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

2019년 제76회 베니스국제영화제의 최대 이변은 할리우드산 블록버스터 <조커>가 황금사자상을 거머쥔 것이었다. 논란의 로만 폴란스키도, 연륜의 로이 안데르손도, 이탈리아의 대항마 프랑코 마레스코나 일본을 벗어나 첫 해외 영화를 만든 고레에다 히로카즈, 그리고 올리비에 아사야스와 노아 바움백도 아닌, <로드 트립>과 <행오버> 시리즈 등 상업적인 코미디를 만들어온 토드 필립스가 최종 승자였다.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슈퍼히어로 코믹스 기반의 영화가 최고상을 수상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설명할 수 없던 광기의 아이콘 조커(호아킨 피닉스)를 생동감 있게 형상화시켰다는 점에서 찬사를 받은 한편, 폭력과 범죄에 대한 미화를 부추기는 위험한 작품이란 부정적 반응이 동시에 나오며 <조커>는 단연 올 하반기가 시작하며 화제작이 되었다.

<조커>

기존에 제작되던 DCEU나 과거 원작들에 얽매이지 않고 제목 그대로 오롯이 조커에만 집중하는 이 영화는 모든 사람들이 언급하듯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와 <성난 황소>, <코미디의 왕>을 섞어놓은 진중한 톤으로 사회악의 태동에 대해 고찰한다. 비극적인 아서 플렉의 가족사와 주변에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발작적인 웃음 그리고 빈부격차가 극심하고 공감 능력이 결여된 고담시의 위태로운 모습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한낱 웃기지 못했던 광대가 전혀 웃을 수 없는 위협적인 빌런으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담아냈다. 그 괴물의 내면을 잠시 엿본 영화의 강렬함은 호아킨 피닉스의 압도적인 연기와 토드 필립스의 안정적인 연출로 배가된다. 여기에 완성도를 더하는 건 힐더 구드나도티르의 숨 막힐 듯 묵직한 음악이다.

요한 요한슨과의 오랜 동료

힐더 구드나도티르

국내에선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이름이지만, 힐더 구드나도티르는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의 진가를 드러낸 영화음악 재원이다. 1982년 아이슬란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첼로를 연주했고, 아이슬란드 예술원과 베를린 예술대학교에서 음악연구 및 작곡을 전공한 그녀는 연극과 무용, 공연을 위한 곡들을 썼고, 니코 뮬리와 벤 프로스트, 판 소닉, 뭄, 나이프, 하우슈카 등 다양한 유럽계 아티스트들과 밴드에서 연주 및 녹음을 하며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아울러 첼리스트로 활동하는 틈틈이 실험적인 팝과 현대음악 사이에 위치한 독특한 자신의 솔로 앨범 5장을 발표하며 좋은 평가도 얻었다. 2011년부터는 영화음악으로 저변을 넓혀 핀란드와 브라질, 슬로바키아, 터키 등 여러 국적의 작품들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한다.

힐더 구드나도티르

그러나 정작 그녀의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게 된 건 같은 아이슬란드 출신의 영화음악가 요한 요한슨이 할리우드에서 작업한 일련의 작품들에 참여하면서부터다. 둘은 이미 2006년 요한이 발표한 곡 ‘Tu Non Mi Perderai Mai’나 2008년 요한의 여섯 번째 앨범 《포들란디아》(Fordlandia), 2009년 힐더의 2집 앨범 《위드아웃 싱킹》(Without Sinking) 등을 통해 여러 차례 교류한 바 있는데, 2013년 <프리즈너스>를 필두로 <시카리오>와 <컨택트> 그리고 넷플릭스에도 올라와 있는 TV시리즈 <트랩드>와 마지막 협업이었던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까지 함께 하며 공감각적인 엠비언트 속에 중후하면서도 매혹적인 어쿠스틱 음색의 스트링(첼로)을 조화시켜 비슷한 색채를 공유했다. 이는 힐더 자신의 솔로 작업과도 일맥상통하는 지점이고, 더 나아가 류이치 사카모토가 음악을 맡은 <레버넌트>에 참여하는 인연을 맺기도 한다.

화제의 미드 <체르노빌>의 영화음악가

<체르노빌> 사운드트랙 표지

이런 활동을 바탕으로 그녀가 최근 담당한 <오스>와 <톰 오브 핀란드>, <저니스 엔드> 등 유럽영화들은 좋은 평가를 받았고, 요한의 추천으로 그 뒤를 이어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를 단독으로 맡으며 할리우드 메이저에도 입성하게 된다. 하지만 급작스럽게 요한 요한슨이 타계하며 깊은 슬픔과 안타까움을 남기는데, 아이러니하게 그 부재로 인해 오랜 친구이자 동업자인 힐더 구드나도티르가 대안으로 떠오르게 된다. 원래 요한 요한슨이 담당하기로 한 HBO의 5부작 미니시리즈 <체르노빌>의 음악을 이어받은 힐더는 치명적인 방사선만큼이나 잿빛의 우울하고 어두운 사운드로 일말의 희망 하나 주지 않은 채 23년 전 어두운 사건으로 시청자들을 순식간에 침전시키며 올해 9월, 생애 최초 에미상을 수상한다.

힐더 구드나도티르

가이거 계수기와 터빈, 자동차 엔진과 헬리콥터 로터블레이드, 파이프 낙수 소리 등이 가득한 가운데 숭고한 보이스를 결합시킨 <체르노빌>의 스코어는 흡사 음악이라기보단 음향에 가까운데, 촬영이 진행된 리투아니아의 폐쇄된 발전소에서 직접 엠비언트를 채취해 그 소리들을 바탕으로 완성시킨 차갑고 메마른 소리는 지구 최악의 참사에 대한 진혼곡으로서 엄청난 절망감과 무기력함, 공포를 선사하며 그녀의 이름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이 암울한 색채는 고스란히 다음 작품인 <조커>로도 이어진다. <조커>는 DC 슈퍼히어로 실사화 작품 중에서 최초로 여성 작곡가가 음악을 맡은 작품이다. 셜리 워커가 꾸준히 문을 두드린 후 마블에서 <캡틴 마블>로 피나르 토프락이 최초로 금남의 벽을 무너뜨렸다면 힐더는 그 이상의 결과에 도전한다.

조커의, 조커에 의한, 조커를 위한 음악

<조커> 사운드트랙 표지

이미 베니스영화제에서 ‘프레미오 사운드트랙 스타즈 어워드’를 수상한 <조커>의 음악은 전형적인 슈퍼히어로 장르의 팡파르와는 전혀 다른 궤를 걷는다. 그렇다고 호러영화에서처럼 대놓고 악을 강조하지도 포장하지도 않는다. 첼리스트인 힐더 구드나도티르의 장기를 전면에 내세운 하강하는 첼로는 무너져 내려가는 조커의 내면을 그려내는 데 있어 깊은 전달력과 호소력을 갖는다. 영웅이 아닌 그에 대한 안티테제이자 악이 태동할 수밖에 없는 고담시의 냉소적이고 단절된 모습을 담기 위해 그녀는 약동하는 엠비언트와 스트링의 질감을 극대화시켰다.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와 <체르노빌>에 이어 실제 현존할 것 같은 지옥도에 어울릴 법한 사운드가 영상과 관객 주위를 견고하게 맴돈다.

<조커>

그간 배트맨과 관련된 시리즈들의 음악이 대체적으로 어두웠던 게 사실인데, 그것이 동굴 속 박쥐의 속성이나 브루스 웨인의 이중적인 모습과 연계된 어두움을 담아내기 위해서였다면, 이번 <조커>에선 순수하게 망상에 빠져든 자기파멸의 상황에서 애수와 연민, 동정 그리고 일말의 나르시시즘 등 심적인 모티브와 연관된 어두움에 기인한다. 한스 짐머와 제임스 뉴톤 하워드가 매만졌던 조커의 테마가 혼돈과 무질서, 광기에 가까웠다면 힐더 구드나도티르의 테마는 보다 자기연민적이고, 우울한 사이코드라마에 걸맞는다. 마치 하워드 쇼어의 <양들의 침묵>에서 어둠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심연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음악처럼 그녀의 서늘하고 묵직한 소리들은 조커 자신이 들려주는 고백과도 같다. 힐더의 음악은 호아퀸 피닉스의 연기만큼이나 시상식 단골 후보로 꼽힐 가능성이 크다.

적재적소에 등장하는 삽입곡들

<조커>

이런 무게감을 덜어주는 게 삽입곡의 역할이다. 토드 필립스는 이전 코미디들에서도 적재적소에 탁월한 선곡과 기가 막힌 음악적 활용을 보여준 바 있다. 예고편이 처음 공개됐을 때부터 화제가 됐지만,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 러브 테마에 가사를 붙인 지미 듀란트의 ‘스마일’(Smile)부터, 버스에서 흐르던 더 게스 후의 ‘래핑’(Laughing), 지하철에서 조커를 보며 취객이 부르던 ‘센드 인 더 크라운스’(Send In The Clowns), 조커로 거듭나며 계단에서 춤을 출 때 흐르던 게리 글리터의 ‘록 앤 롤 (파트 2)’(Rock 'N' Roll (Part 2)), 방송국에서 체포되어 경찰차 타고 갈 때 나온 크림의 ‘화이트 룸’(White Room), 그리고 엔딩에 흐르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댓츠 라이프’(That's Life) 등 삽입곡들이 영화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대변하고, 정서를 강화시킨다.


사운드트랙스 영화음악 애호가