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입니다. 사랑의 계절이라고도 하지요. (누가? 언제부터? 왜?) 사계절 가운데 어떤 시기가 사랑과 더 가까운지를 따져 묻는 것만큼 바보 같고 무의미한 일이 있을까요. 사랑하기 안 좋은 시기가 존재한다는 게 말이 안 되죠. 그럼에도 왠지 가을만 되면 멜로 영화가 더 보고 싶어지지 않나요? 한밤중에 그 사람에게 “자니?”라는 문자를 날려도 왠지 면죄부를 얻을 것 같은 날씨이지 않나요? (누구 맘대로...)
그래서 이번에는 좀 따뜻하고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보고 나면 왠지 그 사람에게 전화 한통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영화들을 추천해보려 합니다. 가을은 고백의 계절입니다. 봄에 고백하면 왠지 성급해 보이고, 여름엔 불쾌지수가 올라가서 꺼려지고, 겨울엔 추워서 움츠러드는 사랑꾼들에게 가을은 썸타기 좋은 영화, 아니 계절입니다. 말도 안 되는 억지같지만, 아무튼 이 영화들과 함께 모두 훈훈한 가을날이 되길 바라며.
귀를 기울이면
사랑에 관한 영화 리스트를 만들 때 주저없이 첫 번째로 꼽고 싶은 영화다.
그 사람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건네는 순간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한다. 무모해지기도 하고 때론 비굴해지기도 한다. 어쨌든 내가 건넨 마음을 상대가 받아주면, 그야말로 마법과도 같은 순간이 펼쳐진다. <귀를 기울이면>은 그런 마음과 마음의 이어짐, 믿음, 사랑을 향한 에너지로 뒤덮인 영화다.
중학교 3학년인 츠키시마 시즈쿠는 책과 고양이, 골동품 가게 등으로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아마사와 세이지라는 또래 남자애를 알게 된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이끌리는데 나이도 어리고 세상 경험도 부족하지만 책임감 있는 태도로 씩씩하게 사랑을 가꿔가는 모습이 아름답게 그려진다.
특히 두 사람이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에 올라 미래를 도모하며 결혼을 약속하는 엔딩 장면은 작화와 대사, 음악에 장면 구도까지 어느 하나 손색 없는 명장면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엔딩의 한참 선배격이다.)
이 영화의 감독이자 미야자키 하야오의 유일한 후계자로 지목받아왔던 콘도 요시후미 감독은 자신의 첫 작품이자 결국은 마지막 작품이 되어버린 <귀를 기울이면>에 시작과 희망의 에너지를 소중하게 담아냈다. 이 영화를 보고 지브리에서 내놓은 <고양이의 보은>을 연이어 보길 추천한다. <귀를 기울이면>의 스핀오프 격인 영화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두 영화 모두 지브리 영화 가운데 히사이시 조가 아닌 노미 유지 음악 감독의 독창적인 신시사이저 음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바라드 시간>이라는 OVA(판매용) 단편도 <귀를 기울이면>의 영향 아래 놓여 있는 지브리의 또 다른 강력 추천작이다.
사랑의 블랙홀
영원히 하루가 무한 반복되는 일상 속에 갇혀버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것이 과연 일상일까, 지옥일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루해 미쳐 버리거나 혹은 비극적인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
해롤드 래미스 감독의 <사랑의 블랙홀>은 무한 반복되는 하루 속에 갇힌 남자가 지리멸렬한 일상 속에서 삶의 묘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영화다. 매일 똑같은 일상이 반복된다는 기발한 판타지 설정이 돋보이는 로맨틱 코미디. 그러니까 로맨스? 당연히 이 영화 곳곳에 꽉꽉 들어차 있다.
<사랑의 블랙홀>의 주인공은 성격 고약하고 매사에 자기밖에 모르던 이기적인 남자다. 이런 남자가 매일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미스터리한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처음 한 두 달은 지루해 죽고 싶은 심정으로 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지만, 곧 그는 그 허무한 시간 도돌이표 속에서 자신이 그동안 그렇게 살아왔음을 깨닫게 된다. 그 후 남자가 평생 쳐다보지도 않던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의 인생에 대해서 마음을 열고 사랑에 열정을 다하는 인간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이 영화의 러닝타임을 꽉 채운다.
우리는 흔히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오늘만 뜨겁게 사랑하다 죽어버리겠다, 고 마음 먹지는 않는다. 물론 <실락원> 같은 영화 속 설정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그 사람과 함께 내일도 함께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갖게 된다.
바로 이처럼 내일을 기대하고, 미래를 도모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의 마법이라면, 이 영화는 블랙홀처럼 빠져들 수밖에 없는 사랑의 속성을, 장르 요소로 차용한 기발한 로맨틱 영화인 셈이다. 참고로 이 영화는 원제가 영화의 주요 시간 배경인 특정 기념일을 뜻하는 'Groundhog Day'다. 그러니가 <사랑의 블랙홀>이란 제목은 외화 역사상 손꼽히는 로맨틱한 번역 제목으로도 오래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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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멋진 날
영화 속 인물들이 연애도 하고 열심히 자기 일도 성취하는 영화는 드물다. 대부분 연애에 치중하느라 직업을 내팽겨치기 일쑤다. 우린 그런 영화를 보면서 저래서 "판타지"라고 코웃음치기도 한다.
일도 사랑도 모두 쟁취하고 싶은 뼛속 깊이 도시남녀인 관객들에게 추천하는 영화는 조지 클루니, 미셸 파이퍼 주연의 <어느 멋진 날>이다. 유명한 칼럼니스트인 잭 테일러(조지 클루니)는 아침에 출근하면서 딸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줘야 한다. 그런데 늦어서 유치원 소풍에 지각을 하고, 그때 마침 자신과 똑같은 처지에 처해 아들을 유치원에 지각시킨 멜라니(미셸 파이퍼)와 마주친다. 두 사람은 하루동안 정말 중요한 업무도 처리해야 하고 유치원에 가지 못한 아이들을 서로 번갈아 맡아줘야 하는 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설정 자체는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억지같지만 전혀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은 느낌이 들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실제로 영화 속에서 정말 연애와 일 어느것 하나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실제 직장생활을 하며 육아를 겸하는 관객들이라면 눈물 콧물을 쏟지 않을 수 없는 해프닝이 계속 벌어진다.
'One Fine Day'라는 근사한 원제를 달고 있는 이 영화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에 시작해 화창한 날씨로 끝맺는다. 물론 해피엔딩. 영화 제목과 묘하게 맞물리는 세심한 설정 하나에서부터 사랑이 넘쳐 흐르는 영화다. 조지 클루니와 미셸 파이퍼의 리즈 시절의 꽃미모를 감상할 수 있는 건 덤이다. 두 사람의 마지막 밀당 키스 장면은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 장르가 선사하는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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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서 더 가슴 아픈 이야기. 많은 멜로 영화가 남녀 사이의 애절한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만나서는 안 되는 관계, 혹은 더는 만날 수 없는 관계를 설정한다. 그런데 종종 과도한 억지 설정을 끼워넣어 감상을 방해하기도 한다.
<만추>의 남녀 역시 만났으나 헤어질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단 3일만 자유가 허락된 여자 애나(탕웨이). 그리고 오직 사랑따윈 필요 없다는 듯 돈으로 마음과 몸을 사고 주는 남자 훈(현빈)의 만남만큼 현대 멜로에서 애절한 관계 설정이 또 어디 있겠는가.
현실에서는 세기의 인연(주연배우인 탕웨이와 김태용 감독이 결혼했다)을 만들어준 사랑스러운 작품으로 기억될 테지만, 영화의 정서는 막연한 불안감과 쓸쓸한 외로움이 가득 담겨 있다. 그것은 안개 낀 시애틀을 배경으로 음악과 장소, 유려한 촬영과 무엇보다 애절한 두 배우의 연기를 통해 관객들의 심장을 저격한다.
이 영화의 재미있는 제작 비하인드가 하나 있는데, 극중 두 사람의 키스신은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긴 키스신으로 기록되고 있다. 공인 인증 기관이 없으므로 공식적으로 인정된 바는 없으나 영화 상에서 키스신이 무려 2분 27초 동안이나 계속됐다. 대부분 이보다 더 긴 키스신은 없다는 걸 인정하는 분위기다. (실제 촬영은 대여섯 번을 3분 여 동안 찍었다고 한다. 김태용 감독이 "키스하다 죽어버리자는 심정으로 연기해달라"고 주문했다고 하니, 이 얼마나 로맨틱한 촬영 비하인드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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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사랑일까
<우리도 사랑일까>를 오래 기억할 멜로 영화로 꼽는 이유는 이 한 장면 때문이다. 이 영화는 아무런 스킨십 없이 손가락 하나 닿지도 않은 채로 아주 강렬한 섹스신을 탄생시킨 영화다.
사랑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지만, 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은 정말 변하기 어렵다.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도 또 똑같은 이별을 반복하는 굴레에 던져지는 이유도 그래서다. 때문에 이 영화의 원제인 'Take This Waltz'를 이미 시작부터 그 끝을 예고하는 사랑의 왈츠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 영화는 그 장단에 놀아나는(?) 사람의 나약함 혹은 간사함을 너무나 아름답게 표현한다. 우리는 언제나 그렇게 사랑하고 그렇게 헤어진다. 낙엽이 예고없이 떨어지는 게 아니듯이, 지고 나면 푸르렀던 시절은 이미 지나가버린 지 오래다. <우리도 사랑일까>가 보여주는 사랑의 색은 원색 그대로의 사랑이 아니라 바래고 닳고 너덜해진 색으로 표현한다. 때론 그래서 더 아름답기도 한 게 사랑이다. 생각해보면 가을 낙엽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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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에디터 가로등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