을!”하고 격려한다. <커피와 담배>에 속한 단편 <섬망>에서는 우탱 클랜의 지자와 함께 커피가 섬망을 유발시킨다면서 허브티를 마시고, 빌 머레이에게 니코틴과 카페인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설명한다. 차를 마실 때도 “우탱 포에버!” 구호를 외치는 그는 <고스트 독> 로고가 박힌 비니를 쓰고 있다. 오랜만에 자무쉬 영화에 출연한 르자는 (UPS를 패러디 한 게 분명한) ‘Wu-PS’ 배달원 딘 역을 맡아, 좀비영화를 섭렵한 잡화점 주인 바비(케일럽 랜드리 존스)가 오늘의 명언을 묻자 “세상은 완벽하다. 그러니 사소한 것에 감사하라”는 대답을 남긴다.
톰 웨이츠
밥
<다운 바이 로> 1986
<캘리포니아 어딘가에서>(<커피와 담배>) 1993
톰 웨이츠 역시 짐 자무쉬의 필모그래피에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뮤지션이다. 1980년대 들어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영화에 연달아 출연한 웨이츠는 자무쉬의 세 번째 영화 <다운 바이 로>에 캐스팅 돼 존 루리, 로베르토 베니니와 함께 주인공 3인방으로 활약했다. 라디오 DJ 목소리로만 참여한 <미스테리 트레인>, 사운드트랙을 만든 <지상의 밤>에 이어 이기 팝과 함께 단편 <캘리포니아 어딘가에서>에 출연했다. 마주하며 어색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잠시, 이기 팝이 “주크박스에 당신의 노래가 없네요”라고 하자 빈정 상해서 말하는 것마다 예민하게 받아치는 소심한 모습을 보여줬다. <데드 돈 다이>는 무려 25년 만에 짐 자무쉬 영화에 출연하는 작품이다. 밥은 캐릭터 자체로만 보면 어쩐지 뮤지션 탐 웨이츠를 대표하는 기인 이미지와 가장 잘 어울려 보인다. 센터빌에 살긴 하지만 수십 년간 숲속에서 은둔해 살아가는 밥은, 난리통이 된 마을을 멀찌감치서 지켜보며 줄곧 관조하는 태도를 취한다. 감독이 유독 애정을 표하는 배우에게 크레딧 끄트머리에 “and OOOOOO”로 표기하는 게 관행인데, <데드 돈 다이>의 배우 크레딧의 마지막은 “AND TOM WAITS”로 맺는다.
문동명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