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트로 열풍이 스크린에도 불어닥쳤다. 90년대를 배경으로 한 국내 영화 <벌새>와 <유열의 음악앨범>을 비롯해 1990년대 LA의 풍경이 담긴 조나 힐 감독 연출작 <미드 90>도 개봉을 앞두고 있는 상태. 이들과 함께 보면 좋을 90년대 감성 영화들을 되짚어보다, 그중에서도 유독 1994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많다는 점을 발견했다. 1994년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5년 만에 다시 트렌드의 중심에 선 1994년, 찬란했던 그 시기를 기억할 수 있는 영화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벌새

[1994 point] 노래방

<벌새>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쉴 새 없이 날갯짓을 펼치는 소녀 은희(박지후)의 1994년을 담았다. 미국에서 월드컵이 열렸고, 김일성이 사망했으며 성수대교가 무너졌던 1994년. 굵직한 일이 유독 많이 일어났던 그 해, <벌새>는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 미세한 균열이 일어난 은희의 일상을 조명한다. 당시 최고 유행 아이템이었던 베네통 노란 가방을 메고, 방과 후 ‘방방’을 즐기던 은희의 일상은 관객을 단번에 1994년 한가운데로 소환한다. 은희는 남자친구를 위해 카세트테이프에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을 녹음하고, 친구들과 지하의 댄스 클럽에서 마음껏 몸을 흔든다. 1994년의 풍경 중 가장 인상 깊은 건 노래방 신이다. 선생님의 강압에 못 이겨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 구호를 외치던 시절, 은희는 자신을 좋아한다는 후배 유리(설혜인)와 함께 노래방에 나란히 앉아 원준희의 '사랑은 유리 같은 것'을 부른다. “사랑이란 유리 같은 것, 아름답게 빛나지만 깨어지기 쉽다는걸” 인생의 예고편 같은 가사, 그를 부르는 은희의 불안한 음색 위로 우리 모두의 보편적 경험이 겹쳐짐은 물론이다.


유열의 음악앨범

[1994 point] 라디오

1994년 가수 유열이 라디오 DJ를 처음 진행하던 날 만난 미수(김고은)와 현우(정해인). 좋은 감정을 지니고 있었지만 뜻하지 않게 헤어진 두 사람은 이후 긴 시간 동안 우연과 필연을 반복하며, 몇 번의 만남과 헤어짐을 겪는다. PC 통신, 삐삐, 폴더폰까지. 미수와 현우가 각자의 위치에서 현실에 맞서는 동안 발전하는 추억의 아이템을 보는 재미가 쏠쏠한데, 그들의 첫 만남을 함께한 라디오 프로그램 '유열의 음악앨범'은 러닝타임 내내 변함없이 제 자리를 지킨다. <유열의 음악앨범>이 지닌 여운이 다른 로맨스 영화보다 유독 짙은 건, 인물들의 애틋한 사연 위로 시대를 관통하는 음악이 흐르기 때문. 핑클의 '영원한 사랑', 루시드 폴의 '오, 사랑', 국내 영화 최초로 OST에 삽입된 콜드플레이의 'Fix You'까지, 미수와 현우의 상황에 꼭 들어맞는 음악들은 라디오 사연의 맞춤형 신청곡 같다. 결말의 미수와 현우를 만든 크고 작은 사연들을 함께 보고 듣다 보면, 잘 짜인 구성의 '보이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본 듯한 느낌이 들 것.


청춘 스케치

[1994 point] 비디오카메라

청춘 영화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벤 스틸러의 연출 데뷔작, <청춘 스케치> 역시 1994년이 배경이다. 다큐멘터리 연출을 꿈꾸는 레이나(위노나 라이더)는 TV 방송국에 입사해 실력을 인정받지만, 고지식한 프로그램 진행자와의 갈등 끝에 해고를 당한다. 자신만의 뚜렷한 철학을 지녔지만 사회가 원하는 인재상과 거리가 먼 삶을 사는 트로이(에단 호크) 역시 불안정한 삶을 살긴 마찬가지다. 레이나는 우연히 알게 된 방송국 부사장 마이클(벤 스틸러)의 도움으로 자신이 찍은 친구들과의 일상 기록을 영화로 만들 기회를 얻는다. 이제야 무언가 이뤘다는 뿌듯함이 생겼건만, 방송국의 손을 거친 편집본은 레이나의 연출 의도와 달리 돈 냄새나는 상품으로 변질되어버린 후다. <청춘 스케치>는 레이나의 비디오카메라 화면을 곳곳에 삽입해 90년대 특유의 스타일리시함을 더한다. 지금으로선 스마트폰 어플로만 연출할 수 있는 90년대 비디오카메라 감성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 흔들리는 화면, 선명하지 않은 화질은 모호한 상태로 현실에 내몰린 청춘들이 느낄 혼란스러움을 효과적으로 전하는 장치가 된다.


중경삼림

[1994 point] California Dreaming, 몽중인

레트로 영화 레전드의 등장. <중경삼림>은 애인과 헤어지고 한 달이 되는 1994년 5월 1일 자 유통기한의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 모으는 경찰 233의 이야기로 막을 연다. 그를 연기한 금성무와 함께, 금발 가발에 트렌치코트를 입고 선글라스를 낀 임청하, 흰 속옷 차림으로 젖은 수건에 대고 혼잣말을 하던 양조위, 고무장갑을 낀 채 경찰 633(양조위)의 집 곳곳에서 전 애인의 흔적을 지우던 왕페이의 모습은 90년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됐다. 왕가위 감독 특유의 감각적인 편집과 대담한 색채, 강렬한 대사도 인상 깊지만 역시 관객의 가슴을 쿵쾅쿵쾅 뛰게 만드는 건 이 영화의 음악이다. 마마스 앤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리밍'(Califonia Dreaming)의 전주에 맞춰 등장한 경찰 633(양조위)의 사연 가득한 뒷모습을 기억하시는지. '캘리포니아 드리밍'이 쩌렁쩌렁 울리는 가게에서 소리치듯 주문을 주고받던 경찰 633과 페이(왕페이)의 첫 대화 신 역시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경찰 633의 집에 제 흔적을 가득 채워놓던 왕페이를 떠올리면 귓가에 '몽중인'이 자동 재생된다. <중경삼림>의 메인 테마곡은 듣는 것만으로도 1994년의 혼잡한 홍콩 도심을 소환하는 기묘한 힘을 지녔다.


나의 소녀시대

[1994 point] 유덕화

94년도 최고의 인기를 누렸을 <중경삼림>과 그를 비롯한 수많은 홍콩 영화 속 스타들. 그들을 동경한 소녀팬도 있었다. <나의 소녀시대>는 평범한 여학생 린전신(송운화)이 학교의 문제아 쉬타이위(왕대륙)와 얽히며 벌어지는 일을 담는다. 서로의 첫사랑을 밀어주자며 의기투합한 두 사람의 관계는 우정과 사랑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나의 소녀시대>가 보통의 하이틴 로맨스보다 특별한 작품으로 남을 수 있었던 건, 많은 이들의 추억을 자극하는 90년대 향수가 녹아있었기 때문. 린전신과 쉬타이위가 급속도로 우정을 쌓는 롤러장을 비롯해, 쉬타이위의 더듬이(!) 헤어스타일, 단번에 <천장지구>를 떠올리게 만드는 청청패션과 오토바이의 조합 등, 1994년을 배경으로 한 <나의 소녀시대>엔 보는 재미를 두 배로 늘리는 90년대 코드가 곳곳에 녹아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존재감을 자랑하는 건 고딩 린전신의 꿈의 남편, 유덕화다. 극 중 유덕화는 제3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의 존재감을 자랑한다. <나의 소녀시대>의 총괄 제작을 맡은 유덕화의 입김이 반영된 걸까?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영화 속 유덕화에 대한 설명은 미뤄두고 90년대 유덕화에 대한 기억을 꺼내보겠다. 유덕화의 인기를 실감하지 못하는 90년대 후반, 2000년대 출생자들이라면 1980년대에 나온 그의 히트작을 보길 추천한다. 사람의 한계를 넘어선 것 같은 그의 빛나는 외모를 보다 영화의 스토리를 놓치기 쉬우니 주의할 것. 젊은 시절의 유덕화를 보고 <나의 소녀시대>를 다시 본다면 린전신의 호들갑이 더 마음에 와닿을지도 모르겠다.


씨네플레이 유은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